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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엔딩은 죽음뿐-188화 (188/243)

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188화

내 물음에 두 번째 서랍을 뒤지던 손이 우뚝 멈췄다.

깜짝 놀란 듯 미동 없던 몸이, 이내 뻣뻣하게 내 쪽을 향했다.

“고, 공녀님.”

온통 가리고 있는 탓에 역시나 얼굴을 확인할 수 없었다.

그러나 흔들리는 푸른 눈동자는 마스크로 숨길 수 없는 노릇이다.

“뭐 하고 있냐고 물었잖아.”

나는 딱딱하게 물었다. 하녀가 흠칫 어깨를 떨다가 실토했다.

“그, 그게…… 에밀리가 점심을 먹는 동안 방 정리를 제게 부탁했어요. 여기만 하고 금방 나가려고 했습니다.”

“그래?”

아예 없는 일은 아니었다. 이 넓은 방을 매번 에밀리 혼자서만 청소하기엔 무리가 있으니까.

‘핑계가 제법 그럴듯하네.’

그렇게 생각하면서 나는 대수롭지 않게 그쪽으로 걸어갔다.

“비켜.”

짧은 명령에 하녀는 움찔거리며 화장대 앞에서 물러섰다.

나는 의자에 앉아 화장대 위와 아직 열려 있는 서랍 안을 훑었다.

없어진 건 없었다. 애초에 그걸 노린 게 아닐 테니까.

그래도 대충 확인하는 척을 하던 와중.

나는 문득 화장대의 거울을 보고 반사적으로 이를 악물었다.

안 그러면 곧장 열린 입 새로 비명이 쏟아져 나올 것 같아서였다.

딱딱하게 경직된 몸을 티 내지 않도록 안간힘을 쓰며, 나는 천천히 말했다.

“……더 할 필요 없겠구나. 외출 준비해야 하니까 그만 나가 봐.”

“아…… 예, 알겠습니다. 아가씨.”

등 뒤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하녀가 꾸벅 인사를 하고 몸을 돌리는 모양이었다.

거울을 보고 있으면서도, 아무것도 보이지가 않아서 소리로 추측할 수 밖에 없었다.

‘그대로 나가라, 제발…….’

화장대 위에 올려져 있는 손에 땀이 흥건하게 배어 나왔다.

저벅. 하녀가 한 발짝 걸음을 뗐다.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몰아쉬었다.

그때였다.

“……그런데, 아가씨.”

그대로 방을 나갈 줄 알았던 하녀가, 불현듯 내게 말을 걸었다.

“왜 아까부터…… 계속 거울을 보면서 말씀하세요?”

흐윽. 가까스로 비명은 삼켰지만, 펄떡 들썩이는 어깨를 막을 수 없었다.

두려움에 숨이 거칠어졌다.

나는 질끈 눈을 감았다. 그리고 이내 다시 뜬 후 스르륵 고개를 돌렸다.

여자는 고작 한 발짝 멀어진, 그 상태 그대로 서 있었다.

“…….”

방 안은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을 만큼 침묵에 잠겼다.

나와 눈이 마주쳤음에도 하녀는 기괴할 만큼 미동 하나 없이 나만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더는 연기를 지속할 생각이 없는 듯했다.

나는 별수 없이 태연한 척 입을 열었다. 그것만이 할 수 있는 전부였기에.

“……신기해서.”

하녀가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무엇이요?”

“뱀파이어도 아니고 왜 거울에 비치지 않니?”

“…….”

“이본.”

나지막한 부름에 하녀의 눈매가 반달로 휘었다.

“역시.”

하녀, 아니, 이본은 손을 들어 마스크를 벗었다.

“알고 있었구나, 페넬로페.”

이본은 게임 속 일러스트와 똑같이 예쁘게 미소 지었다.

당당하게도 얼굴을 드러낸 그녀의 모습에, 오히려 말을 잃고 머릿속이 하얘지는 건 나였다.

“……네가 한 짓이야?”

“뭐가?”

“아버지가 갑자기 온실에서 오찬 들자고 하게 만든 거.”

“눈치챘으면 좀 천천히 와 주지 그랬어, 페넬로페.”

이본이 천진하게 웃으며 답했다.

매번 울먹이며 말을 더듬던 유약한 얼굴이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나는 바짝 죄는 성대를 힘겹게 쥐어짰다.

“이제 내 앞에서 가식 떠는 건 집어치우기로 했니?”

“그러는 넌 어때?”

이본은 재밌다는 표정으로 곧장 되물었다.

“내가 누군지 모르는 척하는 건 이제 관두기로 했어?”

“그러라고 거울 앞에 서 있던 거 아니야?”

내 대답에 그녀가 눈살을 찡그렸다.

“실수였어. 네가 이렇게 빨리 돌아올 줄 몰랐거든.”

“…….”

“이것 참, 돌아온 것도 짜증 나는데, 내 뜻대로 되는 게 없네…….”

그녀가 손을 들어 제 이마를 문질렀다.

생각을 하는 듯 잠시 말을 멈춘 그녀가, 이내 슬쩍 내게 시선을 던졌다.

“……그런데 페넬로페.”

“…….”

“혹시 너도 돌아왔어?”

뜻을 알 수 없는 질문이었다.

그러나 내가 채 답하기도 전에 이본이 미간을 좁히며 중얼거렸다.

“아니, 아니야. 돌아온 거라면, 내가 오기 전에 수를 썼겠지. 성인식까지 손 놓고 가만있을 리가…….”

“…….”

“제가 얼마나 끔찍하게 죽었는지 알면서도 그렇게 멍청하게 있진 않을 거 아니야. 안 그래?”

초조하게 제 입가를 두드리며 알 수 없는 말들을 늘어놓던 이본이 불쑥 내게 물었다.

나는 아무런 대답 없이 그런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럼 넌 누구지? 내가 아는 페넬로페와는 너무 달라.”

눈살을 구긴 채 또 한 번 나를 살피던 이본은 낯선 사람을 바라보는 눈초리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지? 과거에는 분명, 공작저로 돌아오기 전에 너와 마주친 적이 없는데…… 모든 게 달라졌어.”

“어떻게 다른데?”

마침내 입을 열어 묻는 날 보며 이본은 순순히 답했다.

“지금쯤 넌 날 질투하다 못해 악을 쓰고 죽이려 들어야 하잖아.”

“…….”

“내가 굳이 세뇌하지 않더라도…… 가족들의 관심이 내게 쏠리는 걸 조금도 못 참아 했잖아, 페넬로페.”

진짜 페넬로페의 행적을 정확히 읊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어떻게 아는 거지?’

머릿속이 온통 혼란스러웠다.

아무리 숨겨진 악당이라도, 이본은 게임 속 등장인물에 불과하지 않은가.

‘그러면…… 이본도 빙의자?’

그러나 그 가정은 금방 저지됐다. 그렇다면 ‘너도 돌아왔냐’는 말을 쓸 이유가 없었다.

“네가 매번 난리를 쳐 준 덕분에 공작저를 손에 넣기가 참 쉬웠어.”

정신없이 머리를 굴리고 있는 와중, 이본이 고운 목소리로 장난처럼 되뇌었다.

나는 흠칫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본이 입맛을 다시며 어여쁘게 미소 지었다.

“맛있었어, 네 아비와 오라비들.”

뒷골을 타고 오싹함이 전신을 지배했다.

나는 숨을 참았다. 여기서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여 봤자, 득 될 게 하나도 없었기에.

“그런데, 왜?”

이본은 동요 없는 나를 보며 또다시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나 그녀의 목은 단순히 기울이는 데 그치지 않고 거의 목이 꺾일 듯이 돌아갔다.

뿌드득, 뿌드득-. 소름 끼치는 소리가 연신 울려 퍼졌다.

90도가 조금 넘은 각도에서 멈춘 이본이 말했다.

“과거를 기억하는 것 같진 않은데…… 넌 꼭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듯 행동하거든.”

“…….”

“계속 날 피하려는 것도 그렇고, 자작극이라고 인정한 것도 그렇고…….”

“솔레일에서 네 진짜 모습을 봤으니까.”

나는 벌벌 떨리는 몸을 있는 힘껏 참으며, 재빨리 대꾸했다.

안 그러면 저 시체 같은 년이 바로 내게 달려들어 사실대로 말하라고 윽박지를 것 같았다.

이본이 빙의자일지도 모른다는 가정은 머릿속에서 완전히 사라진 후였다.

그랬다면 저렇게 괴물처럼 목을 꺾고 있지는 않을 테니까.

“물론 내 정체는 지난번에 탄로 났지.”

내 대답이 납득이 된 듯, 이본이 눈을 깜빡였다.

이대로 넘어가나 싶은 것도 잠시였다.

“그렇지만, 너. 나에 대해서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생각조차 안 하잖아? 너답지 않게.”

“…….”

“왜일까, 페넬로페?”

“…….”

“두려울 것 하나 없던 넌데…… 이번엔 내가 무서워?”

괴기스러운 자신의 몰골에 눈도 떼지 못하는 나를 다 안다는 듯, 이본이 낄낄 웃었다.

나는 온기가 빠진 채 바들바들 떨리는 입술을 간신히 벌렸다.

“……그게 중요해?”

“응?”

“지난번에 말했지. 네가 무슨 목적으로 여기 온 건지 나와 상관없다고.”

“흠…….”

내 말이 진심인지 가늠하는 듯 이본이 침음을 흘렸다.

나는 온기 하나 느껴지지 않는 파란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애써 말을 이었다.

“어차피 난 여길 떠날 거니까 네 마음대로 해. 공작저를 쥐든, 먹든. 내 알 바 아니야.”

“아니지.”

뿌득, 뿌드득-.

다시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이본이 고개를 원래대로 들기 시작했다.

나는 참지 못하고 시선을 돌렸다.

“그런 네 행동 때문에 모든 게 틀어졌는걸.”

“난 아무 짓도 안 했…….”

“하나같이 널 붙잡지 못해 안달이 났잖아. 덕분에 세뇌가 제대로 들지 않는다고.”

완전히 고개를 원상 복귀한 이본이 내 말을 득달같이 끊으며 툴툴거렸다.

해맑은 표정이 꼭 심통 난 아이 같았다.

“네게서 한 명, 한 명 소중한 사람들을 빼앗을 때마다, 일그러진 네 얼굴을 보는 재미가 있었는데…… 지금은 왜 이렇게 다 내 마음대로 되지 않을까?”

“그것도 내 알 바가 아니지. 내가 너처럼 그 인간들 세뇌하는 거 아니잖아, 이본.”

나는 악착같이 대꾸했다.

“네 정체를 아는 내가 사사건건 방해하는 것보단, 그냥 가만 놔두는 게 나을 텐데.”

“맞아. 그렇긴 한데…….”

고개를 끄덕이던 이본이 이내 낯을 달리했다.

지금까지 나누던 대화는 모두 장난이었다는 양, 얼굴에서 표정을 모조리 지운 그녀가 싸늘하게 물었다.

“조각 어디 있어?”

“무슨 조각?”

“네가 훔쳐 간 내 거울 조각.”

직설적인 물음에 가슴이 덜컥 내려 앉았다.

퀘스트를 무시하고 그대로 놔뒀다간 어떻게 됐을지, 눈앞이 다 아찔해졌다.

이본이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나를 회유했다.

“내 거 돌려줘, 페넬로페. 그럼 네 말대로 넌 가만히 놔둘게.”

“무슨 말 하는 건지 잘 모르겠는데?”

나는 시치미를 뚝 뗐다.

뷘터를 믿지는 못했지만, 우선 공작저에서 빼돌릴 생각으로 그에게 맡긴 것이 이렇게 천만다행일 줄 몰랐다.

이본의 눈이 가느스름해졌다. 다시 뱀처럼 섬뜩하게 변하는 눈초리에 나는 허겁지겁 입을 열었다.

“아. 뭘 줍긴 했는데…… 돌아오면서 버렸나 봐. 없어, 나한텐.”

어깨를 으쓱이며 양손을 들어 보였다.

조각이 내게 없다는 말이 사실임을 알아들은 것일까.

이본은 곧장 다른 것을 물었다.

“고대 마법은 어떻게 쓰는 거야?”

“마법?”

“그때 네가 쓴 마법.”

“그거 내가 쓴 거 아니야.”

나는 무조건 잡아뗐다. 빙의자가 아닌 이상, 절대로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었다.

“네가 쓴 게, 아니라고?”

“응. 그때 나와 같이 갔던 마법사가 한 명 있었는데. 그가 쓴 걸 착각한 거 아닐까?”

“뷘터 베르단디?”

득달같은 물음이 돌아왔다.

‘X발. 게임에선 마법사가 누군지 아직 모르는 설정이라면서요…….’

나는 바르르 떨리는 입꼬리를 힘겹게 들어 올려 미소 지었다.

“웬 베르단디 후작님? 아니. 빈수라고 봉사 활동을 알선하는 상단에서 일하는 마법사야.”

“봉사 활동? 아하.”

이본은 알아들었다는 듯 손뼉을 한 번 마주쳤다.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그녀가 작게 중얼거렸다. 머리끝이 쭈뼛 섰다.

‘당장 뷘터에게 가야겠어.’

일단 이 상황만 모면하면 된다.

나는 그렇게 마음먹은 채 잔뜩 긴장한 눈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모르쇠로 일관하는 나를 보며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한 이본이, 이내 방긋 웃었다.

“그럼 이렇게 하자, 페넬로페.”

그리고 아차 할 새 없이 엄청난 속도로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더니.

“디 아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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