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189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채 알아차리기 전에, 푸른빛이 눈을 파고들었다.
‘유물……!’
이본이 무슨 짓을 하려는지 눈치챈 나는 허겁지겁 손을 들어 눈을 가렸다.
“이게 무슨 짓……!”
“나도 너한테까지 이럴 줄은 몰랐어. 넌 너무 시시해서 힘을 쓰는 것조차 아까웠거든.”
“집어치워! 난 아무것도 모른다고!”
“분명 그랬는데…….”
필사적으로 눈을 감으며 외쳤지만 이본은 전혀 내 말을 듣는 것 같지 않았다.
‘어떡해? 어떡하지? 이대로 나도 세뇌당하는 건가?’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쳤다. 겁에 질린 채 우왕좌왕하는 사이 푸른빛이 더욱 강하게 눈을 내리쬐었다.
나는 그것에서 벗어나기 위해 마구 뒷걸음질 쳤다.
그러나 이본이 도망칠 수 없도록 강하게 내 어깨를 압박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나는 그저 거미줄에 걸린 벌레처럼 허우적거릴 뿐이었다.
“잘 들여다 봐, 페넬로페. 이렇게 버티다 결국 내게 조각을 들켰을 때 벌어질 일들을.”
“으……!”
내 어깨를 세게 붙든 채 이본은 비밀을 알려주듯 작은 음성으로 귓가에 속삭였다.
“거울이 완성되고, 너는 네가 좋아하던 이들이 내게 휘둘리는 것을 무기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을 거야.”
그녀의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온통 푸른색으로 점령된 눈앞에 무언가 휙휙 스쳐 지나갔다.
지난번 솔레일에서 한 번 겪어 본 일이었다.
무수히 많은 환영 같은 것들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이성을 제대로 차리기가 힘들었다.
“난 조각 같은 거 몰라! 그러니까 그만…….”
“너를 싫어하던 그들은 이제는 너를 사랑한다는 명목으로 널 붙잡고, 어디로도 못 가게 감금하고, 결국 널 갈기갈기 찢어 죽이려 할 테니까.”
“이, 이거 놔!”
“가엾은 페넬로페…… 그러기 전에 내게 조각이 어디 있는지 알려주는 게…….”
휙, 휙. 스쳐 지나가는 무언가가 정신없이 시선을 현혹시켰다.
그런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뿐이었다. 머릿속이 울렁거리는 것만 제외하면 생각보다 버틸 만했다.
이본을 밀어내기 위해 허우적대던 손끝에 보드라운 살결이 닿았다.
나는 동아줄이라도 되는 양 그것을 와락 붙들었다.
“놓으라고 했지.”
“읏.”
나지막한 신음 소리에 나는 반사적으로 눈을 부릅떴다.
“하아, 하아…….”
우리는 서로의 어깨와 손목을 잡은 채 엉겨 붙어 있었다.
이본의 손목을 강하게 잡아 위로 쳐올린 탓에, 내 얼굴에 바짝 들이밀어져 있던 거울 조각이 조금 떨어졌다.
그 안에서 푸른빛이 새어 나와 여전히 눈을 강하게 찔렀지만, 어찌된 일인지 아무렇지 않았다.
눈을 뜨자 잡힐 듯 말 듯 휙휙 스쳐 지나가던 환영마저 사라졌다.
거칠게 숨을 헐떡이던 나는 세뇌가 먹혀들지 않았음을 직감하고 한쪽 입꼬리를 치켜올렸다.
“어쩌지? 네 세뇌가 나한텐 안 먹히는 것 같은데.”
“아. 이게 아닌가?”
그러나 내 조소에도 이본은 당황하지 않았다.
그저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다 되묻길.
“그럼 네가 가장 두려워하는 건 뭐야? 날 가장 무서워하는 줄 알았는데.”
“없어, 그딴 거.”
“거짓말하지 마. 그럼 내게서 악착같이 조각을 숨기는 이유가 뭔데? 그것만 주면 넌 가만 놔둔다는데.”
조각을 모른다는 내 말을 조금도 신뢰하지 않는 듯한 이본의 말에 나는 일순 멈칫했다.
‘……조각을 악착같이 숨기는 이유?’
사실 딱히 거창하지 않았다. 그냥 시스템이 시켰으니까.
퀘스트니까…….
‘그런데…… 그것만 주면 날 그냥 내버려 둔다는데, 내가 굳이 이렇게까지 열심히 숨길 필요가 있나? 히든 엔딩이 뭔지 알고.’
엔딩을 본다고 이 미친 곳을 탈출할 수 있다는 확신도 없는 데다, 난 게임 스토리대로 죽기 싫었다.
‘그냥 줘 버리고 떠날까? 찾다 보면 언젠간 나갈 방법이…….’
문득 그런 생각까지 미쳤을 때.
“응? 대답해 줘, 페넬로페.”
이본이 예의 그 천사 같은 얼굴로 내게 애원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날카로운 숨을 집어먹다가, 이내 이를 악물고 내뱉었다.
“……나한테 없어. 그런 거 안 가지고 있다고 했잖아.”
“그럼 네가 가장 두려워하는 죽음은 뭐야, 페넬로페?”
“……뭐?”
“봐.”
한순간 화제가 전환됐다.
잠시 멍해진 채로 이본의 질문을 헤아리는 사이, 그녀가 물기 어린 파란 눈동자로 흘끗 무언가를 가리켰다.
내게 잡혀 있는 손목, 그 손에 들고 있는 거울 조각이었다.
“여기 네가 그토록 두려워하는 죽음이 있어.”
그 안에서 새어 나오는 푸른빛이 점점 잦아들었다.
그러나 이본이 되뇌는 불길한 지껄임 때문일까.
조각 속은 잠잠한데, 이상하게도 미칠 듯한 초조함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미안한데, 난 너와 달리 별로 안 두려워. 죽으면 죽는 거지.”
나는 경계 어린 눈으로 흘끗 조각을 곁눈질하며 허세를 부렸다.
내 말에 이본이 눈을 접으며 싱긋 웃었다.
“그럴 리가. 내가 방금 들었는걸?”
“……뭘?”
“죽기 싫다고 중얼거리는 네 목소리를.”
“무슨…….”
초점이 흔들렸다.
나조차 자각하지 못할 만큼 무의식 중에 빠르게 지나간 생각을 대체 어떻게 알고 있단 말인가.
‘설마, 소리 내서 말했어?’
아니다. 나는 분명 그런 적 없는데…….
흔들리는 내 시선을 눈치챈 걸까.
이본이 천천히 고개를 숙여 코앞에 제 얼굴을 들이밀었다.
조각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른빛과 똑 닮은, 커다란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네 절망의 전제가 잘못됐네, 페넬로페.”
“잠깐.”
무언가 잘못됐다.
채 눈을 피할 새도 없이 그녀가 속삭였다.
“처음부터 다시 해 보자.”
“자, 잠깐, 그게, 아니……!”
“디 아쑴.”
주문 소리와 함께, 몸이 휘어잡힌 채 어딘가로 거세게 끌려갔다.
‘풍덩!’ 하고 물에 빠지는 것 같은 커다란 소리와 동시에, 눈앞이 새파랗게 점멸했다.
* * *
“흐으, 헉!”
거칠게 숨을 들이마시며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익숙한 공간 한가운데 서 있었다.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주위를 마구 둘러보았다.
“여긴…….”
내 자취방이었다.
빌어먹을 첫째 개새끼가 끝까지 농간질을 치는 것도 묵묵히 참고 얻어 낸, 반지하 단칸방.
매일같이 지친 몸을 누이던 곳인데, 이상하게도 너무 오랜만에 돌아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낯선 눈으로 방 안을 연신 둘러보았다.
그때였다. 위이이잉, 위이이잉-.
사방에서 파리 소리가 진동했다.
그 순간, 정체를 알 수 없는 이상한 냄새가 콧속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으. 이게 무슨 냄새야?”
생선 비린내 같기도 하고, 음식물이 썩은 냄새 같기도 한.
그 끔찍한 냄새는 숨을 내쉴수록 점점 더 강해졌다.
나는 코를 틀어막고 오만상을 찌푸리며 냄새의 근원지를 찾았다.
그러다 이내 어마어마한 수의 파리 떼들이 몰려 있는 곳을 찾아내었다.
내 매트리스 위였다.
왜애애애앵-. 시커먼 파리들이 우글우글 이불 위를 기어 다니고 있었다.
그러나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 틈새로 검지만 한 누런 것들이 꿈틀거리면서…….
“이, 이게 무슨…… 우욱!”
나는 경악스러운 벌레 떼의 출몰에 헛구역질을 하며 뒷걸음질 쳤다.
그 순간, 문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아이고, 세상에! 대체 이게 무슨 일이래요!”
“그러니까 말이에요. 이제 막 대학 들어간 젊은 애가 요절이라니.”
“참 씩씩한 아가씨였어요. 요즘 통 안 보여서 학교생활이 바쁜가 했더니, 세상에…….”
마지막 목소리가 낯익었다. 집 앞에 있는 슈퍼 아줌마 같았다.
아침을 우유로 때워서 매일같이 인사를 나누던 사이였는데…….
“……저게 무슨 소리야?”
나는 정처 없이 흔들리는 눈으로 파리와 구더기들이 우글거리는 매트리스 위를 바라보았다.
바보가 아닌 이상, 무엇을 뜻하는지 모를 리 없었다.
“나…… 죽었어?”
내 입으로 내뱉고도 믿기지 않았다.
나는 손을 들어 더듬더듬 내 몸을 만졌다.
‘이렇게 생생한데…… 죽었다고?’
그 생각이 미치자마자 나는 거칠게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야.”
내가 죽을 리 없잖아. 내가 그곳에서 어떻게 살아남았는데.
다시 돌아오려고 내가 어떻게……!
나는 퍼뜩 고개를 쳐들고 문으로 달려갔다. 이건 사실이 아니었다.
‘빨리 사람들에게 난 죽은 게 아니라고, 그건 잘못된 거라고 알려야 해.’
벌컥-. 나는 밖으로 나가기 위해 있는 힘껏 문을 열었다.
“아!”
그러나 바깥세상 대신, 넘실거리는 푸른빛이 시야를 덮쳤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전혀 다른 곳에 서 있었다.
어마어마한 수의 국화꽃. 그 한가운데에 놓여 있는 내…….
영정 사진.
“이, 이게, 무슨…….”
나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을 달싹였다.
대학교 입학 당시 찍은 증명사진을 대충 가져다 쓴 건지, 영정 사진 속 정면을 바라보는 내 얼굴이 지독히도 무표정했다.
[다음 뉴스입니다.
XX그룹 회장의 막내딸 ……양이 열흘 전 자취방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습니다.]
문득 들리는 소음에, 나는 휙 고개를 돌렸다.
텅 빈 장례식장에 있는 티비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였다.
[……양은 명문 대학에 합격 후 집을 나와 자취를 해 온 것으로…….
부검 결과 사인은 영양실조 및 과로에 의한 쇼크로, 경찰은 가정 학대 및 교내 따돌림을 의심…….]
뉴스에서 내 얘기가 나오는 중이었다.
“씨발, 재수 없게!”
그 순간, 누군가 거칠게 욕설을 뇌까리며 티비를 껐다.
나는 다시 휙 고개를 돌렸다.
‘……둘째 오빠?’
다시 돌아보니, 조문객들을 맞이하는 곳에 검은색 상복을 입은 세 명의 남자가 앉아 있었다.
우리 가족이었다.
“요즘 눈에 안 띄어서 좀 살 만하다 했더니, 뒈지는 것도 구질구질하게 뒈져 버리네. 거지 같은 년.”
둘째 개새끼가 리모콘을 바닥에 내던지며 짜증스럽게 머리를 헝클였다.
친부가 눈살을 찌푸리며 그런 놈에게 한마디 했다.
“스읍, 목소리 낮춰. 상 중에 경우 없이 무슨 짓이야.”
“뭐 어때요. 조문 올 사람도 없는데.”
“앉아. 밖에 기자들 깔려 있으니까.”
첫째 개새끼가 아버지를 대신해서 둘째를 노려보며 날카롭게 경고했다.
“하, 끝까지 고상한 척은 혼자 다 하시겠다?”
둘째 개새끼가 특유의 사나운 표정을 지으며 제 형을 노려보았다.
“따지고 보면 쟤 뒈진 거 다 형 때문이잖아. 아버지가 괜찮은 오피스텔 하나 구해 주라고 준 그 푼돈, 중간에 가로채서는 입 싹 닦은 게 누구셨더라?”
“입 닥쳐라.”
“왜. 내가 틀린 말 했어?”
“그렇게 따지면 쟤가 죽은 데 가장 큰 일조를 한 건 너겠지.”
“뭐?! 내가 뭘 했는데-!”
“학교 다니는 내내 쟤 밥 한 숟가락 먹는 꼴을 못 본 건 넌데, 왜 내 탓을…….”
“둘 다 입 다물지 못해!”
그때, 친부가 버럭 소리 질렀다.
“지금 시국이 어떤 땐데 싸우고들 있어! 회사 주가 곤두박질치고 있는 거 몰라!”
“그러니까 아버지가 처음부터 제 거지새끼 안 데려왔으면 이런 재수 없는 일도 안 일어났잖아요.”
둘째 개새끼가 볼멘소리를 내뱉으며 원망스럽다는 듯 내 영정 사진을 노려보았다.
말은 없었지만 첫째도 별반 다를 바 없는 표정이었다.
그 모든 꼴을 지켜보고 있던 나는 거칠게 헐떡였다. 가슴에서 드글드글 무언가가 들끓기 시작했다.
“내가, 내가 데려와 달라고 했어?”
볼을 타고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어떻게 사람이 죽었는데도 이렇게 개 같이 굴 수가 있어! 니들이 그러고도 인간이야?!”
너무 억울하고 미칠 것 같아서 마구 소리 지르던 나는 그대로 주저앉아 엉엉 울었다.
나는 단 한 번도 그들에게 내 거지 같은 삶을 구명해 달라고 애원한 적이 없었다.
오히려 끝까지 내 인생을 망치려 든 건 저들인데.
“왜 매번 나만 당하고, 나만 참고, 나만 상처 입어야 하는데, 왜-!”
분노, 좌절, 절망, 허무감이 차례대로 나를 나락으로 이끌었다.
나는 너무 지쳤다. 이제 화를 내는 것도 더는 참고 살아갈 자신도 없었다.
‘……죽고 싶어.’
나는 몸에서 천천히 힘을 뺐다. 그리고 매번 감정을 죽일 때처럼, 있는 힘껏 숨을 참았다.
‘이제 제발 그만 나를 편하게 해 줘.’
그 순간이었다. 문득 눈앞이 환해지더니.
〈SYSTEM〉 위험! 위험!
당신은 [악의 세력]으로부터 [세뇌 공격]을 받고 있습니다!
〈SYSTEM〉 돌발 퀘스트 발생!
마법으로 공격을 방어하시겠습니까?
[수락 / 거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