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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엔딩은 죽음뿐-190화 (190/243)

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190화

갑자기 떠오른 시스템 창에 일순 생각이 멈췄다.

그때부터 물밀 듯이 사라졌던 기억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게임, 이본, 조각, 세뇌…….

“……미친.”

이건 현실이 아니었다. 그것을 깨닫는 것과 동시에 시스템 창이 사라질 듯 깜빡이기 시작했다.

찬물이라도 맞은 것처럼 번쩍 정신이 들었다.

나는 방금 전까지 눈물 콧물 질질 짜던 게 무색하게 허겁지겁 [수락]을 눌렀다.

〈SYSTEM〉 [세뇌 게이지 바]가 0%에 이를 때까지 마법 주문을 강하게 외치십시오!

(마법 주문 : 라크라씨오)

가족의 환영 위로 90%에 육박한 채 아슬아슬 움직이는 게이지 바가 떠올랐다.

너무나도 게임스러운 장면에 입이 떡 벌어졌다.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멍하니 있는 것도 잠시.

게이지의 색깔이 새빨간 색으로 바뀌면서 마구 빛났다.

“어, 어…….”

100%에 육박했다는 것을 알리는 그것을 보며, 나는 쪽팔린 것도 잊고 괴상한 주문을 버럭 외쳤다.

“라,라크라씨오!”

쿠구우우우웅-.

알 수 없는 굉음을 동반한 진동이 사방에 울려 퍼졌다.

‘90%’

새빨갛게 발광하던 게이지 바가 잦아들었다.

정말로 마법 주문이 통했다.

“미친, 라크라씨오!”

그러나 안도하는 것도 잠시.

도로 오르려 하는 게이지 바의 빠른 움직임에 나는 쉴 틈 없이 커다랗게 외쳤다.

“라크라씨오!”

“라크라씨오!”

“라크라씨오-!”

빌어먹을 퀘스트 창의 말처럼 강하게 외칠수록 수치가 더 크게 떨어졌다.

‘52%’

순식간에 수치가 절반으로 줄어든 그때부터였다.

파직, 파지직-!

내 앞에 펼쳐진 끔찍한 현생의 환영이 유리 조각처럼 금이 가기 시작했다.

‘사라지고 있어……!’

잦아든 게이지 바와 금을 번갈아 보던 나는, 이내 비장한 표정으로 목청이 터지라 외쳤다.

“라크라씨오오오-!”

‘44%’

파즉, 파즈즈즉-.

파죽지세로 갈라지던 화면이 마침내,

쨍그랑-!

엄청난 파열음을 내며 와장창 부서졌다.

가족들의 얼굴이 조각이 되어 눈앞에서 와르르 쏟아져 내렸다.

‘……모든 게 환상일 뿐이야.’

그런데 둘째 개새끼의 얼굴이 담긴 조각을 보는 순간, 조금 전 내가 느꼈던 고통과 괴로움이 너무 지독해서 얼굴이 흐려졌다.

“너, 너…… 어, 어떻게…….”

망치로 깨부수듯 장면이 부서져 사라지고, 드러난 것은 눈을 부릅뜬 채 굳은 이본의 모습이었다.

어느새 나는 다시 게임 속, 페넬로페의 방으로 돌아와 있었다.

허공에 여전히 세뇌 게이지 바가 떠 있었다.

그러나 경악으로 물든 빌어먹을 면상을 보자, 게이지 바고 뭐고 눈이 뒤집혔다.

“분명 거의 성공했는데, 어떻게 이렇게 빨리……!”

“이 미친년아.”

나는 이를 악물고 이본을 부리부리하게 노려보며 버럭 소리쳤다.

“내가 난 가만 놔두라고 했지!”

넌 건들지 말아야 할 걸 건드렸어.

“자, 잠깐, 페넬로페……!”

“이거나 처먹어! 라크라씨오-!”

휘익-, 퍼억-!

어디선가 주먹만 한 하얀빛 덩어리가 쏜살같이 날아와 이본의 명치에 박혀 들었다.

“억!”

아차 할 새 없이 이본이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반대편으로 날아갔다.

쿠당쾅쾅-!

요란한 소음과 함께, 작은 몸이 벽에 거칠게 처박힌 후 바닥으로 주르륵 떨어졌다.

“쿨럭-!”

버려진 인형처럼 쓰러진 이본이 기침과 함께 왈칵 핏물을 토해 냈다.

“헐.”

너무 큰 마법의 위력에 나는 당황한 나머지, 주춤 물러섰다.

그 순간, 허공에 떠 있던 ‘세뇌 게이지 바’가 스르륵 사라졌다.

‘성공한 건가? 그런데 왜 창이 안 떠.’

흔들리는 눈으로 허공과 그녀를 번갈아 바라볼 때쯤.

“커흑……! 페넬로페. 사, 살려 줘…….”

또 한 번 피를 쏟아내며 이본이 내게 목숨을 구걸했다.

“내가 미안해, 페넬로페…… 그러니 제발…….”

애처롭게 내게 손을 뻗는 그녀를 돌아보며 나는 오만상을 찌푸렸다.

동정심이 일긴커녕, 소름끼치게만 느껴졌다.

‘죽어라, 이 가증스러운 악귀여.’

엑소시스트 영화에나 나올 법한 대사를 속으로 읊으며 이본 쪽으로 막 한 발짝 옮겼을 때였다.

문득 눈앞이 환해졌다.

〈SYSTEM〉 돌발 퀘스트 실패!

[악의 세력]을 저지했지만, 당신의 정신은 [18%의 세뇌 저주]에 잠식되었습니다!

“뭐야.”

갑자기 떠오른 퀘스트 창에 나는 눈을 부릅떴다.

‘하란 대로 했잖아, 왜 실팬데!’

그러나 항의하기도 전에 네모 창 안의 글씨가 바뀌었다.

〈SYSTEM〉 ~메인 퀘스트 : 진실의 저편~

저주를 풀려면 [고대 레일라의 무덤]으로 가서 [진실의 거울]을 찾으십시오.

“무슨…….”

그때였다. 벌컥-.

“아, 아가씨!”

방문이 열리더니, 두 명이 들어왔다.

“세, 세상에…… 아가씨, 이게…….”

“이본 아가씨!”

에밀리와 하녀장이었다.

방 안의 광경에 말을 잇지 못하던 두 사람 중 한 명이 경악하며 이본에게 달려갔다.

‘아…… X됐구나.’

그새 정신을 잃은 이본에게 달려가는 하녀장을 보며 나는 이마를 감싸 쥐었다.

피를 토하며 쓰러져 있는 ‘진짜 공녀’와 그 앞에 오만하게 서 있는 ‘가짜 공녀’의 광경.

게임 스토리 중 하나라면, 나는 오늘의 일을 계기로 이본을 괴롭히는 악녀로서 정점을 찍게 되는 것이다.

‘도망! 도망!’

머릿속에 사이렌이 울렸다. 나는 직감했다.

지금 도망가지 않으면 큰일이 날 것이라는 사실을.

“이본 아가씨! 아가씨! 정신 좀 차려 보세요!”

이본이 죽기라도 한 것처럼 통곡하는 하녀장을 무시하고 나는 빠르게 책상으로 걸어갔다.

항시 가지고 다니는 열쇠를 재빨리 품에서 꺼내는데, 책상을 돌아 서랍 앞에 도착하자 허탈해졌다.

잠겨 있는 서랍들이 이미 다 열려 있었기 때문이다.

‘무서운 년.’

다행히 조각 외에 다른 마법 잡동사니들은 필요가 없는지, 사라진 건 없었다.

나는 그 안에서 필요한 것들을 허겁지겁 꺼냈다.

비상시를 위해 준비해 둔 작은 금화 주머니와 데발놈의 마법 팔찌를 챙겨서 막 뒤돌려던 찰나였다.

문득 서랍 안쪽에서 무언가가 반짝거렸다.

나는 다시 손을 뻗어 서랍 안에서 그것을 꺼냈다.

황태자가 준 고대 발타 지도가 그려진 마법 스크롤이었다.

‘……고대 레일라의 무덤.’

메인 퀘스트를 떠올린 나는 이내 그것도 챙겼다. 어쨌든 쓸 일이 있으니까 반짝였을 테니.

허름한 가방에 그것들을 쑤셔 놓고 바로 방을 나서려던 때였다.

이본을 붙들고 오열하던 하녀장이 득달같이 달려와 내 앞을 가로막았다.

“이게, 이게 무슨 짓이에요, 아가씨!”

“비켜.”

“어디 가시려고요! 못 비켜요! 당신이 저지른 이 만행을 당장 집사님과 공작님께 알릴 것……!”

퍼억-!

흉흉한 얼굴로 내게 협박하던 하녀장이 불현듯 스르륵 무너졌다.

쿠당쾅-. 바닥으로 넘어진 하녀장의 뒤로, 스툴을 쳐들고 있는 에밀리의 모습이 보였다.

“……에밀리.”

“이걸로 갈아입고 가셔요, 아가씨.”

에밀리가 내게 무언가를 건넸다. 저택에서 일하는 남자 하인들이 입는 옷이었다.

“왜…….”

“그대로 입고 가셨다간 들키실 거여요. 여긴 제가 알아서 할 테니까, 걱정 마시고 어서 가세요, 어서!”

떠넘기다시피 옷가지를 내게 쥐여 준 에밀리가 이내 기절한 하녀장을 이본이 쓰러져 있는 곳까지 질질 끌고 갔다.

쫘아악-, 그녀는 등을 맞댄 자세로 그 둘을 앉혀 둔 채 어설픈 손짓으로 이불보를 찢은 후 묶기 시작했다.

그러다 멍하니 서 있는 나를 발견하고 소리쳤다.

“얼른 안 가고 뭐 하세요, 아가씨! 시간 없어요. 어서 가세요!”

“……고마워, 에밀리.”

나는 힘겹게 그 한마디를 토해 냈다.

솔직히 나는 내가 생각해도 좋은 주인은 아니었다.

에밀리는 내게 충성을 바쳤지만, 항상 그녀를 재고 의심했다.

그래서…… 그래서 정말로 이렇게까지 나를 도와줄 줄 몰랐다.

가슴이 울렁거렸다. 좀 더 잘해 줄걸, 하는 후회가 몰려왔다.

“……그간 미안했어.”

“미안하긴요! 전 아가씨의 전담 하녀인걸요.”

에밀리가 언제나처럼 활짝 웃으며 화답했다.

그리고 마치 나를 안심시키려는 듯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속삭였다.

“아가씨가 그러시면 우리가 악당 같잖아요? 우린 지금 진짜 악당을 잡은 것이어요!”

내 말을 인용하는 그녀의 말에, 왈칵 뜨거운 것이 복받쳤다.

“고마워. 나, 나갈게.”

모든 게 두렵고 무서웠지만, 나는 가야 했다.

다시 일어날 이본에게서 에밀리를 구해 주기 위해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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