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191화
나는 서둘러 에밀리가 준 옷으로 갈아입고, 가지고 갈 것들을 한 번 더 점검한 후 방을 나섰다.
이본의 농간인지, 아니면 아직 점심시간이 끝나지 않은 탓인지 저택 안팎은 기이할 정도로 고요했다.
데릭이 준 마법 팔찌를 찬 채 빠르고 수월하게 개구멍을 통과한 나는, 곧장 마차를 잡아탔다.
“상단 거리에 도착했습니다, 손님.”
혹여나 쫓아오는 인간들이 없는지, 창문에 바짝 붙어 초조하게 살피던 중 마부가 도착을 알렸다.
나는 삶을 치른 후 골목 안으로 빠르게 달려갔다.
매번 순간 이동으로만 왔지, 이렇게 마차를 타고 직접 온 것은 처음인지라 기분이 이상했다.
얼마 안 가 막다른 길의 끝, 익숙한 토끼 문양이 그려진 낡은 문이 나왔다.
나는 누가 쫓아올세라 허겁지겁 계단을 올라 문을 두드렸다.
쿵쿵쿵-.
그러나 세게 노크했지만, 문은 열릴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여기 없나? 올 때까지 기다려야 돼?’
텅 빈 골목길을 두리번거리며 고민하던 나는 이내 문고리를 덥석 잡았다.
잠겨 있으면 베르단디 후작가로 직접 쳐들어갈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달칵, 끼이익-.
그러나 막상 잡아 돌린 문고리는 너무 쉽게 열렸다.
“뭐…….”
나는 이내 지체 없이 벌컥 문을 열어젖혔다.
그리고 막 벽에 뚫린 문에서 나오는 중이던 토끼 가면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다, 당신…… 윽!”
놀라서 마법을 잘못 쓴 건지, ‘쿠우우웅-’ 하고 갑자기 벽이 닫히기 시작했다.
놈은 반쯤 벽에 낀 기이한 모습으로 당황한 채 허우적거렸다.
너무 마음이 조급해서인지, 그 모습이 그렇게 우습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하지만 누가 볼세라 나는 상단 문을 닫고 그에게 빠르게 다가가 속삭였다.
“돈 좀 줘.”
“……예?”
“맡겨 놓은 내 돈의 일부 좀 가지러 왔어.”
“무슨…… 일단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제기랄.”
뷘터가 나지막한 욕설과 함께 무어라 중얼거렸다.
얼마 후 다시 문이 열리고 그가 마침내 벽에 끼인 기괴한 상태에서 벗어났다.
“대체…… 갑자기 찾아와서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레이디.”
벽돌 가루가 잔뜩 묻은 옷을 툭툭 털어 내며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빨리 돈 받고 수도에서 튈 계획만 머릿속에 가득한 나는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읊조렸다.
“그대는 내 돈만 주면 돼.”
“일단 앉으십시오. 앉아서 얘기를 나눠도 되지 않습니까.”
“아니, 난 시간이…….”
“손.”
뷘터가 내 말을 끊으며 허름한 가방을 든 내 손을 가리켰다.
“……저번처럼 떨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 말에 스르륵 고개가 내려갔다.
하얗게 질린 채 애처로울 만큼 덜덜덜 떨리고 있는 손가락 끝이 보였다.
‘……너무 흥분했어.’
그것을 자각하자 뒷목이 온통 식은땀으로 축축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분노가 가시고 난 자리에 다시금 두려움이 물씬 피어올랐다.
“……문을 잠그겠습니다. 앉으십시오.”
한 번 더 자리를 권하는 뷘터의 말에, 나는 비척비척 걸음을 옮겨 소파로 걸어가 앉았다.
내 맞은편에 덩달아 앉은 뷘터가 손을 두어 번 흔들었다.
철컥, 철컥-.
어디선가 잠금장치가 잠기는 소리가 들리고, 연달아 주전자와 찻잔이 날아왔다.
매번 있었던 일이라 더 놀랍지 않았다.
보글보글 끓는 차가, 내 앞에 안착한 찻잔에 부어졌다.
“이제 말씀하셔도 됩니다.”
모든 게 정리되자, 뷘터가 다정한 목소리로 나를 얼렀다.
울컥, 그에게 모든 걸 쏟아내고 싶은 나약한 마음이 치솟았다.
그러나 나는 가까스로 그것을 내리누르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별거 아니야. 그냥, 사야 할 것이…… 좀 생겼어.”
“공작저에서 도망가시는 겁니까?”
곧바로 정곡을 찌르는 그로 인해 말문이 막혔다.
나는 그에게 도망가려 한다는 말을 최대한 하지 않으려 했다.
- 아무것도 모르고 내게 비자금을 맡긴 당신!
- 공작님의 친딸이 돌아오면, 당신이 그 돈으로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질까 봐!
담백한 관계라고만 생각했던 그의 속내를 들은 후, 어쩌면 그가 내 탈출 계획을 망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도한 망상이라는 건 알지만, 이클리스로 한 번 겪어 보았으니까.
뒤통수라는 게 얼마나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나를 후려치는지.
모든 것이 어그러진 상태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죽을 날만 기다리는 게 얼마나 끔찍하고 숨 막히는 일인지 충분히 겪어 봤으니까.
“……어디로 가시려는 겁니까. 도와드리겠습니다.”
그러나 뷘터는 의외로 정상적으로 말했다.
잠시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던 나는, 되레 그 말에 천천히 이성을 되찾았다.
“……조각은 잘 보관하고 있나?”
도망도 도망이었지만, 따지고 보면 그에게 해야 할 말이 많았다.
대답 대신 뜬금없는 내 물음에 뷘터는 짤막하게 대꾸했다.
“안전한 곳에 보관해 두었습니다.”
“갑작스러웠을 텐데 부탁 들어줘서 고마워. 그것도 돌려줬으면 하는데.”
“조각…… 을 말입니까?”
이본의 세뇌는 생각보다 너무 강력했다.
저택 외부에 있는 뷘터에게 맡기는 게 나을 거라 판단했지만, 그의 정체를 이미 정확히 알고 있는 그 미친년으로 인해 생각이 바뀌었다.
“응. 그 조각, 돌려줘. 내가 가지고 있을게.”
“안 됩니다.”
“왜지?”
“레이디께서 가지고 계실 만한 물건이 아니니까요. 그건 너무 위험합니다.”
“하지만…….”
“그때, 솔레일에서 가지고 오신 겁니까?”
줄 수 없다는 뷘터의 말에 반박하려던 나는, 이어서 따져 묻는 목소리에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대체, 왜 가져왔다고 지금껏 말하지 않은 겁니까. 저 유물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그때 같이 봤으면서……!”
차마 말을 끝맺지 못하고 화를 참는 뷘터의 눈초리가 엄중해졌다.
‘나도 그게 그렇게 무서운 물건인 줄 전혀 몰랐다고…….’
시스템이 준 보상에 불과한데 왠지 모르게 사고를 쳐서 혼이 나는 아이가 된 기분이 들었다.
숙연하게 고개를 숙인 채 뷘터의 눈치를 살피던 나는, 이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대, 혹시…… 진실의 거울이 뭔지 알아?”
“진실의 거울? 그걸 당신이 어떻게…….”
네가 그걸 어찌 아느냐는 듯, 뷘터의 눈동자가 일순 커다랗게 확장됐다.
혹시 몰라 떠보길 잘했다.
잘 알고 있는 것 같은 그의 모습에 나는 연달아 물었다.
“그게 대체 뭐야? 어디에 있는 거지?”
“그건…… 여기서 할 말이 아닙니다.”
난감한 기색으로 나를 바라보던 뷘터가 고개를 저었다.
그러더니 별안간, 그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따라오시겠습니까.”
“그냥 돈이랑 조각 주고, 어디에 있는지만 얘기해 줘. 시간이 별로…….”
“돈도, 조각도 저 안에 두었습니다.”
할 말이 없어졌다.
나는 멀거니 그를 바라보다 이내 천천히 따라 일어났다.
생각해 보니 사무실에 그냥 앉아 있는 것보다, 어디든 비밀 공간에 들어가 있는 것이 좀 더 마음이 놓일 것 같았다.
먼저 벽에 다가선 뷘터의 뒤로 막 다가갔을 즈음이었다.
문득 눈앞이 환해졌다.
〈SYSTEM〉 히든 퀘스트 발생!
마법사의 은밀한 공간에 초대받았습니다.
들어가 보시겠습니까? (보상 : 알 수 없는 무언가.)
[수락 / 거절]
‘이 미친 게임아…….’
결국 나는 게임의 히든 루트대로 움직이고 있는 것인가.
갑자기 떠오른 시스템 창에 안심하면서도 기분이 형용할 수 없이 참담해졌다.
이전에 호감도 폭락을 겪은 후 다시는 은밀인지 X랄인지 공간에 발을 들이밀지 않겠다던 나는, 이제 ‘초대’까지 받는 지경에 이르렀다.
수치가 보이지 않는 보랏빛 호감도 게이지 바를 착잡한 눈으로 바라보던 나는 이내 선택했다.
드르르르륵, 쿠웅-.
[수락]을 누름과 동시에 벽이 열렸다.
“……진실의 거울은 고대 레일라족과의 전쟁에서 마법사들이 그들을 봉인하기 위해 영혼을 담아 만든 유물입니다.”
침묵에 잠긴 채 널찍한 통로를 걷던 와중 문득 뷘터가 입을 열었다.
‘진실의 거울’에 관한 설명이었다.
왠지 게임의 튜토리얼을 듣는 느낌으로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수많은 타인의 목숨을 흡수한 레일라들은 점점 본질을 잃고 반불사의 괴물로 변해 갔습니다. 그 지경에 이르면 더는 인간이라 부를 수 없습니다.”
“…….”
“본질을 잃은 그들은 그대로 있다간 과도한 힘에 이성을 잃고 폭주하다 자멸합니다. 때문에 레일라족은 형체를 유지할 숙주를 찾아다니지요.”
“……숙주?”
문득 되묻자 뷘터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하지만 맞지 않는 껍데기를 억지로 뒤집어써 봤자, 완전하지 않아 절대로 인간이라 볼 수 없는 흠이 생깁니다.”
“……물이나 거울에 비치지 않는 거?”
뷘터가 흠칫 걸음을 멈추고 놀란 눈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야 방금 전에 그 무서운 장면을 겪고 왔으니까.
목 끝까지 차오른 말을 힘겹게 삼키고 나는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내가 답할 기미를 보이지 않자, 그는 얼마 후 조용히 말을 이었다.
“……전쟁이 지속될수록 레일라의 숙주로 희생되는 인간들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갔습니다. 그것을 더 볼 수 없었던 고대 마법사들은, 최후의 수단으로 그들의 목숨을 바쳐 만든 마도구로 레일라들을 봉인했습니다.”
우리는 마침내 복도의 끝, 광활한 공간에 도달했다.
“형체가 없는 레일라들의 본질을 비춰 붙잡아 두는 것.”
“…….”
“……그것이 바로 진실의 거울이지요.”
전과 다름없이, 박물관 같은 비밀스러운 공간.
그 한가운데, 거의 천장에 닿을 만큼 엄청난 크기의 거울이 떡하니 놓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