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192화
나는 갑자기 맞닥뜨린 거울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뷘터의 은신처에 있다는 건 둘째 치고 거울의 모양이 꼭…….
‘꿈에서 본 거랑 똑같은 거울이잖아.’
나는 천천히 거대한 거울 앞으로 다가갔다.
“이게…… 진실의 거울이야? 왜 여기…….”
천천히 손을 뻗어 그것을 만져 보려 할 때였다.
표면에 닿자마자 손가락이 쑤욱 반대편으로 넘어갔다.
화들짝 놀라 손을 거두는 순간.
“이건 고대 자료들을 바탕으로 구형해 낸 모형입니다. 최근 레일라의 출몰로 다시 만들어 낼 수 있는지 연구 중입니다.”
뷘터 놈이 나를 대신해 거울 환영에 팔을 쑤욱 넣다 빼며 답했다.
어디선가 ‘훼이크다 XX아!’ 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갖은 상념이 푸시식 식어 버린 나는 미간을 좁히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런데, 아이들은?”
“안전가옥에 대피시켰습니다.”
짤막한 뷘터의 대꾸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게 안전가옥이 아니었단 말이야?’
그러나 이내 알아서 했겠거니 싶어 다시 관심을 거울로 돌렸다.
“이건 뭐지?”
그때, 내 시선을 잡아끄는 것이 있었다.
거울의 오른쪽 모퉁이가 도려내진 것처럼 사라진 채 그 주변에 금이 가 있었다.
“고대 마법사들이 거울을 만들었을 때 레일라 일족도 가만히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은 끊임없이 거울을 공격했고, 일부를 훼손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내가 가리킨 곳을 발견한 뷘터가 설명했다.
“그러나 일부는 일부일 뿐, 결국 거울은 그대로 작동했고 레일라들은 발타에 봉인됐습니다.”
“이 일부는 그럼 소멸된 건가?”
“문헌에서는 15조각으로 나뉜 채 세상에 퍼졌다고 적혀 있습니다만…….”
말끝을 흐리는 뷘터의 눈빛이 돌연 어두워졌다.
“최근 레일라 신도들이 그것을 악용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레일라 신도? 그놈들이 마법사들이 만든 거울을 어떻게…….”
“거울의 특성을 이용하여, 되레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내면을 비추고 세뇌시키는 것으로 말입니다.”
“아.”
그것을 직접 당하고 온 나는 단번에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로써 내가 얻어야 할 정보는 모두 얻었다.
나는 거울 모형에서 미련 없이 등을 돌린 채 말했다.
“알려 줘서 고마워. 이제 돈과 거울 조각을 줘.”
뷘터는 흔들리는 눈으로 내가 내민 손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조금 전 들었다시피, 레일라가 사용하는 조각은 무척 위험합니다. 레이디께서 가지고 계실 만한 물건이 아닌…….”
도돌이표처럼 반복되는 대화에, 나는 한숨을 쉬며 들고 있던 가방 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이건…….”
군청색 동공이 찢어질 듯 확장됐다.
내가 뷘터에게 내민 것은, 에밀리가 묶어 놓은 이본에게서 빼앗아 온 또 다른 조각이었다.
“이것도…… 솔레일에서 가져온 것입니까?”
“아니. 조금 전에 레일라에게서 빼앗아 온 거야.”
“그게 무슨…….”
“나, 저택에서 세뇌당했어. 중간에 간신히 저지하고 도망쳐 나온 거야.”
내 말에 뷘터의 숨이 멎었다.
석상처럼 굳어 있던 그의 눈매가 서서히 괴롭게 허물어졌다.
“아…… 내가 당신을…….”
선연한 고통이 검푸른 눈 위로 스쳐 지나갔다.
뷘터는 천천히 내게 손을 뻗었다. 그리고 더듬더듬 내 얼굴을 매만졌다.
“내가 당신을 끌어들여서…… 나 때문에 당신이 결국…….”
피부에 바들바들 진동이 느껴졌다.
남을 돕지 못해서 죄책감을 느끼던 선량한 남주.
그는 내가 세뇌당한 게 자신의 탓이라 여긴 듯 무척이나 괴로워 보였다.
온전히 그의 잘못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따지고 보면 모든 게 다 게임 스토리대로 진행된 일인데.
그간 나도 모르는 사이, 나를 믿지 않았던 그에게 앙금이 쌓였던 걸까.
차마 ‘그대 탓이 아니다.’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저 처절하게 몸을 떠는 뷘터를 멀거니 바라볼 뿐.
“……누굽니까.”
얼마 후 조금 진정했는지, 그가 무서운 목소리로 추궁했다.
“누가 감히 공작저에 숨어들어서…….”
내게 따져 묻던 그가 문득 말을 멈추었다.
스스로 답을 깨달은 것처럼 초점 없는 눈빛으로 물었다.
“설마…… 이본 영앱니까? 이본 그 애가, 레일라…….”
“……물과 거울에 비치지 않는 것도 확인했어. 내 말을 믿을지 안 믿을지는 그대 자유야.”
“아아.”
내 말에 또 한 번 뷘터의 눈매가 왈칵 허물어졌다.
나를 향한 의심으로 똘똘 뭉쳤던 과거를 후회하는 것 같았다.
이렇게 극에 달한 상황이 아닌, 조금 더 일찍 말했더라면 그는 내 말을 믿었을까.
죄책감으로 헐떡이는 뷘터를 보니 부질없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것들을 털어내고 담담히 읊조렸다.
“조각들은 내가 가지고 도망가는 게 더 안전할지 몰라. 그대는 조각 말고도 지킬 것들이 많은 사람이니까.”
“제가…… 제가 다 알아서 하겠습니다. 제가 해결을…….”
“내가 그대를 믿지 못하겠어.”
나는 다소 냉정하게 말했다.
“레일라는 세뇌를 쓰고, 그대는 이본을 누구보다 착하고 선량한 이라 믿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노멀 모드대로라면, 레일라와 대적하는 사명을 가진 뷘터 역시 별다른 어려움 없이 여주와 사랑에 빠진다.
임시로 공작저에서 빼돌린 것일 뿐, 처음부터 그를 믿지 않았다.
내 뺨을 붙들고 있던 손이, 이윽고 스르륵 힘없이 떨어져 나갔다.
잠시 고개를 숙이고 호흡을 삭이던 뷘터는, 이내 조심스럽게 내 손목을 잡았다.
“……이리로 오십시오.”
그는 나를 끌고 거대한 거울 환영을 지나쳐 안쪽으로 걸어갔다.
순순히 뒤따라간 지 얼마 안 가, 그가 멈췄다.
광활한 공간의 정중앙.
각종 유물과 자료들을 담은 수많은 유리 케이지 사이로, 유일하게 공기 중에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는 화분 하나가 있었다.
꽤 커다란 화분의 크기에 비해 그 안에 자라 있는 것은 딱 하나뿐이었다.
외따로이 심겨진, 작고 가녀린 보라색 꽃봉오리.
“이게…… 뭐야?”
나는 뷘터가 뜬금없이 보여 준 화분을 보고 영문 모를 표정을 지었다.
그때, 그가 갑작스레 손을 뻗어 여린 식물의 줄기를 와락 붙잡았다.
그리고 힘을 줘 그대로 그것을 뿌리째 뽑아 버렸다.
“무슨……!”
그의 기괴한 행위에 당황하던 나는, 장미의 잔뿌리에 딸려 나온 것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그것은 내가 그에게 맡긴 거울 조각이었다.
“이 공간은 제 무의식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무의식?”
“그래서 제가 세뇌에 지배되었거나, 죽음을 맞이할 시…… 이곳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 또한 같이 소멸되지요.”
뷘터가 뿌리에서 거울 조각을 떼어 내 다시 화분 안에 대충 던져 넣었다.
그리고 내게로 몸을 돌려 뽑아낸 보라색 꽃을 내밀었다.
“받으십시오.”
나는 얼떨결에 그가 건네준 꽃을 받아 들었다.
그러자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방금 전까지 잔뜩 오므라들어 있던 꽃봉오리가 점차 벌어지기 시작하더니, 순식간에 활짝 피어났다.
화려한 보라색 장미꽃이었다.
‘조각 달라니까, 웬 장미꽃?’
나는 도저히 의미를 알 수 없어 그저 멀뚱멀뚱 꽃과 뷘터를 번갈아 보았다.
그는 활짝 핀 장미꽃을 우두커니 내려다보다가, 다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솔레일에서 레이디를 데려다 드리고 돌아왔을 때…… 이곳 구석에 이 장미꽃 한 송이가 피어 있었습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한 일이냐는 의문이 들었지만, 나는 곧 납득했다.
‘무의식이 연결된 곳이라고 했나?’
하지만 그가 갑자기 내게 이런 얘기를 하는 이유는 알아차릴 수 없었다.
“저는 갑자기 제멋대로 꽃이 핀 원인을 알 수 없었습니다. 장미꽃의 의미라면 보통 사랑을 뜻하지 않습니까.”
“…….”
“보라색 장미꽃말은 더더군다나 의미가 모호하지요. 완전한 사랑과 불완전한 사랑.”
“…….”
“저는 멍청하게도…… 꽃이 핀 이유도, 제 감정이 그 둘 중 어느 쪽인지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때였다. 들고 있던 장미꽃의 꽃잎이 하나, 둘 떨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멍하니 그의 머리 위를 올려다보았다.
하드 모드가 끝났음에도, 아직도 선명히 떠 있는 호감도 게이지 바.
“마지막으로 공작저에서 당신을 만나고 와서 깨달았습니다.”
“…….”
“내가…… 모든 걸 망쳐 버렸다는 걸.”
뚝, 뚝, 끝도 없이 보라색 꽃잎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뷘터는 잡고 있던 내 손을 놓고, 쓰고 있던 토끼 가면을 들어 올렸다.
드러난 그의 볼을 타고, 반짝이는 것들이 흘러내렸다.
더는 내 앞에서 가면을 뒤집어쓰고 있지 않은 남자는, 뚝뚝 떨어지는 꽃잎처럼 울고 있었다.
“……후작님.”
나는 힘겹게 그를 불렀다.
흠뻑 젖어 있는 수려한 얼굴을 보니, 납덩이를 얹은 듯 가슴이 무거워졌다.
우리는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저를 신뢰하지 못하더라도, 제게 맡긴 조각은 이쪽에 두고 가십시오.”
신음 하나 내지 않고, 그가 고요하게 말했다.
“그녀는 조각을 찾아 유물을 다시 완성시키려 할 겁니다. 시선을 분산시키는 게 어쩌면 더 현명한 일일지 모릅니다.”
“…….”
“그리고…… 저는 지금부터 그녀를 무력화할 방법을 찾고, 공격할 겁니다. 제게로 신경이 쏠려 있어야 당신이 가는 길을 막지 못할 겁니다.”
잠시 생각하던 나는, 이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본이 레일라라는 내 말을 믿는 이상, 그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어쨌든 유물을 완성시키지 못하게 하란 뜻일 테니까…….’
그런 내 태도에, 입술을 달싹이며 물었다.
“……어디로 가는지는 안 알려 주실 겁니까.”
“우선 북방으로 갈 거예요.”
“갑자기 북방은 왜…… 아.”
이유를 알아챘는지, 뷘터가 이를 악물었다.
그에겐 정말 미안한 일이지만, 나는 끝까지 거짓을 읊었다.
혹시 그가 이본에게 당할지도 모르기에.
퀘스트 완료를 위해선 발타로 향하는 내 위치를 절대로 들키면 안 된다.
북방으로 가는 것은 퀘스트가 모두 끝난 후였다.
‘내 세뇌를 푸는 게 먼저야.’
칼리스토가 걱정되긴 했지만, 남주 후보이니 죽진 않을 테니까.
내가 보았던 모든 게 환상이라는 것을 알았는데, 아직도 무슨 세뇌를 당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나는 시스템이 시키는 대로 하기로 결심했다.
이 끝에 과연 무엇이 기다리고 있든지.
“제가 데려다 드린다고 하면 분명 거절하시겠지요.”
“후작님께는 부탁이 있어요.”
이성을 되찾은 나는, 완곡한 거절 대신 그에게 하고자 하는 말을 내뱉었다.
“제가 도망쳐 오는 걸 돕느라, 제 전담 하녀가 곤경에 처했어요. 그 애를 잘 보살펴 주세요.”
“……안전가옥으로 대피시켜 드리겠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감사해요. 그리고…… 죄송해요.”
내 말을 알아들은 뷘터는 우는 얼굴로 웃었다.
꽃이 완전히 져버렸다. 그를 확인한 뷘터는 이내 토끼 가면을 다시 내려 썼다.
그리고 지팡이를 꺼내 허공에 한 번 휘둘렀다.
그러자 작은 주머니 하나가 나타났다.
“돈과 이동 마법 스크롤을 몇 개 넣어 두었습니다. 돈은 사용하기 편리하게 금화로 바꾸어 두었습니다.”
뷘터는 그것을 내게 건넸다.
“마법 주머니에 한도가 있어 전액을 담지는 못했습니다. 그래도 섬 하나 정도는 살 수 있는 금액입니다.”
“고마워.”
나는 다시 가면을 쓴 그를 상단주로 대했다.
“그만 가 볼게, 조심해.”
그리고 나지막이 인사하고 곧장 돌아섰다.
그는 내 인사에 답하지 않았다.
우두커니 서 있는 그를 남긴 채, 홀로 비밀 공간을 빠져나올 무렵이었다.
〈SYSTEM〉 히든 퀘스트 완료!
[마법사의 신뢰]를 얻었습니다.
보상으로 [보라색 장미꽃 한 송이], [이동 마법 스크롤], [999,999,999+ 골드]가 주어집니다.
그는 마침내 내게 신뢰를 주었고, 대신 애정을 잃었다.
나는 씁쓸해지는 마음을 다스리며, 그에게 받은 져버린 보라색 장미꽃을 소중하게 가방에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