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193화
뷘터의 상단을 빠져나온 나는 신속하게 걸음을 옮겼다.
그가 그리 졸렬한 놈은 아니란 것을 알았지만, 혹시 모를 미행을 방지하기 위해 다른 골목으로 가서 마법 스크롤을 쓰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막 대로변으로 나왔을 때 나는 사방에 깔린 에카르트 문양이 새겨진 갑옷들을 보고 기함했다.
‘미친!’
이번에는 확실했다. 치안 때문이 아닌, 나를 잡으려 기사단을 푼 것이란 걸.
‘아오, 어떡하지?’
잠시 고민하던 나는 이내 뷘터가 준 주머니를 뒤적였다.
몇 개 챙겨 준 거라면서 얼마나 넣어 둔 건지, 종이 뭉치가 두툼했다.
그중 한 개를 꺼내어 펼쳐 든 순간.
〈SYSTEM〉 [이동 마법 스크롤]
을 사용하여 다른 곳으로 이동하시겠습니까?
[예. / 아니오.]
익숙한 네모 창이 떴다. 나는 망설임 없이 [예.]를 눌렀다.
〈SYSTEM〉 마법 주문을 외치며 [이동 마법 스크롤]을 찢으십시오.
(마법 주문 : 삐라띠오-???)
짜증 나는 주문 때문에 반사적으로 눈살이 찌푸려졌지만, 침착하게 주문을 외웠다.
‘삐라띠오 아르키나!’
찌이익-.
동시에 스크롤도 같이 찢자, 네모 창 안의 흰 글씨가 변했다.
〈SYSTEM〉 [이동 마법 스크롤]을 1개 사용하여 [아르키나]로 이동합니다.
〈SYSTEM〉 error! error!
[아르키나] 주변으로 강한 마법 결계가 쳐져 있어 [이동 마법 스크롤]로는 이동할 수 없습니다!
“아니, 이런 미친놈아!”
갑자기 뜬 ‘error창’에 육성으로 욕설이 튀어나왔다.
이미 찢은 스크롤은 재가 되어 손에서 부스러졌다.
‘그럼 대체 어떻게 가라는 건데!’
부글부글 끓는 속을 다스리며, 짜증스럽게 다시 가방을 뒤적일 무렵.
문득 손에 치이는 게 있었다.
“아.”
그것을 발견한 나는 작게 침음을 내뱉었다.
갈 수 있는 방법을 알 것 같았지만, 전혀 순탄치 않은 여정이었다.
‘빌어먹을 게임 같으니라고…….’
깊은 한숨을 내쉬며 새 스크롤을 주섬주섬 꺼낼 무렵.
문득 불길한 감각이 정수리를 스쳤다.
무심코 고개를 든 나는, 멀찍이서 이쪽을 유심히 살피고 있는 푸른 눈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그 순간, 데발 놈의 얼굴이 흉흉하게 일그러졌다.
‘서, 설마…… 아니야, 알아볼 리 없어.’
나는 허겁지겁 골목으로 몸을 숨기며 부정했다.
지금 내 모습은 마법 팔찌로 변장하고 있는 상태였다.
전에도 이 모습으로 데릭을 만났지만, 그는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게다가 스치듯 마주친 하인을 일일이 기억할 만큼 세심한 놈도 분명 아닐 텐데…….
‘망할, 안 되겠다. 일단 도망!’
나는 스크롤을 쥔 채 뷘터의 상단이 있는 골목 안쪽으로 움직였다.
‘삐라띠오……!’
그리고 막 스크롤을 찢으려던 순간.
“페넬로페 에카르트-!”
섬뜩한 목소리가 골목 안에 울려 퍼졌다. 머리끝이 쭈뼛 섰다.
‘하늘이시여…….’
질끈 눈을 감은 나는, 스크롤을 등 뒤에 숨긴 채 천천히 몸을 돌렸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사, 사람 잘못 보셨습…….”
“내가 새긴 마법인데, 천치도 아니고 널 못 알아볼까.”
나는 놈의 말에 시치미 떼는 것도 잊고 입을 떡 벌렸다.
“아, 알고…… 계셨어요?”
“한 번 속아 넘어가 줬으면 됐지, 대체 언제까지 내가 네 연극에 놀아나 줘야 해!”
내 바보 같은 물음에 놈이 버럭 외쳤다.
그 먼 거리를 단숨에 달려온 건지 놈의 얼굴이 땀에 잔뜩 젖어 있었다.
멍하니 그런 그를 응시하던 중. 그의 호감도 게이지 바가 좀 이상했다.
‘분명 성인식 때까지만 해도 샛노랬는데…….’
다시 보니 불그스름한 빛이 돌았다. 완전한 주황색도, 노랑색도 아닌 어중간한 색.
하지만 내 알 바는 아니었다.
나는 무표정하게 놈을 바라보며, 슬그머니 한 발짝 물러섰다.
스크롤을 찢을 충분한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그 순간.
“……가지 마라.”
분노에 찬 숨을 고르던 놈이 불현듯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짓씹듯 내뱉었다.
“아직 몸도 다 성치 않으면서 대체 어딜 가려고 그래.”
“…….”
“더는 화내지 않으마. 아무것도 추궁하지 않을 테니까, 그만 돌아가자.”
“…….”
“제발, 페넬로페…….”
흡사 애원하는 것처럼 구는 데릭 놈의 표정이 기묘했다.
뚝뚝, 그의 턱을 타고 흘러내리는 땀이 꼭 눈물 같았다.
나는 생소한 얼굴로 그것을 바라보다가 한 발짝 더 물러섰다. 놈이 다급하게 윽박질렀다.
“당장 이리 와, 페넬로페 에카……!”
“싫어.”
나는 커다란 고함에 반사적으로 눈살을 찌푸리며 짧게 읊조렸다.
“떠나는 마당에 내가 왜 네 명령을 따라야 해.”
“페넬로페 에카르트!”
“왜, 데릭 에카르트.”
빌어먹을 호감도도 없어졌는데, 내가 거칠 것이 뭐 있겠는가.
곧바로 받아치는 내 말투에 놈의 푸른 눈이 한차례 흔들렸다.
언제나 예의 바르게 굴던 내가 이렇게 나올 줄은 전혀 몰랐던 것처럼.
나는 반말에 그치지 않고, 있는 힘껏 입꼬리를 비틀며 차게 조소했다.
“한 번으론 부족해? 다시 끌고 가서 또 죽여 보고 싶어?”
“그게 무슨……! 죽이다니. 내가 널 왜-.”
“왜 인정하지 않아, 데릭. 그날 너 봤잖아. 한시도 내게서 눈을 뗀 적 없으면서.”
내가 몰라서 그냥 입 다물고 넘어간 줄 알았다면 큰 착각이었다.
그냥 귀찮고, 가치가 없어서였다.
뷘터처럼, 일말의 기대도 갖지 않아서.
“내가 이본과 잔을 바꾸는 거. 다 봤잖아요, 소공작님.”
데릭의 동공이 거칠게 흔들렸다.
입가에 맺힌 비린 미소가 점점 짙어졌다.
“고귀한 우리 소공작님께선 인정하기 싫을 테지. 네가 이본을 데리고 와서 내가 자살하려 했다는 걸.”
“아니야!”
그때 데릭이 버럭 소리쳤다. 놈은 허옇게 질린 입술을 달싹였다.
“그게 아니다. 난 그러려던 게…….”
“…….”
“네가, 네가…… 넌 왜, 내게만.”
“…….”
“왜 내게만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아.”
하염없이 말을 더듬던 놈이, 결국 무너지듯 모든 것들을 토해 냈다.
“화가 났어도 선물을 주면 다시 어여쁘게 웃어 주었잖아. 그렇게 앙숙처럼 싸워 대던 레널드 놈에게마저 오라버니라 불러 주었지 않아. 그런데 왜-!”
“…….”
“왜 자꾸 멀어지기만 하는 거냐.”
그가 길을 잃은 어린아이처럼 중얼거렸다.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얼굴이었다.
꽉 쥔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아. 나는 이제야 그의 마음을 눈치챌 수 있었다.
“왜겠어?”
그리고 어떻게 하면 그런 놈을 나락으로 떨어뜨릴 수 있는지도.
“네가 싫으니까 그렇지, 데릭 에카르트.”
나는 개화한 꽃처럼 활짝 웃었다.
그 언젠가, 그에게서 스카프를 받고 미소를 지어 줬을 때처럼.
‘그때부터였구나.’
뜬금없이 선물을 건네던 그의 알 수 없는 행동들이, 조금씩 이해가 갔다.
이미 한참 전에 엑스 쳐진 줄도 모르고, 선물을 줘도 변함없는 내 태도를 보며 얼마나 애가 탔을까.
흔들리던 푸른 눈이 우뚝 멈췄다. 맥없이 열리는 동공을 보며 나는 쐐기를 박았다.
“나는 이제 널 보느니 죽는 게 나을 만큼 싫어. 그러니까…….”
“…….”
“평생 네 동생이나 끌어안고 살다가 뒈져 버려, 개새끼.”
찌이익-!
놈의 면전에서 스크롤이 시원하게 찢어졌다.
〈SYSTEM〉 [이동 마법 스크롤]을 1개 사용하여 [트라탄]으로 이동합니다.
“페넬……!”
뒤늦게 정신을 차린 그가 헐레벌떡 내게로 손을 뻗으며 달려왔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나는 점멸하는 흰 빛과 함께 편안히 눈을 감았다.
* * *
끼룩끼룩-.
시끄러운 갈매기 소리에 눈을 떴을 때.
나는 일전에 한 번 와 보았던 바닷가에 서 있었다.
화창한 수도와는 달리, 트라탄의 하늘은 불길한 구름이 잔뜩 끼어 있었다.
궂은 날씨 때문인지, 항구에 잔뜩 정박해 있는 배들이 보였다.
불길한 하늘과는 달리 내겐 희소식이었다.
나는 망설임 없이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에이! 오늘은 공쳤구만.”
“고기도 안 잡혀 죽겠는데, 날씨마저 왜 이러는지…….”
항구에 다다르자, 우락부락한 사내 몇 명이 모인 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허름한 차림새 때문에 긴가민가 싶어서 살피고 있을 때쯤.
“고기 잡는 배 처음 보나? 뭘 얼쩡거려?”
커다란 해적 모자를 쓰고 있는 흉악한 인상의 사내 하나가 내게 툭 쏘아붙였다.
다행히 각 배의 선장들이 맞았다.
“오늘은 배 못 띄워서 일손도 필요 없으니까 그냥 가죠.”
처음 내게 시비를 걸었던 남자가 희한한 생물을 보는 눈으로 나를 보며 읊조렸다.
“요즘 거기 갔다간 해류에 휩쓸리기도 전에 마물들에게 뼈도 못 추리고 잡아먹히는데 뭔…….”
“돈은 충분히 드릴 수 있으니, 그 근처까지만 데려다주실 수 없습니까? 높으신 분의 명입니다.”
“아, 못 간다니까 그러네! 안 그래도 조업 못 나가서 짜증 나는데, 웬 샌님 같은 놈이 재수 없게……!”
그 근처에서 죽은 사람들이 많은지, 남자들이 하나같이 흉흉한 얼굴로 나를 쫓아내려 들었다.
별수 없었다. 나는 한숨을 쉬며, 걸어오면서 소분해 놓은 금화 주머니를 꺼내 던졌다.
“그럼…….”
쩔그럭-! 묵직한 소리와 함께 나를 떠밀던 팔들이 우뚝 멈췄다.
“배 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