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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엔딩은 죽음뿐-194화 (194/243)

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194화

선장들의 치열한 경쟁 끝에, 나는 배는 물론이고 선원들까지 모두 사고 말았다.

나는 누군가 건네준 망원경으로 먼 해안선 너머를 보았다.

자욱이 내려앉은 안개 사이로 아르키나 제도가 보일 듯 말 듯 어른거렸다.

‘혼자 가도 별일 없겠지…….’

마물이 좀 걱정됐지만, 그것들의 우두머리가 수도에 있으니 내게 큰 피해는 없으리라.

난 그렇게 합리화하며 망원경을 내렸다.

“저, 저기…….”

그때, 이제는 선원이 된 배의 전 주인이 서열 정리를 끝냈는지 다가와 말했다.

“출발은 새벽 3시쯤에 해야 합니다. 그때가 가장 마물의 활동이 적기도 하고, 파도가 가장 잔잔할 때입니다.”

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남자가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한데 어떤 분이시길래…… 무슨 일로 그 위험한 곳을 가시겠다는 겁니까?”

흘끔 곁눈질로 본 그의 눈이 탐욕스럽게 번들거렸다.

돈맛을 본 가난한 인간들은 위험했다.

남은 시간 동안 발품 팔아 호위를 고용할까 고민하다 관뒀다.

제대로 된 호위를 구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고, 어차피 가방은 내 의지가 아니면 열 수 없는 마법이 걸려 있었다.

“몇 달 전 솔레일이란 섬이 수장된 사건이 있지 않았습니까?”

내 물음에 남자가 눈을 휘둥그레 뜨더니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아, 예, 예! 멀쩡하던 섬이 하루아침에 사라져서 다들 까무러쳤습지요!”

“그 섬은 본래 레일라 잔당들이 아르키나에서 트라탄으로 넘어오기 전에 중간 다리로 쓰던 곳인데, 제 주인께서 소탕한 겁니다.”

나는 엄중한 얼굴로 잔뜩 겁줬다.

“헉, 소, 소, 소탕?!”

남자는 물론이고 주변에서 엿듣고 있던 선원들도 흠칫 몸을 떨며 나를 돌아보는 게 느껴졌다.

내 입으로 이런 말 하기가 참으로 민망했지만, 적당히 기를 눌러 주기 위해서는 별수 없었다.

“그, 그럼 아르키나 제도를 가는 것도…….”

나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명심하십시오. 주인님은 거슬리는 인간들을 무척이나 싫어하십니다.”

“예, 예! 아무렴 최선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공포 서린 얼굴을 보니, 다행히 기 죽이기가 잘 먹혀 든 것 같았다.

남은 시간 동안 나는 적당히 얼굴을 가릴 가면 하나와 로브를 샀다.

그리고 오래된 여관의 최상층을 사용하는 데 돈을 아끼지 않았다.

레널드의 충고처럼 호텔을 이용하고 싶었지만, 가난과 약탈에 찌든 마을에선 터무니없는 소리였다.

밤은 금방 찾아왔다.

나는 가면과 로브를 쓴 채 시간 맞춰 항구로 나갔다.

뿌우우우-.

출발을 알리는 뱃고동 소리와 함께 드디어 아르키나 제도로 향하는 배가 출발했다.

밤바다는 고요했다.

출렁출렁 흔들리는 배에 따라 속이 좀 울렁거렸지만 견딜 만했다.

‘확실히 돈이 좋긴 좋네.’

선장이 쓰는 방에 홀로 앉은 채 가방에서 마법 지도를 꺼내어 펼쳤다.

이동 마법 스크롤로는 갈 수 없으니, 발타로 가는 남은 방법은 이것뿐이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이 마법 지도는 그려진 지역 내에서만 사용할 수 있었다.

나는 동굴에서 황태자와 마법 지도를 사용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지도 안에 빨간 점이 생겨야 해.’

그게 내 위치였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배를 통째로 사들이며 사정거리까지 가는 중인 것이다.

“쯧, 그냥 바로 순간 이동시켜 줄 것이지…….”

아직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은 지도를 보던 나는, 이내 그것을 덮으며 신경질적으로 중얼거렸다.

하드 모드도 끝났건만, 이 미친놈의 게임은 조금도 쉽게 진행되는 법이 없었다.

그때였다.

쿠구구구궁-.

불현듯 굉음과 엄청난 진동이 배를 뒤흔들었다.

“아악!”

나는 비명과 함께 바닥으로 내동댕이 쳐지듯 넘어졌다.

“뭐, 뭐야?”

어리둥절한 얼굴로 엎어진 몸을 추스를 적.

“으아아악-!”

방 밖에서 커다란 비명이 울려 퍼졌다.

“마, 마물이다! 마물이 나타났다!”

“비상! 비상! 배 돌려, 어서!”

들려오는 급박한 소리들에 나는 벌떡 일어나 짐들을 챙겨 밖으로 나갔다.

촤아아악-!

그러나 막 문을 열자마자 눈앞에 거대한 문어 다리가 떨어지고 있었다.

“흐아악!”

나는 비명을 지르며 화들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

철퍽, 쩌억-!

발치에 꿈틀거리는 다리가 쩍, 달라붙었다.

딱딱하게 굳은 나는, 얼마 후 가까스로 그것을 껑충 뛰어넘어 갑판으로 나왔다. 그곳은 이미 난장판이었다.

영화로만 보던 거대 문어가 다리로 배를 통째로 감싸고 있었다.

새로운 다리가 수면에서 솟아오르며, 폭우처럼 바닷물을 흩뿌렸다.

“크라켄, 크라켄이, 으아아악-!”

선원 한 명이 비명과 함께 촉수 같은 다리에 휘감겨 순식간에 끌려갔다.

그와 동시에.

〈SYSTEM〉 돌발 퀘스트 발생!

배고픈 거대 마물이 나타났다!

마법 주문을 외워 [크라켄]을 처치하겠습니까?

(보상 : 목숨)

[수락 / 거절]

“이 미친 게임아…….”

나는 눈앞에 떠오른 네모 창을 보고 헛웃음을 지었다.

‘보상이 망할, 보상이 목숨?!’

기가 막혀서 멍하니 흰 글씨들을 바라보고 있을 무렵이었다.

“선장님! 도, 도와주십시오! 마물을 처치해 주십시오, 제, 제발!”

배의 전 주인이 술통을 들고 휘날리는 다리를 필사적으로 막으며 내게 소리쳤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를 겁주기 위해 했던 말이, 이제는 사실이 되어 버렸다.

그 순간, 머리맡이 어두워졌다.

촤아아악-!

거대한 문어 다리 하나가 물을 흩뿌리며 내 위로 다가오고 있었다.

수많은 빨판들이 다닥다닥 붙은 채 기이하게 꿈틀거리는 그것은, 하나의 살아 있는 생명체 같았다.

목뒤가 뻣뻣해지고 온몸에 소름이 꽉 끼쳤다.

〈SYSTEM〉 마법을 써서 8개의 다리를 모두 자르십시오

(마법 주문 : 파이어 피숀, 윈드 프라숀)

~START!~
‘(0/8)’

‘나는, 연체동물이, 싫어요!’

나는 결국 진저리를 치며 소리쳤다.

“파이어 피숀!”

화르르륵-!

다가오던 문어 다리 하나가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였다.

쿠워어어억!

괴로운지 괴물의 울음소리와 함께 불에 타들어 가는 문어 다리가 이내 툭 끊어져 바닥으로 떨어졌다.

시커멓게 탄 그것이 미친 듯이 꿈틀거렸다.

“으흐으!”

나는 기괴한 신음 소리와 함께 황급히 그 징그러운 장면에서 떨어졌다.

그리고 황급히 허공을 바라보았다.

‘(0/8)’

그런데 분명 공격을 가했는데도 숫자가 카운팅되지 않았다.

‘뭐야, 마법 썼는데 왜지?’

그러나 가만히 의문에 잠겨 있을 새가 없었다.

“으아악, 서, 선장님! 살려 주십쇼!”

또 다른 촉수가 전 주인을 휘감은 채 끌고 가고 있었다.

나는 서둘러 외쳤다.

“윈드 프라숀”

휘이이잉-!

처음 쓰는 마법은 회오리치는 거센 돌풍으로 단숨에 문어의 다리를 싹둑 잘라 냈다.

다행히 남자는 갑판 위로 잘 안착했다.

‘오, 좀 괜찮은 공격인걸?’

쿠워어어억!

공격을 당한 괴물이 괴성을 지르며 꿈틀거렸다. 덕분에 배가 마구 흔들렸다.

돛대를 잡으며 힘겹게 허공을 바라봤을 때였다.

‘(0/8)’

이상하게도 여전히 숫자가 올라가지 않았다.

지난번 도마뱀 마물처럼 쉽게 해결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나는 심각한 얼굴로 연달아 공격을 퍼부었다.

“파이어 피숀! 윈드 프라숀! 파이어 피숀! 윈드 프라숀!”

순식간에 괴물의 다리 4개가 불에 휩싸이고, 잘려 나갔다. 총 6개의 다리가 사라진 셈이다.

“선장님, 나이스 샷!”

살아남은 선원들이 구석에 뭉친 채 환호성을 지르며 나를 응원했다.

다리가 썰린 괴물도 주춤했는지 흔들림이 점차 잦아들었다.

그러나 환호성도 아주 잠시였다.

‘(0/14)’

허공에 떠 있는 숫자가 바뀌었다.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채.

“……왜?”

그 순간.

쯔즉, 쯔즈즈즉, 뿌즈즉-.

질척한 소리와 함께 잘린 문어 다리에서 꾸물거리는 무언가가 솟아났다.

우리는 모두 멍하니 그 장면을 바라보았다.

괴물의 다리는 두 가닥으로 나뉜 채, 무럭무럭 자라나 순식간에 원상태로 복귀됐다.

“다, 다리가…… 자, 잘린 다리가 두 개로…….”

무려 2배로 늘어난 채.

“미친…….”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나는 그야말로 ‘멘붕’에 빠졌다.

‘마법 공격이 통하지 않아.’

그렇다고 방금 전처럼 마구 주문을 욀 수도 없었다.

자르는 즉시 또 몇 개로 늘어날지 모르니까.

8개에서 14개가 된 다리들이 꿈틀꿈틀 허공에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얼마 안 가 우뚝 움직임을 멈춘 그것들이, 일제히 나와 선원들을 향해 내리 꽂히기 시작했다.

휘이이이익-.

“파, 파이어……!”

다른 도리가 없었다.

코앞까지 다가온 촉수들의 모습에 눈을 질끈 감으며, 별수 없이 다시 주문을 외치려던 찰나.

촤아아악-!

“공녀!”

귀에 익은 목소리가 나를 거세게 일깨웠다.

번뜩 눈을 떴을 때.

어두컴컴한 시야 속으로, 거짓말처럼 황금빛이 쏟아져 내렸다.

철퍽-! 그가 검으로 베어 낸 듯한 다리들이 바닥에 떨어져 펄떡였다.

“뭘 멍청히 보고만 있어? 절단면 불로 지져, 빨리!”

숨을 멈춘 내게, 황태자가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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