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195화
갑작스러운 칼리스토의 등장에 멍하니 있는 것도 잠시.
그의 외침에 번뜩 정신이 돌아왔다.
“파, 파이어 피숀!”
나는 창피함도 잊고 재빠르게 잘린 다리에 공격을 퍼부었다.
화르르륵. 새로운 다리들이 채 자라나기도 전에 잘린 부분이 불길에 휩싸였다.
‘됐어!’
허공에 떠 있는 숫자가 올라갔다.
“크웨에에에엑-!”
확실히 효과가 있는 건지 문어 괴물이 전보다 더욱 날뛰었다.
빠각, 빠드득- 물컹한 촉수에 휩싸인 배가 부서지면서 모로 기울었다.
물건들이 마구 쓰러지고 굴러 바다로 떨어졌다.
“으아아악!”
굴러온 나무통에 맞은 선원 한 명이 눈 깜짝할 새 바다로 떨어졌다.
“어, 어……!”
나 또한 속절없이 휘청거리며 넘어질 즈음.
“공녀!”
황태자가 덥석 나를 끌어안았다.
한 팔로 나를 제 옆구리에 끼운 채, 그는 쏟아지는 물건들을 피해 재빠르게 조종실 위로 올라갔다.
지붕 위에서 뛰어내려 뒤편에 도착한 황태자가 배를 통째로 감싼 채 부수고 있는 굵직한 문어 다리를 망설임 없이 베어 냈다.
놈이 그러는 사이 짐짝처럼 몸이 덜렁거렸다. 눈앞이 핑핑 돌았다.
“으으, 내, 내려 주세요!”
“그런 말 할 시간에 주문이나 외쳐!”
“파이어 피숀!”
반사적으로 주문을 외자 불길이 피어났다.
“쿠르륵, 쿠워어억!”
고통에 찬 괴수의 울음과 함께, 기울었던 배가 수평으로 돌아왔다.
“잘했어.”
황태자는 그제야 나를 바닥에 내려 주었다.
나는 어지러운 머리를 붙들며 불이 붙은 절단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자른 후 불로 지진 자리엔 새 다리가 자라나지 않았다.
‘아, 순서.’
어떻게 해치워야 할지 감을 잡은 나는, 곧장 마법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윈드 프라숀! 파이어 피숀! 윈드 프라숀! 파이어 피숀!”
순식간에 숫자가 올라갔다.
금방 정신을 차리고 도움 없이 알아서 잘 싸우는 나를 칼리스토가 황당하다는 듯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크웨에엑-!”
그러나 신경 쓸 새 없이, 또 다른 다리가 우리를 덮쳤다.
“쯧.”
황태자가 못마땅하다는 듯 혀를 차며 그것을 칼로 베어 냈다.
“파이어 피숀!”
우리를 보고 감을 잡았는지, 살아남은 몇몇 선원들이 횃불을 가지고 뛰어와 잘려 나간 다리들도 불태웠다.
“윈드 프라숀! 파이어 피숀!”
그렇게 목이 터져라 주문을 왼 지 몇 분 후.
“쿠우우우우-.”
마침내 모든 다리가 동강 난 마물이 힘없이 배에서 떨어져 나갔다.
〈SYSTEM〉 돌발 퀘스트 [배고픈 크라켄 처치] 완료!
마침내 끝을 알리는 퀘스트 창이 떠올랐다.
“하…….”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비틀거렸다.
문어 괴물이 날뛰는 바람에 온몸이 바닷물에 흠뻑 젖어 축축했다.
머리 위로 뒤집어쓴 로브와 가면 속에도 물이 차서 비린내가 진동했다. 나는 오만상을 찌푸렸다.
본래 몸보다 체구가 더 작고 왜소한 남장이 불편해서, 마법 팔찌를 풀고 로브와 가면을 뒤집어 썼던 것이다.
그런데 마물을 상대하면서 안 쓰느니만 못한 상태가 되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그냥 로브를 벗어던지고 신선한 공기를 마실까 고민하던 그때.
“페넬로페 에카르트.”
불현듯 서늘한 음성이 들렸다.
‘맞다.’
나는 그제야 안도에 취해 잊고 있던 사실을 깨달았다.
미친 황태자 놈이 여기까지 나를 쫓아왔다는 사실을.
천천히 고개를 들자, 바닷물에 흠뻑 젖은 황태자가 시뻘건 두 눈을 형형히 빛내며 내게로 걸어왔다.
분명 놈에게 잘못한 것이 없는데, 그의 표정을 보자 꼭 대역죄인이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저놈이 여긴 어떻게 나타난 거지? 바다 한가운데잖아.’
나는 뜬금없는 그의 등장에 너무 당황해서 더듬더듬 내뱉었다.
“부, 분명 반란 때문에 북방에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대체 여긴 어떻게…….”
“지금 그깟 반란이 문제야?”
순식간에 내 앞에 다가온 황태자가 무시무시한 기세로 내 양어깨를 와락 붙들었다.
“위험하게 여기가 어디라고 혼자 와! 누구 눈 돌아가는 꼴 보고 싶어?!”
“……저, 전하.”
“그대가 공작저에서 사라졌다는 소식을 듣고 황궁 마법사를 족쳐서 미친놈처럼 수도로 달려갔다.”
“…….”
“그래도 그 악령 씐 놈이랑 함께 있는 줄 알았는데, 후작가에서 그놈 면상을 보는 순간, 내가……! 내가…….”
금방이라도 날 잡아 죽일 듯이 흉흉하기 그지없던 그의 얼굴이, 일순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사람이 왜 이렇게 못돼 먹었어.”
칼리스토는 더는 말을 잇지 못하고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턱. 그가 이마를 맞댔다.
그러나 쓰고 있는 가면 때문에 온기가 전해지지는 않았다.
“성인식 날 한 번 속 썩였으면 됐지, 왜 이렇게 사람을 미치게 만들어.”
황태자가 피로에 잔뜩 지친 음성으로 속삭였다.
언제나 호전적이고, 조소가 가득하던 그에게서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나는 네가 왜 이러는지 알 수 없어. 나를 사랑하지 않는 네가 왜.
그렇지만, 그렇지만 그의 지친 목소리에 가슴이, 심장이…… 너무 아려서 숨을 쉴 수 없었다.
한참을 머리를 맞댄 채 거친 호흡을 고르던 칼리스토가 이윽고 혀를 차며 고개를 들었다.
“쯧. 이 우스꽝스러운 가면은 또 뭐야.”
피부를 가로막는 장벽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그가 짜증스러운 손길로 휙 가면을 위로 들어 올렸다.
바닷물에 푹 젖은 로브의 후드 또한 그의 손에 거칠게 벗겨졌다.
선선한 공기가 안면 위로 훅 들이닥쳤다.
나는 그제야 갑자기 나타난 그가, 가면을 쓰고 있던 나를 단번에 알아봤다는 것을 알고 좀 놀랐다.
“……저인 줄은 어떻게 아셨어요.”
“내가 그댈 어떻게 못 알아봐.”
무의미한 질문에 칼리스토는 허탈하게 웃었다.
“너와 관련된 일이면 회의장이고, 전장이고, 다 때려치우고 매번 이렇게 눈 뒤집혀서 달려오는데.”
그가 어깨를 잡고 있던 두 손을 들어 올려 얼굴에 묻은 물기를 닦아 주었다.
그제야 따뜻한 온기가 전해졌다.
가슴이 미친 듯이 요동쳤다. 갑자기 눈시울이 시큰해져서, 나는 이를 악물었다.
“어디…… 다친 곳은 없나?”
묵묵히 물기를 제 손으로 닦아 준 황태자가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없어요. 전하께선…….”
어디 다친 데 없냐고 되물으려던 찰나.
문득 비릿한 혈향이 코끝을 스쳤다.
그를 따라 시선을 돌리자, 그의 오른손에 잔뜩 젖은 붕대가 둘둘 말려 있는 것이 보였다.
그 틈으로 붉은 물이 새어 나오는 것 또한.
“다, 다치셨잖아요!”
나는 덥석 그의 손목을 잡으며 소리쳤다.
“저 문어 대가리랑 싸우다 생긴 거 아니야.”
“귀에 꽂은 그 커프스는 장식으로 쓰라고 줬답니까?”
“아까워서 못 쓰겠어.”
“대체…….”
기가 막혀서 말을 잃자, 그가 히죽 웃으며 또 허세를 부렸다.
“걱정할 것 없어, 공녀. 이런 것쯤은 침 바르면 금방 나으니까.”
“전하께선 무슨 고통을 즐기시는 분이세요? 다치지 마시라고 비싼 돈 주고 산 건데 왜……!”
자꾸만 헛소리를 지껄이는 놈에게 몸서리를 치며 화를 내던 그 순간이었다.
와락- 잡힌 얼굴이 거세게 끌려갔다.
‘윽!’
나지막한 신음과 함께 정신을 차리니, 축축하고 단단한 타인의 품에 꽉 끌어 안겨진 상태였다.
“모처럼 예쁜 말을 하니까 기분은 좋은데.”
황태자가 내 머리 위에 제 턱을 올리며 말했다.
당황해서 잠시 버벅이던 나는, 이내 무슨 상황인지 깨닫고 벗어나기 위해 버둥거렸다.
“무, 무슨……! 이거 놔요!”
“이제 내 심정을 좀 알겠어, 공녀?”
“제가 전하 심정을 어떻게 압니까? 몰라요! 그러니까 놓으……!”
“다신 그러지 마.”
내 머리칼에 깊이 얼굴을 묻은 채 속삭이는 그의 말에, 나는 멈칫 버둥거림을 멈췄다.
“이제 알았어. 그대가 원하는 거 말이야.”
“…….”
“그게 뭐든, 공작저를 때려 부수든, 이 빌어먹을 지위를 버려서든, 다 이뤄 줄게.”
“…….”
“그러니까…… 다신 내 앞에서 그러지 마, 페넬로페 에카르트.”
그 순간, 문득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던 에밀리의 말이 떠올랐다.
- 아가씨께서 쓰러진 후 한시도 곁에서 떨어지지 않으셨어요.
- 밤마다 전하께서 아가씨의 손을 붙들고 얼마나 간절하게 비셨는지요.
이 말을 하드 모드가 끝나기 전에 들었다면, 무언가 달라졌을까.
부질없는 가정이었다.
‘……이미 늦었어.’
그리 생각하며 칼리스토를 밀어내려 했다.
하지만 나는 차마 그것을 실행에 옮길 수 없었다.
숨도 못 쉴 만큼 나를 꽉 끌어안은 팔이, 손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그가 지금 얼마나 안도하고 있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아서.
나는 그를 밀어내지도, 마주 안지도 못한 채 그저 우두커니 서 있었다.
“크, 크흠!”
그때였다.
“저, 저, 선장님, 그…….”
근처에서 누군가 나를 불렀다.
‘응?’
우리에게 꽂힌 수 쌍의 시선이 맹렬히 느껴졌다.
“으아악!”
나는 비명을 지르며 황태자의 가슴을 주먹으로 밀쳐 냈다.
“윽!”
황태자가 나지막한 신음과 함께 비틀거리며 물러섰다.
동그란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살아남은 선원들이 보였다.
나는 벌게진 얼굴로 씩씩거리다가, 황급히 황태자가 들어 올린 가면을 내려썼다.
“뭐야.”
사납게 묻자, 나를 부른 배의 전 주인이 퍼뜩 놀라 답했다.
“아, 아르키나 제도 근처까지 도착했습니다!”
“그래?”
앞을 가리키는 그의 손길을 따라 시선을 돌렸다.
문어 마물 때문에 저절로 이동이 됐는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 정말로 커다란 섬 하나가 보였다.
“다 온 건가? 어디 한번 가 볼까, 공녀?”
돛대에 삐딱하게 기댄 채 무언가를 들여다보고 있던 황태자가 내게 흘깃 물었다.
“제가 어디로 갈 줄 알고요?”
나는 새침하게 쏘아붙인 채 가방 안에서 고대 발타 지도를 꺼냈다.
막 그것을 펼쳐 든 찰나였다.
“아르키나 제도로 가는 거 아니었나?”
황태자가 능글맞게 웃으며 내게로 다가왔다.
흘끔 놈이 들고 있는 종이를 훔쳐 본 나는 멈칫하고 다시 그것을 돌아보았다.
‘어……?’
낯이 익었다.
“이거…….”
똑같은 지도 두 개, 그리고 똑같은 지점에 떠오른 빨간 점.
‘그러고 보니…… 지난번 솔레일에서도 날 쫓아왔잖아.’
알 듯 말 듯한 기시감이 들었다.
나는 눈을 가느스름하게 뜬 채 추궁했다.
“뭐예요?”
“뭐가?”
“왜 제 위치가 전하의 지도에도 뜨는데요?”
“이건 그대 위치가 아니라 내 위치…….”
혹시 몰라 떠본 질문이었다.
그러나 이미 의심을 확신으로 굳힌 내 눈빛을 알아본 건지, 황태자가 뜨끔한 얼굴로 순순히 털어놨다.
“……복제본이야.”
“‘무엇의’요?”
“그대를 주인으로 인식한 그 지도의 복제본.”
“허, 그럼 저번에도…….”
놈이 어떻게 매번 귀신같이 날 쫓아왔는지, 벼락같은 깨달음이 찾아왔다.
어이가 없어 연신 헛바람을 터뜨리는 내게, 황태자가 황급히 변명했다.
“오해하지 마, 공녀.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그대의 소유임을 새기다가 발생한 오류…….”
“……변태 스토커.”
‘흥!’ 하고 고개를 팩 돌리자 황태자가 또 개소리를 했다.
“어허, 연인 사이에 스토커라니.”
“연인? 누가요?!”
“누구긴? 그대와 나, 우리 둘이지.”
“제가 볼 때 전하께서는 심각한 망상병을 앓고 계신 듯합니다. 당장 황궁의에게 가실 필요가 있…….”
쪽-.
그때 문득 물컹한 것이 쏜살같이 입술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못된 말만 하는 입 같으니라고.”
황태자가 코앞에서 심술궂은 얼굴로 지껄였다.
방금 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파악하지 못하던 나는, 이내 입을 가리며 놈에게서 파다닥 물러섰다.
“미, 미친, 이봐요! 이게 무슨……!”
“‘이봐요’라니. 아주 갈수록 황족 능멸이 늘고 있어, 공녀.”
내 막말에도 황태자는 유쾌하게 빙글거렸다.
손에 가려진 입술이 데일 듯 뜨거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