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196화
얼마 후 정신을 차린 나는 후다닥 황태자 놈에게서 멀어졌다.
얼굴이 확 붉어졌다.
그를 들키지 않으려고 여전히 손으로 입술을 가린 채 씨근덕거리며 그를 노려보았다.
‘사랑하는 거 아니라면서. 그냥 파트너 하자면서, 왜 이래?’
울컥, 그런 마음이 솟아올랐다.
그러나 나를 보는 그의 눈빛에 서린 안도가 너무 따뜻해서, 웃는 얼굴이 너무 환해서.
가슴이 자꾸 울렁거렸다.
나는 결국 바보처럼 따지고 들지도 못하고 신경질적으로 잔뜩 젖은 로브와 가면을 벗었다.
무겁고 축축해서, 오히려 가는 길에 방해가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어서 들고 있던 가방을 뒤적였다. 그 난리 통에도 마법이 걸려 있는 가방 안쪽은 젖지 않고 멀쩡했다.
나는 금화 주머니 하나를 꺼내 묘한 눈으로 우릴 훔쳐보고 있던 진짜 선장에게 건넸다.
“수고했어. 이건 돌아가서 배를 고치고, 다친 이들을 치료하는 데 쓰게.”
남자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손사래를 쳤다.
“아, 아닙니다! 당치도 않습니다! 서, 선장님 때문에 산 목숨들인데 어찌……!”
“죽은 이들도 있는데, 생명 수당이라고 생각해.”
“……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남자는 끝내 거절하지 못하고 받아들였다.
다시 멀리 보이는 아르키나 제도 쪽으로 몸을 돌린 나는 그 앞에 마법 지도를 활짝 펼쳐 들었다.
‘어디로 가야 하지?’
막상 지도 안, 섬 근처 부근에 빨간 점이 뜨긴 떴는데, 지리를 모르니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지난번 기억을 되살려 이곳저곳 지도 위를 건드려 보았다.
태블릿PC라도 되는 양 곧장 손가락이 닿은 지역이 확대되었다.
그러나 섬 안을 확인하면 할수록 점점 당황스러워졌다.
‘뭐야.’
마치 거대한 비밀이 숨겨져 있을 것만 같았던 섬은 아무리 둘러봐도 모래뿐이었다.
‘레일라 신국 놈들이 사방에 포진해 있을 줄 알았는데…….’
아무리 봐도 황량한 사막이었다.
그때였다.
“레일라 놈들의 신전은 아마 제도의 정중앙쯤에 있을 거야.”
옆에서 내가 하는 꼴을 지켜보던 황태자가 불쑥 손가락으로 섬의 가운데를 톡 짚었다.
그 부분이 곧장 확대되었다. 그러나 모래 언덕뿐인 건 같았다.
“어떻게 아세요?”
“군사 작전을 계획할 때 몇 번이고 마법사들 통해서 정찰했으니까.”
그가 덧붙였다.
“쳐져 있는 결계가 너무 강해서 형체만 확인했을 뿐 확실한 건 아니다. 그래도 최대한 개고생 덜 하려면 중앙 지역을 찍는 게 좋을 거야.”
“…….”
“저긴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황무지니까. 헤매기 시작하면 끝도 없어.”
그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아무리 이동할 수 있는 마법 지도가 있더라도, 널따란 사막 속에서 바늘 찾기 하듯 무작정 헤맬 수는 없었다.
의외의 도움을 준 칼리스토를 흘끔 곁눈질할 때였다.
문득 눈앞이 환해졌다.
〈SYSTEM〉 [고대 마법 지도]의 사용을 원한다면 지도 안의 이동할 장소를 짚으며 시동어를 외치십시오.
(시동어 : 얄라 불라 아르띠노)
‘발음이 진짜 왜 이래.’
내가 변함없이 괴상한 시동어를 바라보며 오만상을 찌푸리고 있을 때였다.
“이번에도 시동어를 알고 있는 건가? 그럼 가 보자고.”
황태자가 여전히 지도 안을 짚은 채 여상하게 말했다.
물론 새삼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같이 가시게요?”
“그럼. 누구 때문에 전쟁도 다 팽개치고 여기까지 왔는데. 기껏 문어 다리나 자르고 돌아갈까?”
그가 눈을 부라리며 되물었다.
“그렇다면 더 돌아가셔야 하잖아요. 다른 것도 아니고 반란군 진압이 달린 일인데…….”
“나 하나 없다고 그깟 반란군 하나 막지 못하는 나라라면 그냥 멸망되는 게 옳겠지.”
“전하.”
“내겐 이게 더 중요해. 그리고 내가 아르키나 제도로 가는 것에 그대의 허락이 필요하나?”
칼리스토는 예의 그 사나운 표정으로 오만하게 말했다.
사실 맞는 말이긴 했다.
목적이 뭐든, 황태자인 그가 간다는데 내가 뭐라고 말린단 말인가.
“같이 가는 거 싫어?”
스스로 납득이 돼서 그냥 입을 다문 건데, 방금 전 쏘아붙인 게 무색하게 칼리스토가 다급히 덧붙였다.
“그럼 그댄 혼자 가도록 해. 나도 복제 지도 있으니까, 알아서 가지.”
다시 올려다본 그의 얼굴이 잔뜩 초조함으로 물들어 있었다.
버림받기 싫은 어린아이처럼.
“전하는 시동어 모르시잖아요.”
“……제기랄.”
묵묵히 오류를 지적하자 그가 거칠게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나직하게 욕설을 뇌까렸다.
그러더니.
“나도 데려가.”
부탁하는 처지에 전혀 부탁조가 아닌 당당한 말투였다.
그러나 한쪽 귀에 박혀 있는 루비처럼 벌겋게 달아오른 그의 귀 끝이 보였다.
“웃어?”
놈이 다시 눈을 부라렸다.
나는 짐짓, 조금도 웃지 않은 척 정색하고 괴상망측한 시동어를 내뱉었다.
“얄라 불라 아르띠노.”
〈SYSTEM〉 [고대 마법 지도 스크롤]을 1회 사용하여 해당 지역으로 이동하겠습니까?
[예. / 아니오.]
망설임 없이 [예.]를 누르자, 눈앞이 하얘졌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우리는 태양 빛이 작열하는 사막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찜통에 갇힌 것처럼, 엄청나게 뜨거운 바람이 훅 안면을 덮쳤다.
반사적으로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들었을 무렵.
“저긴…….”
먼 모래 등선 너머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사이로, 희미하게 건물 모습이 보였다.
황태자의 말이 사실이었다. 개고생을 덜었다는 생각에, 안도하고 있던 찰나였다.
풀썩-. 머리 위로 무언가가 떨어졌다.
“어, 어…….”
“해가 뜨거워.”
당황해서 허우적거리는 사이, 황태자가 묵묵히 그것을 내 머리와 얼굴에 둘러 꽁꽁 둘러싸매 주었다.
그의 새빨간 망토였다.
무섭게 내리쬐는 태양 아래 그의 잘생긴 얼굴만이 고스란히 노출되었다.
“……전하는요?”
나는 머뭇거리며 물었다.
그러자 황태자가 픽, 조소를 터뜨리며 답했다.
“항상 생각하는데, 공녀는 고양이보다 쥐를 더 생각할 필요가 있어.”
“그렇지만…….”
“전쟁 중에 이런 사막 한번 안 겪어 봤을 것 같나?”
사막 한가운데 세워진 건물까지 그렇게 멀리 떨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마음이 무거웠다.
아니, 나를 우선시하는 그의 행동에 기분이 이상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로브는 가지고 올걸.’
짧은 판단에 우울해하고 있을 때쯤, 황태자가 나를 이끌었다.
“그만 가지. 사막은 낮이 짧아.”
나는 그와 함께 짧은 여행을 시작했다.
신전을 바로 앞에 둔 채 마지막 사구의 정상에 막 올랐을 때였다.
얼마 걷지 않았음에도, 비루먹은 몸뚱이가 한계를 호소했다.
“헉, 헉…… 잠깐만요.”
나는 무릎을 짚은 채 얕게 헐떡였다.
목적지를 코앞에 두고 이러는 게 우스웠지만, 숨이 턱까지 차오른 상태에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칼리스토는 아무런 재촉 없이 그런 나를 묵묵히 기다렸다.
얼마 후 거친 숨이 차차 안정될 무렵, 나는 배에서부터 계속해서 혀를 간질이던 말을 내뱉었다.
“왜 아무것도 묻지 않으세요?”
“뭘?”
“그냥…… 이것저것이요.”
황태자의 성정이라면 당연히 날 닦달할 줄 알았다.
독은 왜 처먹은 건지, 여긴 왜 온 건지, 후작과는 또 어떤 사이인 건지…….
아무것도 묻지 않는 새빨간 눈을 더 마주하지 못하고, 나는 거친 모래벌판으로 눈을 내리깔았다.
“수도에 가셨으면 들으셨을 거 아니에요, 제 얘기.”
“아. 공작의 양딸이 친딸을 뚜드려패고 가출한 얘기 말인가?”
“뭐, 뭐라고요?”
“소공작이 눈을 시뻘겋게 뜨고 그댈 찾더군.”
그 말에 자연히 눈살이 찌푸려졌다.
‘징그러운 놈. 그 수모를 겪고도 또 나한테 뭘 바라는 거야!’
진저리를 치고 있을 때쯤.
“신경 쓰지 말고 그대는 하고 싶은 일 해. 마물을 잡고 싶으면 잡고, 레일라를 때려죽이고 싶으면 죽이고.”
“…….”
“내가 곁에만 있게 해 줘.”
황태자가 읊조렸다. 나는 멈칫하고 시선을 들어 그를 보았다.
“저는 전하께서 왜 이러시는지 모르겠어요.”
훤한 대낮에도 새빨간 호감도 게이지 바가 강렬히 제 색을 뿜어 댔다.
성인식에서 나는 모든 감정의 편린들을 정리했다고 생각했다.
하드 모드가 끝나고, 이제 남은 것은 노멀 모드의 여주를 위한 스토리뿐인데.
너는 왜…….
“몰라도 돼.”
황태자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대는 그런 거…… 몰라도 돼. 그대에게 중요한 건 이제 그런 게 아니잖나.”
“…….”
“결국, 아무런 도움도 없이 알아서 공작저를 빠져나갔지, 그대는.”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겠지만, 그가 알아맞혔다.
한땐 남주들 중 한 명이 나를 구원해 주리라 여겼고, 호감도 수치를 절대적인 탈출 지표로 여겼다.
하지만 이제 호감도도, 탈출도 모두 물 건너갔다.
목적도, 살아남을 이유도 사라진 내게, 이제 중요한 건…….
‘……이제 내게 중요한 건 뭘까.’
문득 그런 생각에 미쳤을 때.
“중요한 건, 그대가 하고자 하는 일이 곧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이란 거야.”
칼리스토가 명확하게 말했다.
“제가 뭘 할 줄 알고요?”
“뭐든. 죽은 레일라들을 다 깨워서 세계 정복이라도 하려는 건가?”
그가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되물었다. 나는 여전히 낯선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전하는 황태자 전하시잖아요.”
그의 제안을 거절하고, 우리가 이루어질 수 없다고 판단한 결정적인 이유.
“무결한 황제가 되고 싶어 하셨잖아요.”
“난 또, 그게 뭐라고.”
그가 어깨를 으쓱이며 가볍게도 답했다.
“황태자 같은 거, 때려치우면 되지. 차라리 그대가 제국을 점령해서 황제가 되는 것도 꽤 나쁘지 않은걸.”
“농담하는 거 아니…….”
“그냥 곁에 있는 것도 안 되나?”
그가 내 말을 끊고 물었다. 아까 배에서 보았던 초조한 얼굴.
언제나 여유가 흘러넘치던 그의 얼굴은 어느새 절박하게 변한 상태였다.
‘칼리스토는 세뇌당하지 않았어.’
나는 그 사실 하나만을 되뇌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허락이었다.
그제야 남자가 다시 여유를 되찾고 웃었다.
죽였다고 생각했던 심장이 다시 살아 고동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