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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엔딩은 죽음뿐-197화 (197/243)

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197화

마침내 우리는 거대한 건물 앞에 도착했다.

“이게…… 신전이라고요?”

그것은 신전이라 부르기에 큰 어폐가 있었다.

창문 하나 없는 사각형 모양의 진회색 건물은 꼭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감옥 같았다.

“저들끼리는 그렇게 부른다던데.”

황태자가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들어가지.”

그가 훌쩍 높은 계단 위로 먼저 올라서서 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의 뒤편으로 네모난 구멍이 뚫려 있었다. 입구였다.

문조차 없는 시커먼 안쪽을 바라보니 괜히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잠시 망설이던 나는 이내 황태자의 손을 붙들었다.

그가 힘을 줘 손쉽게 위로 끌어 올렸다.

이윽고 우리는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좁다란 통로를 얼마 걷지도 않았는데 지하로 향하는 돌계단이 나왔다.

‘이놈들은 참 지하를 좋아한단 말이야.’

솔레일에서도 섬 깊숙한 지하에 알 수 없는 제단을 만들어 놓은 것을 생각하면, 참 악의 무리 같기도 한 괴벽이었다.

“조심해.”

스르릉-. 검을 빼든 칼리스토가 나지막이 말하며 앞서 내려갔다.

나는 묵묵히 그 뒤를 따랐다.

한 사람이 겨우 들어갈 정도로 좁았던 계단 폭은 아래로 내려갈수록 점차 넓어졌다.

내부는 생각보다 어둡지 않았다.

곳곳에 등불이 걸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보다 더 의아한 건, 외부인의 침입을 막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었다.

분명 레일라 신도들 아니면 마물들이라도 잔뜩 있을 줄 알았는데.

‘하기야. 여기까지 올 수 있는 사람도 없을 테니, 이곳까지 덫을 설치할 필욘 없겠지.’

거대한 문어 대가리가 도사리는 섬도 모자라, 사막 한가운데에 지어진 곳이었다.

나 또한 마법 지도가 있기에 망정이었지, 섣불리 왔다가는 사막을 헤매다 조난당했을 것이 분명하다.

아무것도 튀어나오지 않았지만, 우리는 긴장감을 유지한 채 계속해서 계단을 타고 내려갔다.

마침내 끝도 없이 이어져 있을 것만 같은 계단은 광활한 공간과 함께 끝이 났다.

“이게…….”

우리는 남은 계단 아래쪽 바닥을 보고 우뚝 멈춰 섰다.

빛에 반사되어 번쩍번쩍 빛나는 수많은 금화와 보석, 보물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사이를 삐쭉 튀어나와 메꾸고 있는 수백, 수천 개의 뼈들.

“흐읍.”

나는 드러난 광경에 헛숨을 집어먹으며 주춤 물러섰다.

인골들이었다.

“레일라 신도놈들. 사람들을 납치해서 실험하고 여기다 시체를 숨긴 건가? 더럽게도 많군.”

수많은 뼈의 잔해들로 인해 속이 역한 건 마찬가지인지 황태자가 험악하게 눈살을 찌푸렸다.

“……아니에요.”

“뭐?”

“여기, 고대 레일라들의 무덤이에요.”

“무덤……?”

칼리스토가 무슨 소리냐는 듯 되물었지만, 나는 더 답하지 않았다.

그의 말마따나 학살이라도 당한 듯한 수많은 뼈들을 보고 있자니, 눈앞이 아찔해졌다.

나는 무덤이 무언가를 상징하는 줄 알았지, 진짜 무덤을 퀘스트 장소로 줄 줄은 몰랐다.

‘미친 게임.’

얼굴을 굳힌 채 무덤의 내부를 쭉 둘러보던 나는, 이윽고 저 멀리 있는 무언가를 발견하고 눈을 부릅떴다.

“거울.”

그것은 뷘터의 비밀 공간에서 본 것보다 훨씬 컸다.

이 엄청난 공간의 한 면을 다 차지할 만큼.

오랜 시간 동안 녹슬고 빛바랜 탓에 미리 모양새를 알지 못했다면 벽이라고 착각할 법했다.

나는 망설임 없이 남은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공녀!”

칼리스토가 깜짝 놀라 나를 불렀다.

그러나 나는 그를 무시한 채 겁도 없이 발에 치이는 것들을 헤치며 걸어갔다.

꿈에서도 보았던 거울. 그 속에 비쳤던 내 잠든 모습.

묘한 고양감이 차올랐다.

‘혹시,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는 중요한 단서 아닐까?’

쩔그럭, 빠드득- 발아래 보석과 유골들이 잔뜩 채이고 짓밟히는 소리가 들렸지만 별로 개의치 않았다.

막 중간까지 도달한 그때였다.

크르르르-.

어디선가 섬뜩한 울음소리가 들렸다.

흠칫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리자, 어두운 구석 쪽에서 안광을 번뜩이는 무언가가 느릿하게 걸어 나왔다.

점박이가 새겨진 가죽과 외양이 하이에나와 비슷했다. 그러나 비정상적일 만큼 긴 이빨과 세 갈래로 갈라진 혀.

마물이었다.

“크헝-!”

침을 뚝뚝 흘리던 마물이 이내 금화를 박차고 눈 깜짝할 새 내게 달려들었다.

“어, 어…….”

퀘스트 창이 나오지 않았다. 바보처럼 얼어붙어 있을 때쯤.

퍼억- 깨앵!

내게로 튀어 올랐던 마물이 코앞에서 휙 옆으로 날아갔다.

마물을 걷어찬 황태자가 어느새 그것을 발로 내리누르고 있었다.

“지금까지 겪은 마물과는 좀 다르군. 오래 굶었나 본데.”

그의 말마따나 버둥거리는 마물의 움직임이 둔중하고 힘이 없었다.

푸욱- 그 위로 쉽게 칼을 꽂은 황태자가 굳어 있는 나를 돌아보고 타박했다.

“보지 마. 왜 이런 걸 보고 그래?”

네가 보여 준 걸 왜 나한테 그러냐고 반박하려던 찰나.

크르르르 -

짐승 울음소리가 들렸다.

느릿느릿 기어 나오는 또 다른 마물을 보고 황태자가 혀를 찼다.

“똑같은 놈이야. 먼저 가 봐. 금방 해치우고 따라갈 테니까.”

다른 때 같았으면 돕겠다고 하겠지만, 이상하게도 퀘스트 창이 뜨지 않았다.

‘혼자 왔으면 내가 알아서 상대해야 하는 거야, 뭐야.’

잠시 게임에 대한 분노를 삭이던 나는 이내 그에게 가볍게 인사하고 몸을 돌렸다.

“……고마워요.”

지금은 진실의 거울 앞에 서는 게 먼저였다.

퍼억, 캐엥-!

손쉽게 마물들을 죽여 나가는 칼리스토를 뒤로한 채, 나는 부지런히 걸었다.

그리고 마침내, 낡고 거대한 거울 앞에 도착했다.

대체 얼마나 오래된 세월을 견딘 건지, 거울은 거의 다 깨져서 부서지기 직전이었다.

두껍게 먼지가 쌓인 표면은 내 얼굴조차 비치지 않았다.

‘이거 작동은 하는 거야?’

나는 아연해진 기분으로 손을 들어 거울을 살짝 훔쳤다.

두툼한 먼지가 닦이자, 그 안에 가려진 표면이 조금 드러났다.

역시나 다 깨져서 간신히 붙어 있는 거울에 내 얼굴이 여러 개로 비쳤다.

그때였다.

〈SYSTEM〉 ~메인 퀘스트 : 진실의 저편~

[진실의 거울 찾기] 퀘스트 성공!

〈SYSTEM〉 여기까지 도달한 당신에게 [진실]을 알 자격이 주어집니다.

뿌연 거울 위로 흰 네모 창이 떠올랐다.

〈SYSTEM〉 [진실의 거울]로 히든 스토리를 열람하시겠습니까?

[수락 / 거절]

별로 열람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히든 루트의 필수 전개 중 하나인 듯해서 별수 없었다.

나는 [수락]을 누르기 직전 흘끗 뒤돌아 황태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하나, 둘 나타나는 마물들 사이에서 그야말로 미친 사람처럼 칼춤을 추고 있었다.

‘하긴. 누가 누굴 걱정해.’

한시름 내려놓은 나는 이내 다시 몸을 돌려 [수락]을 눌렀다.

그 순간, 거울 속에서 폭발하듯 하얀 빛이 쏟아져 나왔다.

“으읏.”

나는 반사적으로 두 팔로 눈을 가렸다.

“공녀-!”

문득 아득하게 나를 부르는 칼리스토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와 동시에, 눈앞이 하얗게 점멸되었다.

쿵. 쿵. 쿵.

커다란 북소리와 함께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검은 공간 속에 갇혀 있었다.

쿵. 쿵. 쿵. 빠라밤밤-!

이어지던 북소리가 문득 장엄한 음악으로 이어졌다.

“뭐야.”

나는 당황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디서 들어 본 음악이었다. 그것은 바로…….

‘BGM?!’

게임의 배경 음악이었다.

그때 사방을 살피던 내 눈앞에 흰 글씨가 떠올랐다.

「태초, 대륙은 황금룡의 통치 아래 평화의 시대를 누렸다.」

“무슨…….”

당황해서 버벅이던 나는 이내 이게 어떤 장면인지 알아차렸다.

게임의 프롤로그에서나 나올 법한 장면들이었다.

그러니까, 배경 설명.

「용은 어둠을 땅 밑으로 몰아 날개 아래 내리눌렀다. 용의 어진 눈이 세상을 황금빛으로 비추자 땅 위에는 풍요로운 곡물…….」

“스킬, 스킵!”

나는 반사적으로 [skip] 버튼을 찾아 헤맸지만 보이지 않아 결국 입으로 외쳤다.

「…….」

「수명이 다한 황금룡은 남겨진 인간들을 위해 송곳니 하나를 남겨 두고 세상에서 사라졌다.」

그러자 잠시간의 말줄임표와 함께 정말로 지루한 내용들이 건너뛰어졌다.

「땅속에서 어둠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스스로를 신이라 칭하며 지상 위로 올라온 그들은 ‘발타’라는 나라를 세운 후 잔악하고 무도하게 인간들을 학살해 나갔다.」

「그런 그들을 저지하는 무리가 있었으니…….

바로, 고대 마법사!」

“휴…….”

이제야 좀 아는 내용이 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안도 반 짜증 반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고대 마법사들과 레일라 간의 치열한 전쟁이 벌어졌다.

하지만 생명을 갈취하는 레일라 일족들은 갈수록 강대해지고…….」

“스킵! 아는 내용은 알아서 좀 스킵하라고.”

불만스럽게 중얼거리자 다시 눈앞에 말줄임표가 떴다.

「……살아남기 위해 레일라들은 거울을 공격했다.

치열한 공격 끝에 [진실의 거울]의 모서리가 떨어져 15조각으로 갈라졌다.

레일라들은 후일을 도모하기 위해 조각의 일부를 황금룡의 무덤에 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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