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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엔딩은 죽음뿐-198화 (198/243)

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198화

“스…….”

반사적으로 스킵을 외치려다가, 이건 처음 듣는 내용이라 입을 다물었다.

무미건조한 눈으로 서술을 죽죽 읽는 것을 마치자, 글씨가 자동으로 넘어갔다.

「하지만 그러한 발악에도 불구하고 진실의 거울은 발동되고-.

레일라 일족의 영혼은 모조리 거울 안에 봉인됐다.

하지만 끝내 봉인되지 않은 레일라가 하나 있었다.

땅속 깊은 곳에 숨어 있던 어린 레일라는 가족과 형제들의 시체 앞에서 피눈물을 삼켰다.」

- 흐아아아악-!

그때였다. 어디선가 누군가 울부짖는 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한이 맺힌 그 울음소리에 머리끝이 쭈뼛 섰다.

“뭐, 뭐야?”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퍼뜩 고개를 쳐들었다.

그 순간 흰 글씨 아래, 아무것도 없던 검은 공간 위로 흰 선이 직직 그어졌다.

단조로운 그림이라 알아보기 쉬웠다.

삐쭉빼쭉 쌓여 있는 해골들.

그리고 그 앞에 무릎 꿇고 흰 눈물을 뚝뚝 흘리는 졸라맨.

「어린 레일라는 복수를 위해 힘을 키웠다.

때론 갓난아이, 때론 젊은 처녀, 때론 죽어 가는 노인의 거죽을 뒤집어쓰며.

그러나 타인의 생명을 갈취하면 할수록 본질을 잃어버렸다.」

- 완전해지려면 황궁으로 가야 돼.

어딘가에서부터 또다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다시 글씨가 바뀌었다.

「그녀는 흩어진 거울 조각을 모은 후 먹잇감들을 현혹시켰다.

다행히 죽기 전 형제들이 남긴 저주로 인해 마법사들의 세가 많이 약해져 그리 어렵지 않았다.」

글씨 아래 흰 선으로 이루어진 그림이 직직 그어졌다.

마법사를 상징하는 듯 커다란 고깔모자를 쓴 졸라맨과, 그런 그의 목을 조르는 또 다른 졸라맨.

고깔모자를 쓴 졸라맨의 발끝을 타고 흰색이 뚝뚝 흘러내렸다.

피였다.

「오래도록 숨죽인 채 살아가던 어린 레일라는 어느 날, 황궁으로 가기 적합한 몸을 찾았다.

그녀의 몸을 빼앗은 레일라는 아리 따운 아가씨로 성장했다.」

다음 순간, 떠오른 글을 읽은 나는 눈을 부릅떴다.

졸라맨에 불과했던 흰 선으로 이어진 그림이 점점 색을 띠고 복잡해지기 시작하더니, 끝내-.

“……이본.”

사진처럼 선명한 누군가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본이었다.

「사냥하는 거미처럼 거미줄을 치고 차근차근 사냥감을 세뇌시켰다.」

마치 게임 속 일러스트를 보여 주는 것처럼, 환히 웃는 선량한 뷘터의 모습이 연달아 스쳐 지나갔다.

다시 글씨가 변했다.

「시간이 흘러, 덫에 걸린 사냥감의 도움으로 공작저에 입성한 ‘이본’은 그곳에서 고대 마법사의 피가 흐르는 ‘페넬로페’를 만난다.」

“고대 마법사의 피……?”

검은 공간에 두 여자의 잔상이 떠올랐다. 나와 이본이었다.

전혀 알지 못한 정보에 당황할 틈도 없이 글씨가 빠르게 다음 장으로 넘어갔다.

「페넬로페는 본능적으로 이본을 경계했다. 레일라를 죽이려 했지만, 사람들에게 배척받는 저주로 인해 번번이 실패한다.

이본은 오히려 자신을 방해하는 악역을 역이용하여 공작 일가를 점령해 나간다.

각성하지 못한 페넬로페는 쉽게 죽고 만다.」

숨이 멈췄다. 감옥에서 잔인하게 죽어 나간 페넬로페의 잔상이 잠시 비쳤다 사라졌다.

나는 숨죽인 채 글을 읽었다.

「끝내 공작저를 모조리 집어삼킨 그녀는, 황태자와 약혼하여 황궁에 들어선다.

[황금룡의 송곳니]를 찾아 완전한 불사가 된 이본.

강인한 생명력을 마음껏 갈취한 그녀는, 거울 조각을 이용하여 형제들의 봉인을 풀고 복수를 완성한다.

지상의 모든 생명체는 레일라의 먹잇감으로 전락하고-.

그들을 막아설 마법사들마저 모조리 사라진 세계는 그리하여 멸망한다.

- ~노멀 모드 히든 스토리~ The End.」

이야기는 그렇게 끝이 났다. ‘베토벤 3번 교향곡’처럼 웅장하던 BGM도 사라졌다.

“뭐야…… 이게 히든 스토리 끝이야?”

흰 네모 창마저 없어지고, 어둠만 남았다. 나는 아무것도 없는 공간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래서 뭐 어쩌라는 건데.’

이본이 본래 설정과 달리 흑막이라는 건 이미 한참 전부터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나는 이런 걸 원한 게 아니라…….’

갑자기 울컥 화가 치밀어 올랐다.

“내가 이딴 거 알고 싶어서 개고생하면서 여기까지 온 줄 알아?!”

텅 빈 허공을 향해 발악하듯 외쳤다.

“이거 말고, 나는……!”

이어서 외치던 나는 우뚝 말을 멈췄다.

‘난 뭘 원하고 있지?’

원초적인 질문이 머릿속에 어른거렸다.

사실 내가 뭘 원하고 여기까지 왔는지 몰랐다.

내가 어렴풋이 아는 건, 이제 게임에서 나가더라도 모든 게 부질없어졌다는 것뿐.

그때였다.

뺨, 뺨, 빠바 바라밤-!

갑자기 꺼졌던 BGM이 고막이 터질 만큼 커다랗게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조금 전과는 달리 템포가 무척이나 빠르고, 사나웠다. 마치 이야기의 절정에 이른 것처럼,

“뭐…….”

휘이이익-! 어디선가 세찬 바람이 몰아쳤다. 그 순간이었다.

「하지만,

파국이 휘몰아치는 세상에서도 살아남은 단 한 명의 마법사가 있었으니!」

잠잠하던 새카만 공간에 또다시 흰색 네모 창이 떠올랐다.

그 밑으로 파리한 행색의 남자 하나가 그려졌다.

“뷘터……?”

남자의 얼굴이 덥수룩한 수염으로 뒤덮여 있었다.

거칠어진 은발과 빛이 사라지고 혼탁한 검푸른 색의 눈동자 덕분에 간신히 그를 알아보았다.

「뒤늦게 레일라의 세뇌에서 풀려난 마법사는 마지막 남은 힘을 짜내 진실의 거울 앞에 도착한다.

거울에서 진실을 엿본 그.

자신들이 죽인 페넬로페가 레일라에 맞서 싸우던 유일한 사람이란 것을 깨달은 그는, 자신의 생명을 바쳐 시간을 되돌린다.」

끝도 없이 펼쳐진 사막을 헤매던 그는, 마침내 아까의 나처럼 감옥 같은 레일라의 신전을 발견했다.

- 제 어리석음으로 벌어진 모든 일들…… 이 끔찍한 죄악을 영혼으로 갚겠습니다.

‘진실의 거울’ 앞에 선 뷘터는 한참 동안 회한의 눈물을 흘렸다.

이윽고 일어난 그는 알 수 없는 주문을 커다란 소리로 외치며 지팡이를 치켜들었다.

그의 두 눈에서 레이저처럼 흰빛이 터져 나왔다. 그 빛이 그의 주변에 화려한 마법진을 그렸다.

뷘터의 몸이 산 채로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세계는 마법사가 되돌린 시간에 갇혔다.

다시 시간을 흐르게 하려면 세계를 멸망시키는 레일라를 막는 것뿐!

그러나 어리석은 페넬로페로 인해 계속해서 시간은 맴돈다.」

하드 모드 속 수많은 페넬로페의 죽음이 스쳐 지나갔다.

게임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이 모두 사진처럼 생생한 장면이라는 것뿐.

나는 시스템이 보여 주는 페넬로페의 죽음에 얼굴을 처참하게 일그러뜨렸다.

그것은 내가 게임 초기에 그토록 염원하던 [리셋]을 나타내고 있었다.

「무수히 많은 죽음을 겪는 동안, 페넬로페의 영혼은 끝끝내 가루처럼 부서져 사라졌다.

더는 페넬로페가 돌아오지 않았다. 세계가 멈췄다.

영겁의 시간이 흐르고……

마침내 아주 조그만 영혼 조각이 다른 세계에서 환생하였으니-.」

쾅, 빠밤-!

흘러나오던 BGM이 절정에 오른 후 멈췄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당신!」

정말로 게임 속 시나리오 같은 모습에 눈앞이 아연해졌다.

“하, 하…….”

나는 기가 막혀서 헛웃음을 터뜨렸다.

이런 내 반응에도 아랑곳 않고 스토리는 다음 장으로 넘어갔다.

「여기까지 단 한 번도 죽지 않고 살아온 당신이 바로 진정한 주인공!

시련을 딛고 일어나, 악역으로부터 멸망의 위기에 처한 세상을 구하리라!」

오글거림의 최정점을 찍은 문구 위로 새로운 네모 창이 떠올랐다.

〈SYSTEM〉 ~메인 퀘스트 : 하드 모드 히든 루트~

[진짜 악역은 누구?] 퀘스트를 진행하시겠습니까? (보상 : [히든 엔딩], [황금룡의 송곳니])

[수락 / 거절]

지금까지 이어진 시나리오보다 더 환장스러운 내용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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