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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엔딩은 죽음뿐-199화 (199/243)

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199화

“하…….”

나는 새로운 메인 퀘스트 창을 보며 허탈하게 웃다가 아득 이를 악물었다.

“지랄 마. 내가 왜……! 내가 왜 이딴 퀘스트를 해야 돼!”

하드 모드가 끝났는데 왜 난 아직도 게임 속에서 헤매야 하는 거지?

탈출에 실패하고 나는 어느 정도 단념했다. 그렇지 못하면, 미쳐 버릴 것 같았으니까.

비록 여기서 나가지 못하더라도, 내가 바란 건 그저…… 그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의 종결이었다.

나는 더는 게임에 의해 개죽음 당할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시달리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스토리의 궤도에서 벗어나는 법을 원했다.

“세상이 멸망하든 말든, 나랑 무슨 상관인데? 그냥 이본인지 레일라인지 그년 다 주라고, 난 필요 없으니까!”

찰나,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마치 내 말을 알아들은 것처럼 퀘스트 창 밑에 새로운 글씨들이 떠올랐다.

〈SYSTEM〉 메인 퀘스트를 모두 진행하면 보상과 함께 게임이 종료됩니다.

당신은 보상 [황금룡의 송곳니]로 사람들의 생명을 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스템의 답은 전혀 내게 위안이 되지 못했다.

“그러니까, 내가 왜 남의 생명들을 구해야 하는데!”

나는 온몸을 바들바들 떨며 악에 바쳐 소리쳤다.

“난 이미 죽었는데. 이 빌어먹을 곳에 끌려와서 개고생하는 동안 죽어서 이제 돌아갈 곳도 없는데, 내가 왜!”

그간 힘겹게 내리누르고 있던 좌절과 절망들이 아차 할 틈도 없이 터져 나왔다.

굳이 이본의 세뇌 때문이 아니더라도, 독주를 마신 후 꾼 꿈에서 평온히 잠든 내 모습을 보았을 때부터 어림짐작했다.

‘이미 내 현실 몸은 죽은 게 아닐까.’

그러니까 난 현실에서 이미 죽어 없어지고, 이건 모두 환상인 것이다.

아니면, 지옥으로 끌려와 벌을 받는 중이라든지.

그게 아니라면, 페넬로페와 내 처지가 이렇게 비슷할 리가. 이렇게 고통스러울 리가 없지 않은가.

‘근데, 여기가 진짜 지옥이라면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밤새워서 게임 좀 한 게 그렇게 큰 죄야?’

억울함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이대로라면 꼴 사납게 울 것 같아서, 나는 턱이 부서져라 어금니를 사리물었다.

그때였다. 문득 네모 창 안에 흰 글씨들이 스르륵, 사라지고 그 안을 어떤 영상 하나가 대체했다.

“……아.”

익숙한 부름에 퍼뜩 귀가 트였다.

그리고 나는 부지불식간에 숨을 멈췄다.

“어…….”

화면 안의 모습은 어느 병실이었다.

산소 호흡기를 쓴 채 침대 위에 죽은 듯이 잠들어 있는 내 모습이 보였다.

“……아.”

또다시 익숙한 부름이 들렸다. 나는 휙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내가 누워 있는 침대 옆에서 내 손을 꼭 잡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는 인영을 발견하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언제까지 이렇게 잠들어 있을 거야, 멍청아.”

둘째 개새끼였다.

“……우리가 다 잘못했어. 용서라도 빌게 제발 눈 좀 떠라, 응?”

놈이 내 손에 이마를 묻은 채 간절하게 빌었다.

나는 눈앞의 장면이 이해도 가지 않고, 믿기지도 않아 입을 떡 벌렸다.

그때, 달칵- 누군가 문을 열고 병실로 들어왔다.

“형.”

첫째 개새끼였다. 둘째 놈이 퍼뜩 고개를 들고 물었다.

“아버지는.”

“오늘 아침 급히 미국으로 출국하셨다. 그쪽에 혼수상태에서의 종양 제거에 여러 번 성공한 의사가 있다더군. 곧 옮겨 갈지도 모른다.”

그 말을 마치고 첫째 놈은 입을 다물었다.

병실에 잠시간 침묵이 맴돌았다.

얼마 후 둘째 놈이 고요하게 입을 열었다.

“형. ……이가 우리가 많이 밉나 봐.”

여전히 잡은 내 손을 놓지 않은 상태였다.

“하, 씨발. 위암도 모자라서 과로에 의한 쇼크라니…… 재벌집 막내딸이 쪽팔리게 이게 뭐냐.”

놈이 내 손을 잡지 않은 한 손으로 제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리며 중얼거렸다.

‘하…… 위, 위암?!’

나는 놈이 말한 내가 누워 있는 이유에 기가 막혀서 입을 연신 벙긋 거렸다.

그러는 중 둘째 놈이 괴로운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후회돼. 왜 학교 다닐 때 그렇게 병신 같은 짓을 했을까.”

“너도, 나도, 아버지도. 못 배워 처먹었으니까 그랬겠지.”

첫째 놈이 짧게 대꾸했다. 성의 없는 정답이었다.

“아무도 하란 소리 안 했는데 혼자서 독하게 대학 들어갔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난 ……이가 아버지한테 유학 보내 달라고 그럴 줄 알았어. 고고학인지 그쪽 배우는 애들은 다 그런다며.”

이어진 첫째 놈의 말에 둘째 놈이 피식 웃으며 말을 받았다.

“얘가 독립시켜 달랄 때 아버지 표정 봤어? 입학 선물로 유학 준비 다 끝내 놨는데, 물먹은 표정 보니까 어찌나 속이 시원하던지.”

그러나 빈정거림도 아주 잠시였다. 병실 안에 다시 죽음 같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형, ……이가 암에 걸린 게 아무래도 다 나 때문인 것 같아.”

“…….”

“밤에 몰래 쥐새끼처럼 밥 먹는 거 못 하게 하면 제시간에 같이 밥 먹을 줄 알았어.”

“그럼 나는.”

첫째 놈이 곧바로 받아쳤다.

“거지 같은 단칸방 내주면 얼마 안 가 집으로 돌아올 줄 알았지, 그렇게 악바리처럼 알바를 세 탕씩 뛸 줄 어떻게 알았겠어.”

하긴, 놈들은 조금도 몰랐을 것이다.

내가 그 집으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 망할 친부에게 손 벌리지 않기 위해 얼마나 필사적으로 살았는지.

“……할 수만 있으면 내 위라도 떼 주고 싶어.”

다시 내 손에 이마를 묻은 둘째 개새끼가 아스라이 속삭였다.

축축이 젖어 있는 음울한 목소리에, 문득 뜨거운 것이 복받쳐 올랐다.

‘가증스러운 놈.’

욕설을 내뱉기 위해 막 입을 열려던 찰나였다.

화면이 바뀌었다.

“……이 좀, 우리 ……이 좀 살려 주시오!”

친부의 모습이 보였다. 미국으로 출국했다던 그는 서양인 한 명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빌었다.

벌겋게 충혈된 눈에서 믿기지 않는 물방울들이 떨어지는 것을 끝으로, 서서히 화면이 사라졌다.

그리고.

〈SYSTEM〉 당신의 정신에 잠식된 [18%의 세뇌 저주]가 풀렸습니다!

네모 창 안에 내가 여기까지 꾸역꾸역 찾아온 원인이 떠올랐다.

“시발…… 위암이라고?”

아직도 얼떨떨한 기분이 들어서, 나는 더듬더듬 중얼거렸다.

알바와 학교생활을 병행하면서, 이러다 과로사로 뒈지겠다는 생각은 했지만 암에 걸릴 줄은 전혀 몰랐다.

문득 이본이 세뇌하면서 보여 줬던 끔찍한 장면이 떠올랐다.

내가 죽고, 장례식장에서 귀찮고 짜증스럽게 얼굴을 찌푸리며 내 영정 사진에 욕설을 내뱉던 가족들.

그러나 진실의 거울이 보여 준 나는 죽지 않았다. 죽었다고 믿었지만, 아직 살아 있었다.

내 죽음에 짜증을 내던 가족의 모습도 없었다.

그건 모두 세뇌였던 것이다.

“왜 이제 와서…….”

문득 뜨거운 것들이 턱을 타고 뚝뚝 떨어졌다. 그제야 내가 울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왜 이제 와서 그러는데. 왜 이제 와서……!”

나는 이미 사라지고 없는 화면을 노려보며 비명처럼 소리 질렀다.

“다 너네 때문이잖아! 너네 때문에 내가! 내가……!”

결국 이렇게 될 거면서, 난 뭘 위해 그렇게 악착같이 살았던 걸까.

견딜 수 없는 허탈함이 해일처럼 나를 덮쳤다.

그러나 동시에, 혼수상태에 빠진 나를 짜증스럽게 여기지 않는 가족의 모습에 안도하는 내가,

한없이 비참하게 느껴졌다.

그 순간이었다.

〈SYSTEM〉 ~메인 퀘스트 : 하드 모드 히든 루트~

[진짜 악역은 누구?] 퀘스트를 진행하시겠습니까?

(보상 : [히든 엔딩], [황금룡의 송곳니])

[수락 / 거절]

사라졌던 퀘스트 창이 다시 떠올랐다.

이제 알았다. 시스템 보상은, 다름 아닌 현실의 나를 위해서였다.

나는 떠오른 퀘스트 창에 진저리를 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울며 겨자 먹기로 [수락]을 눌렀다. 그러자 새로운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SYSTEM〉 진실을 알게 된 당신에게, 보상으로 [진실의 거울 봉]이 주어집니다.

보상을 받으시겠습니까?

[예. / 아니오.]

‘거울 봉?’

미간을 좁히며 [예.]를 누르자, 검은 공간에서 무언가 ‘스르륵’ 솟아 나왔다.

“미친, 이게 뭐야.”

나는 보상을 보고 오만상을 찌푸렸다.

그것은 손잡이가 봉처럼 길쭉한, 손거울이 달린 요술 봉이었다.

빨리 집으라는 듯 웅웅거리며 빛을 발하는 그것을 마지못해 잡자 글씨가 변했다.

〈SYSTEM〉 이제부터 당신은 [진실의 거울 봉]을 이용하여 [고대 마법]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SYSTEM〉 [악의 세력]을 저지하고, 멸망의 위기에서 세상을 구해 주십시오!

〈SYSTEM〉 단, [고대 마법]은 많은 체력과 정신력을 요구합니다! 중요한 때에 신중히 사용하십시오!

이어서 새로운 글씨가 추가됐다.

〈SYSTEM〉 마지막으로 고대 마법사들의 영혼이 당신에게 한마디를 남겼습니다.

- 후손이여, 그대의 돈으로 지금까지 진실의 거울을 유지 보수할 수 있었소, 고마우이!

“미친……!”

미처 욕을 다 내뱉기도 전에 검은 공간이 와르르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틈새로 폭발적인 빛이 쏟아져 나왔다.

환한 빛이 다시 눈앞을 점멸했다.

“공녀-!”

다시 눈을 떴을 무렵. 누군가 내 몸을 거칠게 끌어당겼다.

쿠르르르릉, 콰앙-!

그와 동시에 알 수 없는 거대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

“으윽…….”

나지막한 신음과 함께 정신을 차리자, 나를 끌어안고 바닥을 뒹군 황태자가 보였다.

나는 힘겹게 고개를 돌려 방금 전 내가 서 있던 곳을 확인했다.

낡고 다 깨져 있던 [진실의 거울]이 그야말로 와장창 무너져 가루가 되어 있었다.

“괜찮나? 다친 데 없어?”

거울이 무너지기 직전 가까스로 나를 구출한 황태자가 벌떡 일어나 내 몸을 살폈다.

“그대가 거울을 만지는 순간 갑자기 그 주변에 강한 결계가 쳐져서 다가갈 수가 없더군. 대체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손에 든 건 또 뭐야.”

“……전하.”

“제기랄, 왜 그래. 왜 우는데.”

시뻘건 적안 속에, 괴상한 요술 봉 하나를 들고 울고 있는 꼴 사나운 내 모습이 비쳤다.

방금 전 보고 온 것들이 좀처럼 믿기지 않아서.

그리고 손에 들린 거울 봉이 너무 유치하고 오글거려서, 나는 엉엉 울었다.

“대체 왜 그러는 거야, 공녀. 울지 마. 내가 다 잘못했으니까, 응?”

칼리스토는 우는 나를 보고 어쩔 줄을 모르다가, 이내 와락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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