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200화
황태자는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었는지, 나를 아기처럼 보듬어 안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삭은 유골들과 금화들을 헤치고 우리가 처음 빠져나왔던 통로 쪽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가는 동안 흘끔 본 바닥에, 그가 검으로 난도질을 해 놓은 마물들의 시체가 사방에 널브러져 있었다.
‘미친놈…….’
눈물이 쏙 들어가는 엄청난 광경이었다.
폭넓은 계단을 성큼성큼 오른 그는, 그나마 가장 먼지와 거미줄이 덜 쳐진 기둥 뒤에 앉았다.
그리고 제 품에 날 꼭 껴안았다. 더러운 것에 조금도 닿지 않도록.
나는 그의 품 안에서 꼼지락거리다가, 그때까지 그와 내 사이에 불편하게 껴 있던 거울 봉을 슬쩍 내려 놓았다.
“……이제 좀 괜찮아졌나?”
황태자가 걱정스레 물었다.
그의 몸 위에 앉아 있는 탓에,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나는 방금 전까지 펑펑 울던 게 좀 민망해져서, 코를 훌쩍 들이마시며 시선을 피했다.
그러자 그가 불쑥 내게 손을 뻗었다.
“애도 아니고, 울기는.”
“제, 제가 알아서 닦을게요!”
손수 체액들을 닦아 주려는 그의 손을 피해 허둥지둥 눈을 박박 문질렀다.
“비비지 마. 손 더럽잖아.”
그가 깜짝 놀라 먼지투성이인 내 손을 잡아뗐다.
그러더니 드러난 내 벌게진 눈두덩이에 미간을 좁히며 혀를 찼다.
“쯧, 벌써 붉어졌군.”
결국, 피한 것이 무색하게 황태자의 손에 얼굴이 잡혔다.
거울에 쌓인 먼지를 훔쳐내느라 시커메진 내 손과는 달리, 피 한 방울 튀지 않은 깨끗한 손이었다.
칼리스토는 손끝으로 조심조심 눈가에 맺힌 물기를 닦아 냈다.
그리고 ‘호, 호’ 하고 빨개진 눈동자에 살살 입바람을 불었다.
그 탓에 앞머리가 살랑살랑 움직이며 이마를 간지럽혔다.
완전히 어린애를 다루는 듯한 부드러운 손길에 일순 가슴이 철렁했다.
“이제 좀 나아졌군.”
마침내 그가 세심하게 눈가를 닦아 내던 손을 뗐다.
만족스럽다는 듯 호선을 그리는 입술이 코앞에서 어른거렸다. 나는 다시 울 것 같은 기분에 휩싸였다.
“안 물어봐. 아무것도 안 물어볼 테니까 그 개똥 씹은 표정 좀 풀지 그래.”
내 표정이 어떤지는 알 수 없으나, 그가 눈썹을 꿈틀거리며 짜증스럽게 뇌까렸다.
“……전하.”
오랜만에 듣는 놈의 저질스러운 언행에 덩달아 눈살을 구기던 나는, 이윽고 입을 열었다.
반쯤은 충동이었다.
“미친 소리 같이 들리시겠지만, 사실 저 페넬로페 아니에요.”
“오.”
황태자는 전혀 놀라지 않은 얼굴로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대에게서 들은 소리 중 가장 신박한 소리군.”
“그냥 말 안 할래요.”
진지하게 듣는 것 같지 않은 그를 노려보며 다시 꾹 입을 다물자, 그가 금세 꼬리를 내렸다.
“……농담이야. 진지하게 듣고 있다. 계속해 봐.”
“…….”
“잘못했다니까. 응?”
사납게 치켜 올라가 있던 눈꼬리를 내린 채 강아지 같은 얼굴로 채근하는 그를 보니 슬그머니 마음이 풀렸다.
무르게 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냥 말하고 싶었다. 아무거나, 아무렇게나.
그간 힘겹게 숨겨 온 답답한 내 상황, 내 비밀들을.
“……저는 전하가 모르는 아주 먼 곳에서 잘 살다가 갑자기 끌려왔어요.”
“갑자기 왜 끌려온 건데?”
“저도 몰라요. 그냥 눈 뜨니까 에카르트 공작가라서 얼마나 황당했는지…….”
“그거 참 재수 없는 일이군. 하필이면 싹수 노란 것들만 있는 에카르트 공작가라니.”
황태자는 아이의 장단이라도 맞춰 주듯, 썩 재밌다는 얼굴로 대꾸했다.
기분이 좀 그랬지만, 틀린 말도 아니었다.
많고 많은 등장인물 중 왜 하필 재수 없게 페넬로페였을까, 수없이 번뇌했다.
“……그래도 전 노력했어요.”
“뭘?”
“그냥 이것저것이요.”
정확히는 게임 스토리대로 살아남기를.
“고대 마법사들의 영혼인지 지랄인지, 말만 잘 들으면 집으로 돌려보내 줄 줄 알았거든요. 그래서 하라는 대로 열심히 따랐는데…….”
“…….”
“그런데 있잖아요. 열심히 따라도 도무지 끝이 보이지 않더라고요. 이제 다 된 건가 싶으면, 또 다른 것들이 등장하고…… 정말 끝인가 하면, 또 새로운 것들이 들이닥치고…….”
“…….”
“도저히 감당이 안 돼서 죽어서라도 해결을 좀 보려고 했는데, 이제 죽을 수도 없대요.”
이젠 알았다. 여기서 죽는다고, 현실로 돌아갈 수도 없다는 걸.
현실의 몸도 진창이 되어 혼수상태에 빠져 있으니까.
어쩌면 그래서 이곳에 들어오게 된 걸지도 모른다.
문득 아득한 막막함이 눈앞을 덮쳤다.
“……저 이제 어떡해요?”
나는 얼굴을 잔뜩 흐린 채 칼리스토에게 답을 구했다.
그러나 내 이런 막막한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놈이 뻔뻔한 얼굴로 잘도 지껄였다.
“어떡하긴 뭘 어떡해? 내가 데리고 살아야지.”
“제발 그런 끔찍한 소리 좀 하지 마세요.”
“허, 나랑 사는 게 끔찍해?”
어이없다는 듯 헛바람을 터뜨리던 황태자는, 이내 미간을 좁히며 되물었다.
“……왜 돌아가려 하는 건데.”
“네?”
“꿀단지라도 숨겨 놨나? 돌아가려는 이유가 있을 거 아니야.”
“……집으로 돌아가려는데 꼭 이유가 필요해요? 그냥요, 그냥…….”
그렇게 답하면서도 나는 고민했다.
왜 그렇게 악착같이 돌아가고 싶어 했던 건가.
“……사실 학교가 좀 아까웠어요.”
“학교?”
“피 터지게 공부해서 수석으로 들어갔거든요.”
“그대가…… 수석?”
놈이 생경한 눈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기분이 좀 나빠져서, 나는 이를 꽉 깨물고 강조했다.
“네, 수석. 1등이요, 1등.”
“뭘 배우는 곳이었는데. 황족 모욕하는 법?”
“고고학이요.”
의외의 답이었는지, 적안이 커졌다가 원상 복귀됐다.
나는 배우다 만 내 전공을 떠올리며 울적하게 중얼거렸다.
“……전 어렸을 때부터 고고학자가 꿈이었어요.”
“아. 그래서였군. 어쩐지 유물 발굴에 능해 보인다 싶더니…….”
까마득한 사냥 대회에서의 일을 떠올렸는지, 그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왜 고고학자가 되고 싶었지?”
되묻는 말에 나는 잠시 멈칫했다.
나조차 깜빡 잊고 있었던, 내 오랜 과거들.
그 집구석에 들어간 이후 ‘거지 같은 계집애’ 소리를 귀에 딱지가 앉을 만큼 듣던 시절엔, 그 과거가 참으로 구질구질하고 역겨웠다.
지워 버리고 싶었다. 할 수만 있다면 비참하게 죽은 엄마에 대한 기억까지도.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때만큼 꿈꾸던 시절이 없었는데.
“……어렸을 땐 엄마랑 단둘이 살았는데, 집이 진짜 가난했어요.”
“…….”
“친구들은 주말마다 동물원이니, 놀이공원이니 놀러 갔다 왔다고 자랑을 하는데…… 엄마가 절 데려가 줄 곳이 집 앞에 있는 시립 박물관밖에 없었거든요.”
나는 흘끔 칼리스토의 눈치를 보며 덧붙였다.
“초등학생까진 무료입장이어서…….”
“그랬군.”
뭐라 빈정거리거나 비웃을 줄 알았는데, 그는 의외로 진지한 얼굴로 내 이야기를 들었다.
“……엄마가 속상해할까 봐, 매번 전시되어 있는 모든 유물들을 외우다시피 보곤 했어요.”
“…….”
“그리고 집에 돌아가서 본 것들을 나열해 주면, 엄마가 박수를 치면서 우리 딸이 세상에서 제일 똑똑하다고 그랬는데…….”
- 우리 똑똑한 ……이, 고고학자 해도 되겠다.
- 정말? 그럼 나 고고학자 될래!
아득한 기억 한 조각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시험에 빵점 맞고 돌아가도, 엄마는 언제나 내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부끄럽지 않은 딸이 되기 위해서 아득바득 노력하여, 이제 겨우 한 걸음 다가갔다고 생각했는데…….
‘여기 끌려오면서 부질없는 짓이 돼 버렸지.’
씁쓸한 얼굴로 회상을 털어내던 순간이었다.
“꿈을 가진 계기가 나와 같군.”
불쑥 황태자가 입을 열었다.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계기요?”
“하찮은 남작 가문의 여식과 눈이 맞은 아버지 때문에 점점 미쳐 가던 어머니는 내게 무결한 황제가 되라고 수백, 수천 번 속삭였었다.”
지금의 황비 말하는 거야. 그가 덧붙였다.
“어머니가 바라던 대로 가장 높은 자리에 올라서, 이 빌어먹을 나라를 풍비박산 낼 생각이었지.”
‘미친, 전혀 다른 얘기잖아!’
칼리스토가 그토록 ‘무결한 황제’에 집착하던 이유에 대해서 알게 된 나는 기가 막혀서 연신 입을 벙긋대다가, 내뱉었다.
“……전 그런 괴팍한 생각까진 안 했는데요?”
“물론 그대를 만나기 전의 일이야.”
황태자가 콧잔등을 찡긋거리며 말을 이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빌어먹을 황태자 직위 따위, 버려도 괜찮을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
“그대의 이야기를 들으니 생각이 바뀌었어. 아무래도 내 손에 계속 쥐고 있는 게 좋겠군.”
“……왜요?”
“그래야 그대가 하고자 하는 일을 할 때, 기어오르는 놈들이 없을 테니까.”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나를 이유로 들었다.
‘황태자’라는 직위를 버리는 것도, 그 직위를 꾸역꾸역 지키는 것도.
“내가 다 이루게 해 줄게. 마법이든, 고고학이든. 그대 하고 싶은 것 전부.”
“…….”
“그러니까…… 돌아갈 생각 말고 여기 있으면 안 되나?”
그가 천천히 손을 들어 내 뺨에 얹었다. 눈 밑을 천천히 덧그리는 손이 간지러웠다.
“……왜요?”
나는 또다시 이유를 물었다. 어느새 얼굴에 떠 있던 표정이 서서히 사라지는 게 느껴졌다.
나는 삭막한 음성으로 읊조렸다.
“우리가 무슨 사이라고요.”
모든 게 끝이 나면, 게임이 비로소 엔딩에 이르면, 나는 여기 더 남을 이유가 없었다.
왜 또 나를 뒤흔드는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적당히 맞는 파트너 소리, 두 번 다신 듣기 싫어서 나는 이를 악물었다.
“그렇게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지 마.”
불현듯 칼리스토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아무 사이도 아니니까요.”
“…….”
“잊으셨어요? 성인식 전에 제가 한 거절이요.”
“……그걸 어떻게 잊겠어.”
다시 만난 이후, 그는 아프게 웃을 줄 아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대가, 내 헛소리를 들은 후에…… 어떻게 실망하고, 어떻게 죽어 갔는지 똑똑히 봤는데.”
“…….”
“화가 났으면 차라리 내 뺨을 치지, 왜 독을 마시고 그래.”
독을 마신 건 그 때문이 아니었다.
하지만 칼리스토의 얼굴이 너무 괴로운 사람의 그것과 같아서 그 순간 함부로 입을 열 수 없었다.
입술을 달싹이는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황태자가 불쑥 입을 열어 뜬금없이 나를 디스했다.
“……못된 것들만 가르치는 아카데미라도 다닌 건지, 매번 칼로 사람 속을 쑤시는 것 같은 말만 골라 하지.”
“대체 누가 할 소리를…….”
“황족 능멸도 유분수지, 감히 황태자 앞에서 할 짓 못 할 짓은 있는 대로 다 하고. 그러면서 표정은 왜 그렇게 항상 뚱하게 있는 건지, 쯧.”
시뻘건 눈동자를 부릅뜨며 내 중얼거림을 끊은 황태자가, 불만스럽게 중얼거렸다.
그러나 말과는 달리 볼을 쓰다듬는 손길이 퍽 애틋했다.
“그런데, 그런데도…….”
그가 흐리게 웃는 얼굴로 속삭였다.
“사랑해, 페넬로페 에카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