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201화
나는 미약하게 내뱉던 숨을 그대로 멈췄다.
황태자는 그런 나를 내려다보며 묵묵히 내뱉었다.
“그대가 페넬로페 에카르트든 아니든, 그런 건 상관없어.”
헛구역질이 나올 만큼 가슴이 미친 듯이 요동쳤다.
“왜, 왜…….”
나는 목멘 음성을 힘겹게 쥐어 짜냈다.
“이제 와서…… 왜 이제 와서 그러세요.”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반사적으로 흔들리는 시선을 들어 그의 머리 위를 보았다.
여전히 강렬하게 제 빛을 뿜고 있는 새빨간 호감도 게이지 바.
나는 여전히 그가 내게 했던 말을 선명하게 기억했다.
처지가 맞는 파트너 소리, 그의 머리 위에 새겨진 ‘76%’가 머릿속을 빙글빙글 돌았다.
“어린애 같은 순진한 소리라면서요. 멍청한 감정놀음일 뿐이라고…….”
미열처럼 희미하게 피어오른 불씨를 꺼트리는 건 무척 쉬웠다.
어차피 그와 이루어져서 엔딩을 봐 봤자 끝은 이별밖에 더 있을까.
황태자에겐, 다른 남주들만큼 가면을 뒤집어쓰고 선을 긋는 게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그래서 ‘76%’에 실망하면서도 안도했다.
꼭 그의 말이 아니라도 단념하기 어렵지 않았다. 분명 그랬는데…….
“끝이 정해진 착각이라고 했잖아요. 그래서, 전 그래서 착각하기 싫어서 거절했는데…….”
“…….”
“그런데 왜 지금 와서 이래요.”
나는 새된 비명을 지르듯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같은 때를 떠올리는지 말끝을 흐리는 나를 보며, 칼리스토가 얼굴을 아프게 일그러뜨렸다.
“……미안해. 그때 말해 주지 못해서.”
그런 나를 보며 황태자는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두려웠다.”
“……뭐가요.”
“우리 대단하신 황제 폐하께서도 내 어머니를 사랑한다고는 했으니까.”
“…….”
“어머니는 그 말에 속아 계승권에서 한참 떨어진 비루먹은 황자에게 가문이고 권력이고 다 갖다 바쳤었지.”
“…….”
“그렇게 온갖 풍파를 다 겪고 황제로 만들어 놓았더니, 성혼을 치르자마자 후처를 들일 줄 어찌 알았을까.”
나는 게임에서도 나오지 않았던 그의 배경에 숨을 죽였다.
칼리스토가 씁쓸하게 웃었다.
“나는 날 때부터 타인을 불신하고 한시적인 감정을 경계하라고 세뇌당하다시피 자라왔다. 그래서…….”
“…….”
“그래서 그런 얄팍한 말보다, 확실한 계약 관계가 더 나을 거라 판단했지. 내가 그간 느껴온 감정들을 입 밖에 쏟아내면…….”
“…….”
“그러면 그대와 끝이 생길 것 같았거든.”
그는 칼에 심장을 찔린 사람처럼 눈매를 찡그렸다.
무표정했던 내 얼굴에 서서히 금이 가는 게 느껴졌다.
감정을 고백하면, 나와의 인연에 끝이 생길 것 같아 두려웠다는 그의 말이 너무 아팠다.
“왜 이렇게 못난 표정을 지어.”
칼리스토가 그런 나를 보고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뺨을 어루만졌다.
“그간 뭘 느끼셨는데요?”
나는 억누른 목소리로 물었다. 그가 미간을 좁혔다.
“좀 쪽팔린 것들뿐인데…… 꼭 듣고 싶나? 내 면이 좀 상하는데.”
“더 상할 면도 없으시잖아요.”
“그건 그렇지.”
퉁명스럽게 쏘아붙인 말에 그가 의외로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 앞에선 더 상할 면도 없지…….”
그가 상념에 잠기듯 아득하게 말끝을 흐리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처음 미로 정원에서 그대를 본 순간부터였던가.”
썩 좋지 않은 서두였다.
“그대만 떠올리면 자꾸 웃음이 새어 나오더군. 회의하는 중에도 실없이 처웃어서 세드릭 포터가 몇 번이고 미친놈 보듯이 쳐다보곤 했었지.”
그러나 이어지는 말에, 나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초반엔 피차 서로 기억도 하기 싫어하는 사이였다고 생각했는데.
끔찍했던 첫 만남이 떠올라 오만상을 찌푸리는 나를 보며 칼리스토가 재밌다는 듯 히죽거렸다.
“그대가 별별 핑계를 대며 내 초대를 거절할 때마다, 점점 초조해지더군. 전장에서도 그런 적이 없었는데 말이야…….”
“…….”
“한 번만 더 얼굴을 마주하고 싶어서, 말 한마디 더 섞고 싶어서, 애송이처럼 안달을 내었지.”
그가 살살 내 볼을 꼬집으며 능글맞게 말했다.
“정말…… 놀랍네요.”
나는 생소한 기분으로 짤막하게 감상을 내뱉었다.
그가 초반부터 그랬다고는 전혀 생각지 못해서 그저 얼떨떨하기만 했다.
‘사냥 대회까지 분명 2%였잖아.’
그래서 그의 손에 죽기 싫어서 피하느라 사력을 다했었는데…….
황태자의 입을 통해 듣는 그 당시의 그는 이미 나를 죽일 생각 따윈 전혀 없던 것 같았다.
“……그대가 독을 마시고 죽기 직전에 이르렀을 땐.”
멍하니 눈을 깜빡이는 나를 보며 황태자가 덧붙였다.
그의 얼굴에 장난스럽게 맺혀 있었던 웃음이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할 수만 있다면 누워 있는 그대 대신 수십, 수백 번 독을 마시고 싶었다.”
“…….”
“그대가 싫어할 걸 알면서도, 그대의 침실에 들 땐 항상 검을 찼어.”
“……검이요?”
공작이 과연 허락한 걸까?
실없는 생각이 떠올랐을 무렵, 칼리스토가 대수롭지 않은 목소리로 답했다.
“혹여 그대의 숨이 멎으면, 곧바로 따라 죽을 수 있도록.”
사고가 우뚝 멈췄다.
“그게 무슨…….”
나는 내가 잘못 들었나 싶어서, 다시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좀 전과 다를 바 없이 무표정했다. 농담 삼아 과장한 말이 전혀 아니라는 듯.
나는 그의 팔목을 더듬더듬 붙들며 되물었다.
“왜…… 왜 그러셨어요? 왜, 왜 그런…….”
“그냥, 그러고 싶었으니까.”
태평한 대답에, 나는 왈칵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만약 내가 그때 독을 먹고 탈출에 성공했으면, 칼리스토는 스스로 목을 베었을까?
그 생각이 미치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황제가 되고 싶다면서요! 그런데 대체 왜 그런 바보 같은 짓을……!”
“……네가 없는 지옥에서 도저히 살아갈 자신이 없었어.”
그가 무뚝뚝하게 고백했다.
나는 이 미친놈을 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서, 연신 기가 찬 숨을 내쉬며 막막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화내지 마. 이미 지나간 일이니까.”
잘못은 아는지, 놈이 아까처럼 눈꼬리를 축 내렸다.
나는 그런 그를 황망히 바라보다가, 마구잡이로 뇌까렸다.
“……제가 너무 늦었다면요.”
“…….”
“너무 늦어서, 이제, 이제 더는 전하와 뭘 시작할 의욕도 엄두도 없다면요. 그럼 이제 어떡하실 건데요.”
그에게 상처를 주는 건 난데, 눈앞이 차차 흐려졌다.
황태자는 벼린 것처럼 날카로운 내 말에도 좋다고 처웃었다.
“쯧, 그대는 아무것도 몰라도 된다고 했잖아.”
그러면서 손을 움직여, 내 뺨에서 귀로 움직였다.
커다란 그의 손이 두 귀를 덮었다. 물에 잠긴 듯 먹먹했다.
“고양이보다 쥐 생각이나 더 하라 했지 않나? 그대는 하고 싶은 일만 해. 여기서 나가면, 지금 들은 얘기는 그냥 잊어.”
듣지 않아도 상관없는지 놈이 내 귀를 꽉 막은 채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그래도 다 들렸다.
나는 더 참을 수 없어 주먹으로 놈의 가슴을 ‘퍽!’ 때리며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이 미친놈아! 이런 걸 어떻게 잊어!”
“……윽, 공녀.”
“차라리 끝까지 말하지 말지! 지금 와서 이러면, 어떡하라고! 파트너 하자며! 내가, 내가 그때 무슨 마음으로……!”
소리를 지르며 놈의 가슴을 퍽퍽 때리던 나는 이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엉엉 울었다.
“공녀, 화났나? 왜, 왜 그래, 응?”
놈이 바보처럼 당황해서 허둥댔다.
온갖 감정이 해일처럼 몰아쳤다.
밉고, 원망스러웠다. 그토록 원하던 때엔 한 마디 해 주지 않던 놈이, 왜 이제야.
동시에 기쁘고 설렜다. 사랑한다는 말에, 등신처럼 가슴이 속절없이 떨렸다.
그리고 슬펐다. 이제야 그가 숨겨 온 비밀을 들었는데, 탈출할 방법을 알아서.
그를 받아 줄 수도, 온전히 기뻐할 수도 없는 내 처지가 너무 가엽지 않은가.
“내가 다 잘못했어. 그만 울어. 더 울었다간, 탈진할지도 몰라.”
우는 나를 보며 아까처럼 어쩔 줄을 모르던 칼리스토가 또다시 와락 나를 껴안았다.
그러면서도 쉴 새 없이 내 눈과 코를 닦아 주었다.
그게 또 서글퍼서, 나는 그의 품에 안겨 한참을 더 꺼이꺼이 울었다.
분명 슬퍼서 우는 건데, 이상하게도 점점 마음이 가벼워졌다.
나는 그의 말대로 더 울 힘도 없을 때까지 쏟아내다가, 힘겹게 눈물을 멈췄다.
내 체액으로 갑옷 한쪽이 엉망이 되었는데도, 칼리스토는 나를 밀어 내지 않았다.
나는 어리광을 부리듯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천천히 호흡을 골랐다.
“……저는, 저는 전하께서 원하는 대답 못 해드려요.”
“괜찮아.”
듣기는 한 건지, 황태자가 즉답했다.
나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이내 어렵사리 다시 꺼냈다.
“원하는 거 다 이뤄 주겠다고 하셨죠.”
“응.”
“제가 앞으로 하려는 일은 전하께서 납득하기 힘든 일일 수도 있어요.”
용기 내서 큰마음 먹고 말한 건데, 머리맡에서 나직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대가 실은 공녀가 아니라는 얘기보다 더 할까.”
“그건 진짜라고요!”
“누가 뭐래? 스읍, 분위기 좋은데 버둥대지 마.”
“윽! 숨, 숨!”
발끈해서 몸을 일으키려는 나를 놈이 저지하며 꽉 끌어안았다.
나는 답답해서 퍽퍽 놈의 가슴을 내려치다가, 이내 체념하고 몸을 늘어뜨렸다.
황태자는 그제야 나를 터뜨릴 듯 압박하던 팔에서 힘을 뺐다.
그에게 몸을 기댄 채로, 나는 더듬더듬 바닥을 훑었다.
얼마 가지 않아 딱딱한 봉의 감촉이 손에 닿았다. 나는 그걸 쥐고 칼리스토에게 보여 주었다.
“저…… 이제 이걸로 이본 년 죽일 거예요.”
“이본?”
“에카르트 공작님의 친딸이요.”
그가 눈썹을 까딱이며 내 패기 어린 말에 짧게 감탄했다.
“그런데, 패 죽일 거면 그것보단 강철 방망이 같은 게 더 낫지 않겠나?”
매를 버는 주둥이에, 또 한 번 ‘퍽!’ 하고 가슴팍 내리치는 소리가 오갔다.
‘아야, 역시 패 죽일 생각이었군.’ 하고 엄살을 부리며 놈이 끝까지 지껄였다.
나는 장난스러움이 서린 훤칠한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내뱉었다.
“그 일이 다 끝나면, 더는 함께할 수 없을지도 몰라요.”
“…….”
“그래도…… 그래도 절 사랑하세요?”
“그건 좀 아픈데.”
황태자가 콧잔등을 찌푸렸다.
매번 그를 시험하는 걸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찰나 나는 그의 반응이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어 불안으로 벌벌 떨었다.
하지만 결국 다 부질없는 짓거리였다.
“괜찮아. 네가 어디로 사라지든 내가 오늘처럼 쫓아갈 테니까.”
“…….”
“사랑해, 페넬로페 에카르트.”
칼리스토는 변함없는 얼굴로 같은 말을 반복했다.
나는 또다시 숨을 멈췄다.
그러다 이내 심장이 터져 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상체를 불쑥 들어 올렸다.
“읏…….”
박치기라도 하는 듯한 내 돌진에 칼리스토의 얼굴이 뒤로 밀렸다.
동시에 뜨끈한 온기가 담긴 말캉한 것이 입술에 닿았다.
키스 따위 해 본 적이 없어서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바보처럼 두 눈을 꾹 감은 채, 그저 막무가내로 입술을 맞부딪히자, 남자의 몸이 움찔 굳었다.
그러나 그도 잠시였다. 허리를 휘감고 있던 팔이 허겁지겁 위로 올라왔다.
커다란 손이 와락 뒤통수를 붙잡더니, 나는 그대로 그에게 잡아먹힐 듯이 질질 끌려갔다.
황태자는 며칠 굶은 사람처럼 정신없이 내 입술과 입술 주변의 살을 빨고 핥았다.
물기 어린 두꺼운 타인의 혀가 거칠게 입술 사이를 뚫고 들어와 얽고 휘저었다.
츄웁, 춥-.
살이 맞부딪히는 질척한 소리는 그로부터 한참 동안 이어졌다.
첫 키스의 맛은 남들이 말하는 것처럼 달았다.
너무 달아서, 자꾸 눈물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