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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엔딩은 죽음뿐-202화 (202/243)

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202화

* * *

나는 거울 봉을 든 채 황태자와 고대 레일라들의 음침한 신전, 아니, 무덤을 빠져나왔다.

“얄라 불라 아르띠노!”

그리고 미친 것 같은 주문을 외워 텁텁한 사막을 벗어나, 섬의 가장자리인 해안 근처로 이동했다.

“우리 이제 여기서 어떻게 나가죠?”

끝없는 망망대해를 바라보자니 막막함에 잠겼다.

오는 것에만 치중한 나머지, 섬을 빠져나갈 준비를 전혀 하지 않은 것이다.

“글쎄. 난 이대로 그대와 여기서 사는 것도 나쁘지 않겠는데.”

걱정하는 나와는 달리 황태자는 고민 한 점 없는 얼굴로 개소리를 지껄였다.

장난스럽게 말하던 그의 얼굴에서 일순 웃음이 사라졌다.

- 그러니까…… 돌아갈 생각 말고 여기 있으면 안 되나?

레일라의 무덤에서 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가 무엇을 원하고 그런 말을 하는지 알아서.

“……제발, 그런 헛소리는 그만하시고요.”

표정이 사라진 그 대신 나는 애써 불퉁한 표정으로 툴툴댔다.

내 말에 황태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헛소리야?”

“주변 좀 둘러보세요. 아무것도 없는데 여기서 어떻게 삽니까?”

“걱정 마. 굶어 죽게 하진 않을 테니까. 내가 또 사냥을 꽤 하거든. 생선, 좋아하나?”

“싫거든요!”

나는 놈의 말에 진저리를 치며 빽 소리를 쳤다.

뒤늦게 피식, 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찰나, 나는 크게 안도했다. 그리고 착잡한 마음을 숨긴 채, 그를 돌아보며 말했다.

“……전하라도 먼저 가세요.”

“음?”

“위급 시에 황궁으로 소환되는 마법 있잖아요. 그걸로 먼저 가신 후에 저 데리러 와 주시면 되잖아요.”

황가의 피가 흐르는 자에 한해서만 걸려 있는 마법인지라, 같이 갈 수 없었다.

일전에도 홀로 사라졌던 황태자를 떠올리며 나는 수를 냈다.

내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짓던 황태자는 ‘무슨 소린가 했더니’ 하는 표정으로 답했다.

“못 가.”

“왜요?”

“말했잖아. 이 주변에 강력한 마법 결계가 쳐 있어서 한 번도 잠입에 성공한 적 없다고. 소환마법도 결계를 뚫어야 가능하지.”

“아.”

잊고 있었던 사실이 떠올라, 나는 잠시 멍청한 소리를 냈다.

그의 말에 시선이 거칠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럼…… 우리 진짜 여기 갇힌 거예요?”

“뭐, 그렇게 된 셈이지. 그대가 좋아하는 생선 파티를 열 수 있겠군.”

정말로 여기서 살 셈인 양 황태자 놈이 모래사장에 털썩 자리를 깔고 앉았다.

“그럼 알면서……!”

그걸 알면서도 한마디 없이 따라온 거냐고.

그의 기행에 기가 막혀서 버벅대고 있을 무렵이었다.

“서 있지 말고 앉아. 목 아프니까.”

황태자가 슬쩍 내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지금 그렇게 태평하게 앉아 있을 상황이냐고 버럭 소리를 치려던 나는, 이내 입을 다물고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따지고 보면 급할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언제가 됐든, 결국 이본만 처치하면 끝나는 일 아닌가.

‘황태자가 사라졌으니 누군가 데리러 오긴 하겠지.’

그사이 공작저가 어떻게 되든 말든…… 내 알 바 아니었다.

초조함이 사라지자, 평온이 찾아왔다.

쏴아아, 쏴아아아-. 파도 소리를 들으며 멍하니 해안선 너머를 바라보던 나는 문득 입을 열었다.

“전하.”

마찬가지로 무표정하게 바다 너머를 바라보고 있던 칼리스토가 내 부름에 고개를 돌렸다.

“혹시, 황금룡의 송곳니가 황궁 어디에 있는지 아세요?”

“황금룡의 송곳니?”

뜬금없는 질문이었는지, 황태자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물어볼지 말지 좀 고민했다.

그러나 직접 찾아 헤매는 것보다 곁에 있는 황궁 출신에게 그냥 직접 물어보는 게 더 현명한 것 같았다.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자, 칼리스토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건 왜? 황제의 보물인데.”

“보물…… 이요?”

“그래. 그걸 가지고 있어야만 제국의 황제라는 것을 입증할 수 있지.”

칼리스토는 선선히 답했다.

‘옥새, 뭐 그런 건가?’

“그대도 제국의 건국 설화 정도는 알 것 아니야. 아, 그대는 사실 공녀가 아니니까 모를 수도 있겠군.”

대체 놀리는 건지 아닌 건지, 모호한 어투로 놈이 말을 이었다.

“고리타분한 얘기지만, 제국의 시초에 악으로부터 인간들을 돌봐 준 황금룡이 황궁 아래 잠들었다는 건국 설화가 있다.”

결국, ‘황금룡의 무덤’이란 황궁이란 소리다.

여기까진 이미 추측한 바라 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용은 영면에 들기 전 후손에게 송곳니를 주었다더군. 그는 최초의 황제가 되었고, 그게 지금까지 이어진 거야.”

“그렇군요.”

“신비한 힘이 깃들어 있다고 하여 송곳니는 황제가 늘 지니는 보주(imperial orb)에 숨겨져 있지. 황족들만 아는 극비 사항이다.”

마지막으로 덧붙여진 말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런 거…… 막 알려 줘도 돼요?”

“왜. 그걸 묻는 걸 보니 송곳니를 가져서 황제를 갈아 치울 생각 아니었나?”

황태자가 웃음기가 가득 담긴 얼굴로 되물었다.

“그런 거 아니에요.”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답했다.

“……아무래도 레일라가 그걸 노리는 것 같아서요. 앞으로 황제 폐하께서 위험에 처하실 수도 있으니 물어본 거예요.”

그럴듯한 변명에 황태자는 생뚱맞은 소리로 답했다.

“그래. 그럼 황제는 내가 죽일 테니, 그대가 레일라를 죽이고 송곳니를 가져서 황제가 되면 되겠어.”

“전하, 좀!”

“그대가 새 왕이 되면 난 국서를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해.”

“그것도 여기서 나가야 가능하죠!”

또 미친 소리를 주절대는 놈의 말에 나는 오만상을 찌푸렸다.

“그건 또 그렇군.”

진심인지 칼리스토 놈이 진중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앓느니 죽지.’

나는 반쯤 해탈한 채 놈에게서 고개를 돌려 바닷가를 바라보았다.

“……이쯤 됐나?”

그때였다. 그가 무어라 작게 중얼거리는 순간.

부우우우웅, 부우우우웅-.

불현듯 어디선가 귀에 익은 강한 진동음이 울려 퍼졌다.

깜짝 놀라 황태자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그가 태연하게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통신 마법이 걸린 수정구였다.

“오랜만이군, 세드릭 포터.”

「전하! 대체…… 기습 작전 앞두고 어딜 가신 겁니까-!」

칼리스토가 인사를 끝내기가 무섭게 거의 비명과 다름없는 보좌관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어떻게…….”

나는 영문을 알 수가 없어 멍하니 황태자가 든 수정구를 바라보았다.

‘분명 결계 때문에 마법은 아무것도 안 된다며?’

그러나 생각에 잠길 틈도 없이 세드릭의 원망이 쏟아졌다.

「반란군은 코앞을 지나가고 있지, 갑자기 지휘관이 사라져서 병사들은 모두 우왕좌왕하지! 자칫하면 작전이 모두 물거품 될 뻔했……!」

“그래서, 패했나?”

황태자가 따분한 표정으로 보좌관의 말을 끊고 결과부터 물었다.

세드릭이 이를 부득부득 갈다가 답했다.

「……승리했습니다.」

“잘했군, 세드릭 포터. 난 그댈 믿었어.”

「제발, 전하! 전하 때문에 저 이러다 언제 심장마비로 죽을지 모릅니다. 제게 자비를 좀……!」

“지금부터 그대에게 지휘 전권을 넘기지. 이제 나한테 의존할 생각만 하지 말고 이번 전투처럼 직접 해 보라고. 난 무척 바쁘니까 말이야.”

그 무책임한 말에 수정구 너머에서 난리가 났다.

그러나 귀가 따가운지 황태자가 그것을 멀리 쳐든 탓에 세드릭이 무어라 말하는지 잘 들리지 않았다.

「……반란군은 국경 너머까지 퇴각했습니다.」

한참 후 세드릭이 전투 진행 상황을 전했다.

황태자의 옆에서 엿듣던 나는 내심 안도했다.

“영 쓸모없는 새끼들만 제국에 있는 건 아닌 모양이야.”

「하지만 아직 안심할 단계가 아닙니다. 크로니아도 모자라 지금 그쪽에 델만 잔당…….」

“쓰읍, 쓸데없는 것까지 일일이 전달할 필욘 없고.”

그래도 아예 무책임하게 전투를 내팽개칠 생각은 아니었는지, 묵묵히 상황을 전달받던 황태자가 불쑥 보좌관의 말을 끊었다.

‘……응?’

마지막 말에 문득 낯설지 않은 단어가 귀에 스쳤다.

그러나 칼리스토가 더 중요한 사항으로 화두를 돌려서 깊게 생각할 틈이 없었다.

“마법사들 불러서 소환 마법 좀 하라고 해. 참고로 두 명이야. 나와 공녀.”

「뭐, 뭐라고 하셨습니까, 전하?! 그럼 또 공녀님 때문에……!」

“그럼 수고.”

뚝. 무어라 소리치는 세드릭의 목소리가 이어졌지만, 황태자는 매정하게 통신 마법을 끊어 버렸다.

“곧 수도로 돌아갈 거야.”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그를 보며 나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 결계 때문에 마법 못 쓴다면서요.”

“그대가 거울을 깨부순 후부터 섬 결계의 마력이 점점 약해지는 거 같더군.”

돌아온 답에 나는 경악했다.

“그럼 설마…… 여태까지 저 놀린 거예요?”

“이제 눈치챘나?”

“진짜, 이런……!”

미친놈아!

능글맞게 웃고 있는 놈을 보며 나는 주먹을 꽉 쥐고 부들부들 떨었다.

아까처럼 한 대 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애석하게도 엉엉 울부짖으며 이성을 잃고 행동하는 건 한 번으로 족했다.

‘참아. 넌 저놈과 달리 지성인이야.’

그렇게 자기 세뇌하며 분노를 내리누르고 있을 때였다.

“너무 화내지 마, 공녀.”

“…….”

“돌아가면 이렇게 단둘이 있을 시간도 없을 거 아니야.”

그걸 말이라고 하냐고, 받아치려던 나는.

그 순간 올려다본 그의 표정을 보고 벌렸던 입을 천천히 다물었다.

칼리스토는 힘겹게 입꼬리를 끌어 올린 괴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대가 고고학자를 꿈꿨던 것처럼, 나도 짧은 시간 동안 꿈을 꾸었다고 여겨 달라고.”

나는 다시 한번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둘이 살자느니, 생선 파티를 열자니, 하는 그 미친 소리들이 전혀 농담이 아니었음을.

“가지.”

그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 손을 한참 바라만 보다가, 천천히 마주 잡았다.

얼마 후 소환 마법이 실행됐는지, 우리 주변으로 황금색 마법진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그와의 짧은 여행은 그렇게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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