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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엔딩은 죽음뿐-203화 (203/243)

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203화

* * *

환한 빛이 눈을 점령하고, 얼마 후 다시 눈을 떴을 때.

어느새 바다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우리는 맹그로브가 사방에 깔린 늪지대 한가운데에 우뚝 서 있었다.

“어…….”

기껏해야 트라탄으로 돌아갈 줄 알았던 나는 당황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영문을 모르는 건 마찬가지인지, 칼리스토 또한 오만상을 찌푸린 채 주변을 휙휙 둘러보았다.

그때였다.

“전하-!”

멀리서 무장을 한, 서른여 명의 기사들이 힘겹게 넝쿨들을 잘라 내며 다가왔다.

다행히 선두에 아는 얼굴이 서 있었다.

“오셨습니까, 전하. 오랜만입니다, 공녀님.”

우리에게 도달한 황태자의 보좌관이 거친 숨을 내쉬며 나지막이 인사했다.

미처 답하기 전에 황태자가 사납게 물었다.

“여기가 어디지?”

“국경 근처 보폴리아 숲 늪지대입니다.”

“누가 그거 물어봤어? 왜 여기로 소환을 했느냐고, 세드릭 포터.”

“……예? 소환마법을 실행하라고 하셨지 않습니까?”

“눈치껏 공작가로 보냈어야 할 거 아니야. 그렇게 주변머리가 없어서 전쟁은 어떻게 하나?”

“하, 하지만…… 황궁에 남아 있는 마법사들은 황제 폐하 휘하인 자들이 답니다.”

“그럼 어디 마을이라든지, 안전한 곳으로 했어야지. 이게 뭐야.”

칼리스토는 황족이라고는 볼 수 없을 만큼 상스럽게 진흙 바닥을 걷어찼다.

나는 질색을 하며 모르는 사이처럼 멀찍이 떨어져 섰다.

“아, 아니 그게…….”

하란 대로 했을 뿐인 세드릭이 안쓰러울 만치 당황했다.

꼭 빙의 초기의 내 모습을 보는 거 같았다.

‘하여간 제일 못돼 처먹었어.’

금빛 머리를 흘끔거리며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중, 세드릭이 울컥한 얼굴로 대꾸했다.

“장거리 소환마법을 할 줄 아는 마법사들이 지천에 깔린 줄 아십니까, 전하?”

“여기로 오자마자 기습이라도 당해서 공녀가 다치기라도 했으면, 네가 책임질 건가? 어?”

불현듯 황태자 놈이 동문서답했다.

‘뭐야, 왜 갑자기 나를 끌어들여?’

나는 흠칫해서 그들을 돌아보았다. 세드릭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러나 그것에 그치지 않고 황태자 놈이 폭탄선언을 내뱉었다.

“아, 모두 모인 김에 인사나 하지. 예비 황태자비이니 목숨을 바쳐 지켜라.”

나는 그야말로 입을 떡 벌렸다.

“뭐야? 전하께서…… 갑자기 결혼을?”

“이거 꿈 아니지?”

“우리 전하를 받아 주겠다는 여성분이 계시다니…….”

세드릭의 뒤에 줄지어 있던 기사들이 순식간에 술렁거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내 하나둘 꾸벅 허리를 숙이며 인사하기 시작했다.

“안녕하십니까, 비 전하!”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황태자비 전하! 만만세!”

환장스럽게 돌아가는 상황에 미친 듯이 시야가 흔들렸다.

그런 나와는 달리 황태자는 인사하는 제 부하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다,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공녀, 이놈들은 나와 같이 몇 년간 전쟁터에서 구르던 놈들이야. 앞으로 자주 볼 테니 얼굴쯤은 익혀…… 고, 공녀! 어디 가?”

나는 놈의 막말을 더 듣지 못하고 휙 몸을 돌려 마구 걸었다.

그러나 순식간에 겅중겅중 뛰어와 앞을 막아선 황태자로 인해 다시 멈출 수밖에 없었다.

“얼굴이 왜 이렇게 빨개?”

놈이 불쑥 내 얼굴로 손을 뻗었다. 나는 그 손을 찰싹 소리 나게 쳐 내고 말했다.

“자꾸 이상한 소리 하실 거면, 동행은 없었던 걸로 해요. 저 혼자 알아서 갈 겁니다.”

“이상한 소리라니? 안전을 위해 앞으로 그대의 아랫사람 될 이들한테 주의를 준 것뿐…….”

“입, 입!”

나는 놈을 내려친 손으로 그의 주둥이를 틀어막았다.

잠시 주춤하던 칼리스토의 눈이 반달로 예쁘게 휘었다.

“아, 비밀 연애였나? 미안하군.”

“제가 언제……!”

“화내지 마. 앞으로 보안에 신경 쓰지. 응?”

“허!”

칼리스토가 슬슬 내 눈치를 보며 제 입을 틀어막고 있는 내 손을 내렸다.

나는 기가 막혀 연신 헛바람을 터뜨렸다.

‘내가 언제 너랑 연애한다고 했어?!’

오히려 모든 게 끝이 나면 함께 할 수 없다는, 단정적인 소리만 했다.

“미안해, 여기로 데려와서.”

그러나 화를 내는 나를 보며 조심스럽게 내 손을 만지작거리는 손길에, 차마 내가 언제 그랬냐고 따지고 들지 못했다.

가슴이 울렁였다.

그러다 퍼뜩, 묘한 시선이 우리에게 꽂혀 있음을 깨달았다.

“흠, 흠! 아무튼, 이제 수도로 어떻게 돌아가는데요.”

나는 황급히 그에게 잡힌 손을 빼내고 그에게서 훌쩍 떨어졌다.

“공녀님, 혹시 단둘이 계실 때 전하께 협박을 당하셨습니까?”

그 와중에 세드릭이 내게 다가와 목소리를 죽이고 물었다.

“네? 무슨…….”

“그렇다면 헛기침을 두 번 해 주십시오. 제가 어떻게서든…….”

“세드릭 포터, 헛소리 그만하고 내 약혼녀에게서 떨어지지.”

귀신같이 알아들은 건지, 황태자가 음산하게 중얼거리며 턱을 까딱였다.

슬프게도, 세드릭은 찍소리도 못하고 군기가 바짝 든 채 내게서 물러났다.

“일단 상황부터 보고해.”

“어제 오전 대규모의 반란군 보급품이 이곳을 지나갈 예정이라는 첩보를 입수했습니다.”

“뻔한 놈들. 예상대로군.”

황태자가 날카로운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 또한 덩달아 주변을 둘러보았다.

끝도 없이 펼쳐진 축축한 늪지대에는 몸을 숨길 만한 조형물이 아무것도 없었다.

전투 장소로는 걸맞지 않았다.

‘어떻게 보급로를 끊지?’

의문점은 이어진 세드릭의 말로 해결할 수 있었다.

“다인 이동 마법을 실행할 수 있는 마법사 둘과 정예군들만 이동하여 투명화 마법을 시전한 상태로 숨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빠르게 작전을 성공한 후 진영으로 돌아가서 전하와 공녀님을 소환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세드릭은 긴장한 얼굴로 덧붙였다.

“두 시간째 보급품이 오지 않고 있습니다.”

“진영으로 왜 바로 돌아가지 않았지?”

황태자가 눈살을 찌푸린 채 반문했다. 세드릭이 어물어물 답했다.

“늪지대인지라 행군이 늦어지는 줄 알고 기다리는 동안 마력 소모로 인해 마법사들이 지쳤습니다.”

“그럼 돌아간 후에 우릴 소환했어야 할 거 아니야.”

“와, 그럴 시간은 주셨습니까?”

세드릭이 퍽 억울한 얼굴로 호소했다.

“당장 소환하지 않으면 거기 있는 모래와 바다를 퍼다가 전쟁 내내 네 주식으로 주겠다는 둥…… 공녀님, 정말로 협박당하신 거 아닙니까?”

“스읍.”

그러나 세드릭의 불쌍한 음성은 사납게 눈을 부라리는 황태자의 흉흉한 얼굴로 일단락되었다.

나는 좀 미안한 눈으로 훌쩍이는 세드릭을 보았다.

뙤약볕이 쨍쨍 내리쬐는 아르키나 제도에서 빨리 나가고 싶어서 칼리스토를 재촉한 게 나였기 때문이다.

‘어쩐지. 왜 자꾸 통화를 멀리 가서 하는 건가 했더니…….’

성격 파탄자답게 제 보좌관을 협박 중이었던 것이다.

빨리 나가게 해 준 것을 과연 감사해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어서, 기가 막힌 눈으로 황태자를 응시할 때였다.

“……지나치게 뚫려 있는 곳이야.”

우리를 제외하고 고요하기 그지없는 늪지대를 둘러보던 황태자가 불쑥 내뱉었다.

“두 시간이면 놈들도 작전을 변경했을 확률이 크겠군. 철수 준비해.”

“하, 하지만……… 예상 오차 시간은 세 시간 내외입니다. 늪을 자주 오간 이에게서 들은…… 전하.”

세드릭이 무어라 대꾸했으나, 칼리스토는 그를 무시한 채 기사들을 가로질렀다.

젊은 황궁 마법사 두 명이 화려한 지팡이에 기댄 채 헐떡이고 있었다.

“이봐, 언제쯤 이동 마법을 다시 쓸 수 있지?”

황태자는 거침없이 그들에게 다가가 물었다.

“소, 소환마법을 쓴 지 얼마 안 된 데다가, 인원이 꽤 많아서…….”

“그래서.”

어두워지는 황태자의 얼굴에 마법사들이 단숨에 사색이 되어 허겁지겁 답했다.

“하, 한 시간 정도만 더 휴식하면 될 것 같습니다.”

“인원이 적으면? 바로 가능하나?”

“저 혼자선 두, 두세 명 정도는…….”

“그럼 공녀 먼저…….”

“저 괜찮아요!”

나는 벌어지는 칼리스토의 입에서 무슨 말이 튀어나올지 예상하고 먼저 선수 쳐서 소리쳤다.

“한 시간 정도는 기다릴 수 있어요. 그쵸, 세드릭?”

“물론이지요, 공녀님!”

곧 졸도할 사람처럼 한순간 희게 질렸던 세드릭의 얼굴이 눈에 띄게 환해졌다.

황태자만이 불만스러운 얼굴로 눈썹을 꿈틀거렸다.

“뭐 하는 짓이야? 먼저 돌아가. 그대는 할 일이 있잖아.”

“전하야말로 무슨 짓이에요? 저 먼저 가면, 나머지 사람들은 언제 돌아갈 줄 알고요.”

나는 황태자의 사나운 기세에 굴하지 않고 대꾸했다.

“가서 마법사 또 한 명 데리고 오라고 하면 되지.”

마법사가 무슨 소모품이라도 되는 양 면전에다 대고 뻔뻔하게 말하는 그의 모습에 나는 오만상을 찌푸렸다.

“제발 좀! 안 그래도 폐 끼쳐서 창피해 죽겠는데, 그만 좀 하세요.”

“뭐가 창피해?”

“전하께서 자꾸 저 싸고도는 짓이요! 다들 이상하게 쳐다보잖아요!”

“누가 감히.”

사람이 이렇게 철면피일 수가 있을까.

나를 걱정하다 못해 유난을 떠는 황태자의 모습에 서른여 명의 사람들이 모두 낯선 눈으로 황태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벌게진 얼굴로 짜증스럽게 읊조렸다.

“한 시간 정도잖아요. 도움받는 처진데, 그냥 있다가 같이 가요.”

“오. 벌써부터 아랫사람들을 챙기는 건가? 내가 어진 비를 얻었군그래.”

“…….”

나는 그냥 무시하기로 결심했다. 삐딱하게 선 채 먼 산을 바라보고 있자, 황태자가 누그러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느낌이 별로 좋지 않아.”

“걱정 마세요. 제 몸 하난 제가 지킬 수 있으니까.”

“혹시라도 그대가 다치면.”

그가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이었다.

“내가 너무 괴로울 것 같아서 그래.”

그 말에 말문이 막혔다.

나는 조금 뒤에 아무렇지 않게 입을 열었다.

“……그쪽도 계획을 변경했을 거라면서요? 아무 일도 없으니까, 가만 좀…….”

가만히 좀 있으라고 대꾸하려던 나는 불현듯 입을 다물었다.

휘이이잉- 바람의 세기가 바뀌었다. 그와 동시에 조금 이상한 기운이 느껴졌다.

바람인데, 바람은 아니고 꼭 무형의 움직임처럼…….

“까아아악-!”

푸드더덕-!

그때 먼 곳에 있는 늪지대의 끝, 숲에서 한 무리의 새 떼들이 일제히 날아올랐다.

스르렁 -.

심상치 않은 것을 느낀 것은 마찬가지인지, 기사들이 하나둘 검을 빼 들었다.

“반경 2m 내에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습니다.”

기사 한 명이 긴장한 얼굴로 보고했다.

그 말대로 뻥 뚫린 늪지대 주변에는 우리를 제외하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너, 방어 결계 칠 수 있나?”

황태자가 옆에 있던 마법사 한 명에게 물었다.

“예, 예! 하, 하지만 오래 버티긴 어렵습니다. 마나가…….”

“지금 해.”

부정의 말은 듣지 않겠다는 듯, 그는 냉정하게 등을 돌려 또 다른 마법사에게 명령했다.

“넌 당장 공녀 데리고 진영으로 돌아가도록.”

“전하!”

방금 전에 간신히 끝낸 이야기를 도로 끌고 온 황태자의 말에 나는 당황했다.

“하, 하오나 저는 전투 시에 투명 마법을 걸어야 합니다만…….”

“됐으니까, 당장 공녀를 안전한 곳으로 모셔.”

“저 괜찮아요!”

“뭐 해? 빨리 데리고…….”

그때였다.

“전하!”

누군가 다급하게 칼리스토를 불렀다.

“사, 상공입니다! 상공에…… 마, 마물 떼가 나타났습니다!”

그 말에 황태자도, 나도 반사적으로 휙 고개를 위로 쳐들었다.

“저게……!”

스륵 입이 벌어졌다. 마치 익룡처럼, 엄청난 크기의 새 마물들이 벌떼같이 몰려오고 있었다.

“끼룩, 끼루루룩-!”

수많은 그림자가 순식간에 다가와 머리맡을 정신없이 덮쳤다.

새 마물들은 놀랍게도 불을 뿜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불길이 닿지 않았다. 방어 결계 덕분이었다.

옆을 돌아보니, 황태자가 결계를 치라 명했던 젊은 마법사가 낯빛이 허옇게 질린 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마나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말이 사실인지, 불이 닿을 때마다 투명한 방어막이 위태롭게 일렁거렸다.

그러나 끝내 뚫리지 않고 버텨 내자, 새들은 더 불을 뿜지 않고 방향을 바꿔 높게 날아올랐다.

“무슨…….”

갑자기 트인 하늘에, 모두가 영문 모를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을 무렵.

피융-.

먹구름처럼 높이 오른 새 떼들로부터 문득 비가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쏴아아아아-.

수많은 빗줄기. 아니, 빗줄기를 닮은 화살들이 우릴 향해 맹렬하게 내리치는 동시에.

“델만 군이다!”

누군가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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