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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엔딩은 죽음뿐-204화 (204/243)

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204화

“공녀!”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던 무렵, 칼리스토가 거칠게 나를 잡고 끌어안았다.

완전히 나를 감싼 그 때문에 위가 잘 보이지 않았다.

콱, 콰악-!

마법사가 펼친 방어 결계 위로 수백 개의 화살들이 꽂혔다.

허공이 위태롭게 일렁였다.

간신히 화살 세례를 막아 내는 듯해 보였지만, 착각이었다.

견고하지 못한 결계는 금방 틈이 생겼다. 그것을 뚫고 하나, 둘 화살들이 날아왔다.

쐐액-!

“윽!”

채앵-! 대부분이 재빠르게 방패와 검으로 쳐 냈지만, 피하지 못한 몇몇 기사들이 화살에 맞았다.

“아악!”

내 옆에서 바들바들 떨며 방어 마법을 시전하던 마법사가 어깨에 화살을 맞고 쓰러졌다.

순식간에 결계가 파훼됐다.

화살 세례가 멈추자 소강상태가 찾아왔다. 그러나 아주 잠깐의 틈이라는 걸 잘 알았다.

챙, 채앵-!

“제기랄!”

재차 날아오는 화살들을 쳐 내며 황태자가 거칠게 소리쳤다.

“공녀, 지금이야! 이놈이랑 숲 쪽으로 뛰어, 어서!”

칼리스토는 옆에 몸을 말고 쭈그려 앉아 있는 다른 마법사 한 명을 거칠게 일으켜 세운 후 내 등을 떠밀었다.

“너, 책임지고 안전한 곳까지 공녀를 이동시켜라. 네 손에 황태자비의 목숨이 달렸다. 알겠나?”

“예, 예, 예!”

마법사가 고깔모자를 정신없이 흔들었다.

“전하! 놈들이 두 번째 사격 준비 중입니다!”

용케 멀쩡한 세드릭이 절박하게 소리쳤다.

“원형 대열!”

“예! 전군, 전하를 중심으로 원형 대열!”

과연 황태자의 정예군들은 기습에도 당황하지 않고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순식간에 나와 황태자를 중심으로 몰려든 기사들이 방패를 위로 쳐들었다.

그러나 이런 대열도 얼마 가지 못할 것은 자명했다.

경사조차 없는, 사방이 훤히 뚫린 늪지대는 숨을 곳도 없었다.

게다가 발이 푹푹 빠져 빠른 이동조차 힘들었다.

상공에서 화살을 퍼붓는 적. 몰살을 위한 완벽한 함정이었다.

“가, 가셔야 합니다, 공녀님!”

“뭐 해? 얼른 가!”

선뜻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연신 머뭇거리는 나를 보며 칼리스토가 윽박질렀다.

‘그럼 전하는요?’ 하는 소리가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곁에서 돕고 싶은데, 마법을 쓸 수 있다고 쥐여 준 거울 봉은 아무런 기척도 내지 않았다.

기억하는 몇 가지 끔찍한 마법 주문들을 작은 소리로 읊어 봤지만, 감감무소식이었다.

‘이 미친 시스템아, 마물들 나타났잖아. 왜 마법 못 쓰는 건데!’

나는 안절부절못한 채 그저 황태자가 떠미는 대로 주춤주춤 물러서고 만 있었다.

그때였다.

“전하! 놈들이 갑자기 사격을 멈췄습니다!”

“마물 떼가 둘로 나뉘어집니다!”

“끼루우우욱-!”

기사들의 연이은 보고와 함께 새 마물들의 울부짖음이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나는 방패에 시야가 가려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도 몰랐다.

문득 뜨거운 열기를 동반한 바람이 불어 닥친다고 느꼈을 땐, 이미 상황은 끝난 후였다.

“불이다! 피해!”

불을 내뿜으며 엄청난 속도로 날아온 몇 마리의 마물들로 인해 철옹성처럼 꽁꽁 뭉쳐 있던 대열이 흐트러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폭발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주변이 확 뚫렸다.

“끼루우우욱-!”

뚫린 대열 사이로 또 한 번 마물들이 불을 뿜으며 전속력으로 날아왔다.

“으아아악!”

내 옆에 서 있던 황궁 마법사가 다가온 마물의 발톱에 잡혀 순식간에 사라졌다.

“빌어먹을! 고개 숙이고 있어, 공녀!”

풀썩- 머리 위로 묵직한 것이 떨어져, 원치 않아도 절로 몸이 숙여졌다. 황태자의 망토였다.

“전하!”

깜짝 놀라 그를 불렀다. 그러나 걱정은 기우였다.

“으악!”

발톱을 세우며 다가온 마물을 능히 피한 칼리스토는 날개를 베고 그 위에 올라타 있는 적을 죽였다.

주변을 둘러보니 다행히 그의 부하들도 능히 싸우며 적들을 죽이고 있었다.

챙, 챙! 쇠붙이가 맞부딪히는 소리와 사람들의 비명이 연달아 울려 퍼졌다.

피 튀기는 늪지대 한가운데 멀뚱히 서 있는 건 나뿐이었다.

또 한 번 마물 위의 적을 베어 낸 황태자를 바라보던 나는, 문득 위화감을 느꼈다.

‘그런데, 왜 사격을 멈추었지?’

상공에서 화살을 쏴서 손쉽게 멸살시킬 수 있던 전술이 지저분한 육탄전으로 바뀌었다.

게다가 나뉜 또 한 무리의 적군은 여전히 상공에서 대기 중이었다.

‘시간차 공격인가? 마물들만 조지면 싸울 수 있을 것 같은데…….’

대열이 모두 흐트러진 채 거의 일방적으로 당하고 있는 기사들을 보며, 나는 다시 작게 “썬더피룸.”을 중얼거렸다.

부질없는 짓이었다.

답 없는 거울 봉을 향해 나지막이 욕설을 내뱉던 찰나였다.

“공녀!”

마물을 죽이고 떨어진 적군에 칼을 박아 넣던 황태자가, 일순 눈을 부릅떴다.

피해.

그가 옆을 눈짓하며 다급하게 내게로 달려오는 모습이 천천히 흘러갔다.

그를 따라 무심코 고개를 돌렸을 때, 시야에 가득 들어찬 것은 엄청난 속도로 다가오고 있는 괴수의 발톱이었다.

“읏…….”

나는 반사적으로 거울 봉을 두 손으로 들고 앞을 막았다.

그러나 지척에 다가온 마물의 발톱은, 마치 내가 목표가 아니라는 양 코앞에서 방향을 꺾었다.

그리고 가려진 마물의 대가리 뒤로 불쑥 팔이 튀어나왔다.

휘익-.

나는 비명도 지를 새 없이 그 팔에 낚여 마물 위로 솟구쳤다.

놀라서 얼어붙은 몸이 타인의 단단한 품으로 꽉 끌어 안겨졌다.

“찾았다.”

머리맡으로 축축하고 음울한 속삭임이 떨어졌다.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나를 낚아챈 이는, 이곳에 있으리라곤 전혀 예상치 못한 남자였다.

“이…… 이클리스……?”

“……주인님.”

무기질적인 눈동자가 나를 담았다.

“너, 왜…….”

공작가에 있어야 할 네가 왜 여기 있는 거냐고.

반사적으로 물으려던 순간.

기억의 한 조각이 벼락같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 북방으로 가. 가서 반란군들과 접촉해. 황태자를 죽이고, 네가 제국의 주인이 되는 거야.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마저 이본에게 끝내 세뇌를 당하던 이클리스.

놈이 기어이 그 말을 듣고 반란군이 된 것이다.

어쩐지 ‘델만’이란 소리가 왜 자꾸 들리나 했더니…….

뚫어져라 나를 내려다보는 그를 보자니, 기가 막히다 못해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네가 기어이 미쳤구나.”

“…….”

“이거 놔. 놓으라고!”

나는 놈에게 잡힌 몸을 풀기 위해 마구 버둥거렸다.

그러나 놈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버둥거리면 마물을 자극해서 위험해요.”

그러더니 나를 품에 안은 채 고삐를 당겼다.

후욱-! 저공비행하던 마물이 방향을 바꾸며 위로 솟구쳤다.

거세게 몰아치는 바람 때문에 잠시 눈을 감았다 뜬 나는, 이내 놈의 가슴을 주먹으로 ‘퍽’ 내리치며 소리쳤다.

“너 미쳤어? 내 뒤통수치는 것도 모자라, 이제 마물까지 몰아?”

설마설마했다. 노멀 모드에서 놈이 이본에게 홀려 페넬로페의 악행을 고발하긴 했어도, 반란군의 수장까지 해 먹지는 않았다.

아무리 세뇌당했다지만, 이건 너무 갔지 않은가.

“이본한테 돌아 버리다 못해 이제 아예 레일라의 수족까지 해 먹기로 했어?”

기막힌 헛바람을 터뜨리자, 짓씹듯 내뱉는 대꾸가 돌아왔다.

“내가 미쳐 돈 건, 당신이야.”

“내 핑계 대지 마. 넌 핑계 댈 게 나밖에 없니?”

“그럼 제가 왜 피까지 먹여 가면서 이 역겨운 마물 새끼들을 길들였는데요.”

앞을 보며 마물을 몰던 이클리스가 문득 고개를 내려 나를 직시했다.

마물이 내뿜는 불그림자에 가려져서 미처 보지 못했다.

핏줄이 잔뜩 불거진 그의 눈은 반쯤 광기에 물들어 있었다.

“언질도 없이 하루아침에 사라진 당신. 나를 버리고가 버린 당신을 찾으려고…….”

“…….”

“군사를 모으고 며칠간 밤을 새워 가며 제국을 쥐 잡듯이 뒤졌는데…… 북방에 있었다고.”

이를 악문 음성이 불거진 턱을 타고 흘러나왔다.

“혹시 네가 슬퍼할까 봐, 저 새끼를 죽일 생각도 못 하던 나를 두고, 고작…….”

심상치 않은 이클리스의 기세에 숨이 턱 막혔다.

피울음이라도 내뿜는 듯 충혈된 눈을 보며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때였다.

“왕자님!”

마물 하나가 나와 이클리스를 태운 마물 옆으로 접근했다.

“생각보다 놈들의 전력이 강합니다! 이대로라면 마물들을 모조리 잃을 수도 있습니다! 그만 원래 작전대로 진행하시는 게…….”

“목표물을 찾았다. 철수한다.”

“예? 하오나, 작전은…….”

놈은 더 대꾸하지 않고 고삐를 내리쳤다.

‘왕자?’

이클리스를 향한 생소한 부름에 나는 그저 당황스러웠다.

‘대체 내가 공작가를 탈출한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그러나 사색도 잠시.

“공녀-!”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번뜩 정신이 들었다.

흘끔 아래를 내려다보자, 황태자가 칼춤을 추며 내가 타고 있는 마물 아래로 미친 듯이 달려오고 있었다.

“전하!”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또 다른 적군이 그를 덮쳤다.

그러는 사이 이클리스가 모는 마물이 상공 위로 날아올랐다.

“이거 놔!”

지상과 점점 멀어지는 시야에, 나는 다시 거세게 반항했다.

“놓으라고, 이 자식아!”

“가만히 계세요, 주인님.”

꿈쩍도 하지 않는 것도 모자라, 이클리스는 내 허리를 제 쪽으로 바짝 끌어당기며 속삭였다.

“얌전히 가시지 않으면 지금 여기서 저 새끼 죽여 버릴 거예요. 왜 사격 중지한 건지, 아시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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