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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엔딩은 죽음뿐-205화 (205/243)

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205화

나는 놈의 협박에 버둥거림을 멈췄다.

‘화살 퍼붓는 걸 중지한 이유.’

내가 있는 걸 보았기 때문이다.

이런 급박한 상황 속에서도 피부로 생생하게 느껴지는 이클리스의 진득한 감정에 기분이 착잡해졌다.

차라리 완전히 여주를 사랑하게 돼서 그녀를 위해 움직이는 거라면, 이런 심란함도 없었을 텐데.

언제나 인형 같던 이클리스의 말간 잿빛 눈동자는 이제 알 수 없는 격정으로 번들거렸다.

나는 흔들리는 눈으로 놈의 머리 위를 흘끗 바라보았다.

여전히 검붉은 색으로 빛나고 있는 호감도 게이지 바.

내겐 독이 돼 버린 그의 사랑.

“……네가 이본을 데리고 오면서, 모든 게 끝이 났다는 걸 다시 말해도.”

“…….”

“그래도 넌 네 멋대로 할 거지.”

“시작도 안 했는데 어떻게 끝이 나요, 주인님.”

싸늘한 내 목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놈은 내 허리를 조금 더 끌어 당겼다.

“……너는 예전부터 그랬지.”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시선 끝에, 두 손으로 꾹 쥐고 있는 거울 봉이 닿았다.

“말로 해서는 좀처럼 들어 처먹질 않아.”

호감도에 목을 매던 나는, 놈이 노예답지 않게 나를 휘두르려 드는 것을 알면서도 내버려 두었다.

그 결과가 이거였다.

“……마법을 못 쓰면 두들겨 패는 데 쓰기라도 해야겠네.”

“무슨…….”

내 혼잣말에 이클리스의 목소리에 의아함이 감돌던 순간.

나는 돌연, 들고 있던 거울 봉을 뒤로 젖히고 있는 힘껏 놈의 머리통을 후려쳤다.

퍽-!

“윽!”

둔탁한 타격음과 함께 허리를 옥죄던 힘이 풀렸다.

‘쯧, 그러게 놓으라니까.’

황태자가 봉을 휘둘러서 이본을 패 죽이라는 소릴 괜히 한 것이 아니었다.

봉 끝에 달린 작은 거울의 주변엔 보석들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어 사실상 해머나 다름없었다.

“주인, 잠시만…… 윽!”

퍼억-!

몸을 돌려 한 번 더 머리통을 후려친 나는, 이내 있는 힘껏 그를 밀쳐냈다.

이클리스는 신음과 함께 고삐를 놓쳤다.

이마를 타고 흐르는 한 줄기 피에 가슴 한구석이 뜨끔했다.

그러나 죄책감에 젖을 틈도 없었다.

고삐가 풀린 마물이 미친 듯이 흔들렸기 때문이다.

“공녀!”

때마침 아래에서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황태자가 난동 부리는 새 마물의 목을 거의 조르듯이 탄 채 간신히 이클리스의 마물 아래로 날아오르고 있었다.

“전하! 저 뛰어내려요!”

크게 소리치자, 그가 사색이 되어 고개를 저었다.

“자, 잠깐! 아직……!”

내가 봐도 올라탄 인간을 떨어뜨리기 위해 미친 듯이 몸을 뒤척이는 마물 위에 있는 황태자는 위태로워 보였다.

하지만 지금밖에 기회가 없었다.

“으윽…… 안 돼.”

머리통을 후려 맞고도 그새 정신을 차린 이클리스가 내게 손을 뻗었다.

나는 그가 내 뒷덜미를 잡아채기 직전, 아래로 휙 몸을 던졌다.

“페넬로페-!”

피가 흐르는 머리를 부여잡고 있던 이클리스가 벌떡 몸을 일으켜 마물 아래로 팔을 내뻗었다.

흩날리는 머릿결 사이로 점점 멀어지는 그의 얼굴이 창백하게 일그러지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그도 찰나였다.

“페넬로페 에카르트!”

속절없이 낙하하던 몸이, 누군가에게 거칠게 붙잡혔다.

내가 뛰어내리는 것을 본 황태자는 나를 받기 위해 망설임 없이 마물을 밟고 튀어 올랐다.

이어서 ‘철퍽-!’하고 강렬한 충격이 전신을 덮쳤다.

“악! 읏, 윽!”

황태자는 나를 품에 꽉 끌어안은 채 늪 바닥을 뒹굴었다.

그사이에 쥐고 있던 거울 봉을 놓친 것도 알아채지 못했다.

“헉, 헉, 미친…….”

마침내 구르는 것이 멈췄을 무렵, 칼리스토와 나는 지옥에서 올라온 진흙 괴물이 되어 있었다.

“으윽.”

황태자가 나를 놓은 후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근사한 얼굴과 황금빛 머리칼이 온통 끈적끈적한 진흙에 뒤덮여 있었다.

그에 비하면 그의 망토를 뒤집어쓰고 있던 나는 정말로 멀쩡했다.

추락의 충격을 푹신한 늪과 칼리스토가 대신 흡수했기 때문이다.

“제기랄, 너 진짜……!”

그가 나를 향해 시뻘건 눈을 부라리며 이를 갈았다.

나는 찔끔해서 얼른 눈을 내리깔았다. 그런 나를 보며 칼리스토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다친 곳 없어?”

“네. ……전하는요?”

“누구 덕분에 온몸을 자근자근 짓밟힌 기분이야.”

나는 그에 대한 미안함 반 억울함 반으로 고개를 푹 숙였다.

무모하게 뛰어내린 내 잘못은 맞지만, 그대로 납치당할 수는 없지 않은가?

“이 근처에 사는 두꺼비가 친구 하자고 해도 믿을 만한 꼴이군. 어서 일어나.”

그가 넋을 놓고 있는 내 팔을 잡고 억지로 일으켰다.

움직임을 보아하니 칼리스토는 낙하하면서 크게 다친 곳은 없는 듯했다.

함정이 딱딱한 흙바닥이 아닌 늪지대라는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까.

“끼루우우우욱-!”

그때였다. 불길하게 상공에서 대기하고 있던 또 다른 한 무리의 마물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쯧, 교란 작전을 할 모양이군.”

맹렬하게 아래로 날아오는 시커먼 괴물 떼를 보며 황태자가 혀를 찼다.

“내 친위대를 멸살하는 게 아니라, 그대를 지키지 못하게 붙들어 놓고 납치하려는 거야.”

단번에 놈들이 하려는 일을 꿰뚫어 본 황태자가 고개를 돌려 나를 응시했다.

며칠을 제대로 휴식도 취하지 못한 채 전투에 임해야 하는 그의 얼굴이 조금 피로해 보였다.

‘……미친 새끼.’

찌르는 듯 내게 못 박힌 새빨간 눈동자에 나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내게 그렇게 후려 맞고도 이클리스 놈은 나를 포기할 생각이 없는 듯했다.

이대로라면 간신히 버티며 싸우고 있는 친위대도 전멸할 것이다.

“그때 그 새끼지?”

급박하게 돌아가는 상황 속에서 불현듯 칼리스토가 물었다.

“그대에게 고대 발타 지도를 선물하러 공작저에 갔을 때, 후원 뒤 숲에 숨어 우릴 엿보고 있던 놈.”

나는 나조차 깜빡 잊고 있었던 기억을 날카롭게 되새기는 황태자의 말에 화들짝 놀랐다.

적군이 코앞에 들이닥친 상황에 썩 어울리지 않은 대화였다.

그러나 대답을 닦달하는 그의 눈초리에 나는 마지못해 내뱉었다.

“……제가 경매장에서 데리고 온 노예이자 호위였어요.”

“주인에 대한 은혜를 원수로 갚는군.”

“죄송해요.”

나 때문에 벌어진 일인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웠다.

고개를 숙이며 조용히 주절거리던 순간.

“끼루욱-!”

황태자가 눈 깜짝할 새 날아든 마물의 발톱을 피해 허릴 굽힌 후 그대로 검을 뽑아 들어 목을 베었다.

마물이 우릴 노리고 날아오는지도 몰랐던 나는 바보처럼 얼어붙었다.

떨어진 적군이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칼을 거칠게 꽂아 넣은 그는, 이내 피가 튀긴 얼굴을 손등으로 닦아 내며 숙였던 허리를 들었다.

“죄인 같은 표정 지을 필요 없어. 나 때문에 그대가 거지 같은 꼴을 본 게 아니라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중이니까.”

“…….”

“놈들이 날 치기 위해 그대를 노렸다면 기분이 더 개 같았을 거야.”

“……왜요?”

“약점을 들킨 거니까.”

그는 내가 약점이라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읊조리며 씩 웃었다.

곧바로 다급하게 칼을 쥐지 않은 손으로 내 팔을 쥐었다.

“이제부터 내 뒤에 딱 붙어 있어, 공녀. 숲으로 가면 어떻게든 따돌릴 수 있겠지.”

그가 바로 뒤에 있는 늪지대의 끝을 턱짓했다.

추락한 탓에 우리는 전투가 벌어진 중앙에서 꽤 떨어진 상태였다.

이대로 그와 함께 숲으로 가면 안전하게 벗어날 수 있다.

마물의 거대한 크기로 보아 빽빽한 나무 사이를 날 수는 없으니까.

하지만.

“……그럼 다른 기사들은요?”

나는 날아드는 또 다른 마물을 대비하며 나를 뒤로 떠미는 그에게 작게 물었다.

“읏, 무슨 대답을 원하는데.”

챙-! 발톱과 칼날이 맞부딪혔다.

이번에도 그는 쉽게 마물을 죽였다.

하지만 미끄러운 진흙 때문에 몇 번이고 칼이 손에서 헛돌았다.

“내게 가장 소중한 건 너 하나뿐이라고?”

챙-!

“아니면, 몇 년을 동고동락했던 부하들이 다 뒈지든지 말든지, 네가 끌려가는 꼴은 죽어도 못 본다고 하는 게 더 좋으려나?”

“으악!”

그는 주춤주춤 나를 숲 쪽으로 밀며 쉴 새 없이 마물을 베었다.

나는 무력하게 손을 놓은 채 그에게 떠밀릴 수밖에 없었다.

기분 탓인지 그의 움직임이 점점 둔해지는 것 같았다. 뒤늦게 그가 팔을 다쳤던 것이 생각났다.

“끼루우우욱-!”

간신히 또 하나의 적을 해치웠을 무렵.

멀리서 무시무시한 기세로 우리 쪽으로 날아오는 거대한 마물이 보였다.

“쯧, 아무래도 저 새끼를 죽여야만 길이 뚫리겠군.”

그 위에 타고 있는 이를 알아본 칼리스토가 짜증스럽게 중얼거렸다.

이클리스였다.

한쪽 이마에 피를 칠칠 흘리고 있는 놈이 우리를, 아니, 나를 바라보며 귀신처럼 눈을 번뜩였다.

‘제발 좀…… 그만해, 미친놈아!’

칼리스토의 말이 맞았다.

저 미친놈을 어떻게 하지 않는 이상, 여기서 빠져나갈 길은 요원해 보였다.

그러자 갑자기 불쑥 화가 치솟았다.

‘이본 년 죽이기도 바빠 죽겠는데, 대체 내가 왜 여기서 이렇게 구르고 있어야 돼!’

머리에서 뚝뚝 떨어지는 진흙 덩어리가 짜증 나서 미칠 것 같았다.

뒤통수 맞은 것도 서러운데 내가 왜 팔자에도 없는 늪지대 한가운데에서 이렇게 구르고 있어야 하는 건가.

하지만 그보다 더 짜증 나는 건,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 이클리스에게 납치당하면 상황은 더 답도 없어질 거란 것이다.

‘안 되겠다. 몇 대 더 후려 패 줘야겠어. 어딨어, 이 빌어먹을 거울 봉.’

나는 눈을 부릅뜨고 떨어지면서 놓친 거울 봉을 찾았다.

멀찍이 진흙에 거꾸로 처박힌 채 삐쭉 튀어 나와 있는 봉이 눈에 닿았다.

그쪽으로 걸음을 옮기려던 때였다. 문득 눈앞이 환해졌다.

〈SYSTEM〉 당신의 분노와 정의가 MAX에 이르러 고대 마법사의 피를 일깨웠습니다!

〈SYSTEM〉 지금부터 [진실의 거울 봉]으로 마법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SYSTEM〉 단, [고대 마법]은 많은 체력과 정신력을 요구합니다! 중요한 때에 신중히 사용하십시오!

떠오른 네모 창에 나는 이를 악물었다.

“……아니요.”

나는 나를 제 뒤에 숨긴 채 검을 고쳐 잡는 황태자에게 말했다.

“그냥, 염병할 마법은 왜 이제야 쓰냐는 둥 그러지만 마세요. 알았죠?”

“뭐…… 공녀!”

자조에 가까운 그의 물음에 꽤 늦은 답을 내놓은 후 나는 곧바로 박혀 있는 거울 봉을 향해 뛰었다.

“페넬로페 에카르트! 당장 이리 와!”

뒤에서 황태자가 경악 어린 목소리로 부르는 게 들렸지만, 멈출 수 없었다.

“끼루우우우욱-!”

봉과 거리가 얼마 남지 않았을 때, 불현듯 뒤쪽에서 마물의 울부짖음과 함께 강한 돌풍이 몰아쳤다.

“으윽!”

나는 본능적으로 몸을 날려 엎드렸다.

진흙 위를 슬라이딩하듯 속절없이 뒹굴다가 간신히 멈췄을 때, 무언가가 머리 위를 훅 스치고 지나갔다.

“끼루우우욱-!”

마물의 발톱이었다.

고개를 드니, 그새 나를 잡으러 온 이클리스 놈이 먼 상공에서 방향을 틀고 있는 것이 보였다.

“개새끼.”

나는 얼굴에 튀긴 진흙을 신경질적으로 닦아 내며 나지막이 욕설을 내뱉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슬라이딩 덕분에 빠르게 거울 봉이 박혀 있는 곳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나는 눈앞에 있는 봉을 잡고 힘을 줘 당겼다.

푸욱-.

젖은 흙이 찔꺽이는 소리와 함께 얼마 안 가 거울 봉의 상단이 드러났다.

진흙과 알 수 없는 풀떼기가 잔뜩 달라붙어 있는 지저분한 봉에서는 화려하고 웅장했던 이전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얼굴이 환해졌다.

상단에 달린 거울 봉 주변으로 흰 글씨가 뱅글뱅글 맴돌고 있었기에.

“끼루우우욱-!”

하늘과 땅을 오가며 미친 듯이 날아다니는 빌어먹을 마물들과 다시 내 쪽으로 달려오고 있는 이클리스.

‘제발 다 꺼져!’

나는 간절함을 담아 입을 벌렸다.

문득 목 밑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천불이 드글드글 끓는 기묘한 느낌에, 나는 눈을 질끈 감고 힘겹게 외쳤다.

“디 하르크!”

두두두두, 우드드득-.

땅에서 미약한 진동과 함께 기괴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는 주문을 외치면 곧바로 하늘에서 빛 덩이라도 떨어져서 마물을 초토화시킬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생각보다 고요한 주변에 슬쩍 눈을 떴을 무렵.

“끼루루룩-!”

나는 말 그대로 모든 것이 멈춘 상황을 맞이했다.

늪지대 한가운데에 있는 맹그로브 숲의 줄기들이 무섭도록 자라나서, 하늘에 떠 있는 모든 마물들의 다리를 우악스럽게 휘감고 있는 광경.

그리고 당황과 경악에 물든 채 그것을 바라보는 황태자, 친위대, 델만 군.

안 그래도 정신 사납게 날아다니던 마물들에 이골이 났던 나는, 마법이 생각보다 마음에 들었다.

남은 주문은 어렵지 않게 튀어나왔다.

“……프레셔.”

그 순간, 맹그로브 줄기에 휘감겨 있던 새 떼들이 일제히 늪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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