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의 엔딩은 죽음뿐-206화 (206/243)

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206화

퍼억-!

동시다발적인 폭음이 울려 퍼졌다.

갑작스럽게 허공에서 뚝 떨어져 내린 스무여 마리의 마물들 때문이었다.

“끽, 끼룩-!”

“으아악!”

찐득한 진흙탕에 처박힌 마물들.

추락하며 마물 위에서 튕겨져 나가 볼품없이 나뒹구는 인간들로 인해 늪지대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델만군은 당황이 역력한 기색으로 다시 마물을 추스르려 들었다.

“끼룩, 끼루루룩!”

두드득, 우드드둑-.

그러나 맹그로브 줄기는 추락에 그치지 않고 섬뜩한 소리를 내며 휘어잡은 먹잇감들을 늪 속으로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델만군들은 칼을 빼 들고 마물을 끌고 가는 억센 줄기들을 잘라 내려 들었다.

하지만 칼날을 대기가 무섭게 줄기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거리며 인간의 팔마저 휘어 감았다.

“으아아악! 사, 살려 줘!”

“끼루루루룩-!”

마물과 함께 옴짝달싹 못한 채 천천히 늪 속으로 가라앉는 인간들이 속출했다.

적군이 끌고 온 마물보다 더 지독한 광경에 황태자의 친위대는 넋을 놓았다.

“다들 뭘 멍청히 서 있어! 지금이다, 공격!”

그때, 난장판 속에서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황태자가 거세게 소리쳤다.

마법으로 마물도, 적군도 다 묶여 있는 지금이 바로 기회였다.

“와아아아아-!”

그 소리를 들은 기사들이 기합을 지르며 너도나도 검을 세우고 맹그로브 숲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제기랄!”

반란군들은 허옇게 질린 안색으로 자꾸만 몸을 휘감는 줄기들을 베어 내고, 늪에서 벗어나기 위해 허우적대느라 여념이 없었다.

맹그로브 줄기에 발목이 붙잡힌 건 이클리스 또한 마찬가지였다.

놈은 그중 가장 독종이었다.

이미 늪 속에 반쯤 처박힌 제 마물이 끌려가든 말든, 그는 발을 휘감는 줄기를 단검으로 쳐 내며 내게로 악착같이 다가오고 있었다.

“페넬로페-!”

놈이 피를 뿜듯 나를 부르짖었다.

내게 못 박힌 채 형형히 빛나는 눈동자엔 절대로 놓치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가 엿보였다.

‘지독한 놈…….’

나는 다가오는 놈을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나를 잡기 위해 이클리스가 한 발짝, 한 발짝 다가오고 있었지만,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기분 탓인지 쥐고 있는 거울 봉이 점점 뜨거워졌다.

목에서 또다시 무언가 울컥 들끓었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이것을 내리누르지 않으면, 마법이 풀릴 거라는 게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시간 싸움이야.’

친위대가 반란군을 말살할 때까지 버텨야 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눈앞이 어질어질해졌다.

“왕자님! 퇴, 퇴각해야 합니다!”

그때, 이클리스 근처에 있던 델만군 한 명이 절박하게 외쳤다.

그러나 돌아오는 답이 없자, 그는 필사적으로 몸을 날려 이클리스를 붙잡았다.

“왕자님!”

“놔! 페넬로페!”

그것을 거칠게 뿌리친 이클리스가 내게 부쩍 다가섰다.

세 발짝 남짓한 거리. 자칫 놈이 손을 뻗으며 뛰어오르면 잡힐 수도 있었다.

하지만 거기까지가 마지노선이었다.

잡히기 싫다는 생각이 떠오름과 동시에, 우드드드득-.

돌연 진흙 속에서 여러 개의 잔줄기가 솟아올라 놈의 다리를 꽁꽁 휘감았다.

그것은 이클리스를 서서히 아래로 끌어당겼다.

말간 잿빛 눈동자가 아래를 향했다가, 다시 내게로 올라왔다.

“……주인님.”

“다가오지 마, 죽기 싫으면.”

나는 어질어질한 시야에도 힘겹게 그를 노려보며 경고했다.

“죽여 주세요.”

그러나 허무하리만치 즉답이 돌아왔다.

“당신 명령이라면 기꺼이 죽을 수 있어요. 제가 죽길 원하시는 거면, 이대로 죽을게요.”

“너 정말…….”

“난 죽어도 당신 포기 못 하니까.”

“…….”

“내가 이 줄기 다 잘라 내고 가기 전에 빨리요.”

놈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머릿속에서 마법 주문이 빙글빙글 맴돌았다.

한 마디면 놈을 늪 깊은 곳에 처박아 죽이기는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선뜻 내뱉을 수 없었다.

‘나는 이클리스가 죽길 원하는가?’

당연히 놈이 밉고 원망스러웠다.

하드 모드를 실패하고, 기어이 내 손으로 독을 마시게 만든 주범이 아닌가.

하지만 내게 맞아 피를 줄줄 흘리면서도, 필사적으로 나를 잡으려 드는 그의 몰골을 보니 화보단 한숨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한땐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열심히 보살피던 놈인데, 어쩌다가 이 지경까지 오게 된 걸까.

“넌 더 이상 내 노예가 아니야, 이클리스.”

나는 비로소 그를 상처 입히려는 목적이 아니라, 이성적인 판단으로 그에게 끝을 고했다.

“미안해. 네가 내게 가진 감정을 알면서도 널 이용하려 했던 거.”

“주인…….”

“하지만, 과정이 어떻든 우리 관계는 이미 끝났어. 난 널 사랑하지 않아.”

“…….”

“그러니까 제발 정신 차리고 이제 네 인생 살아. 이본한테도 그만 끌려다니렴. 네가 잘 살아간다면, 나도 더는 널 원망하지 않을 테니까.”

내 말에 이클리스의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렸다.

널 사랑하지 않는다는 내 말에, 그의 얼굴이 찬찬히 우그러졌다.

그 순간이었다.

“페넬로페-!”

누군가 커다랗게 나를 불렀다.

나와 이클리스의 시선이 동시에 휙 돌아갔다.

주변의 델만군을 모조리 해치운 황태자가 늪을 헤치며 허겁지겁 내게로 달려오고 있었다.

“저 새끼 때문이죠.”

불현듯 앞쪽에서 음산한 속삭임이 흘러 나왔다.

“이본 말이 맞았어. 당신은 높은 곳에 있고 싶어 하니까…….”

“…….”

“저놈을 죽이고 제국을 내 손에 쥐면, 널 가질 수 있겠지.”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

미처 답하기도 전에 이클리스 놈이 앞으로 쏜살같이 튀어 나갔다.

우드득-.

그를 붙잡고 끌어당기던 맹그로브 줄기가 모조리 끊어질 만큼 엄청난 힘이었다.

눈 깜짝할 새 칼리스토 앞까지 달려간 놈의 손에 갑작스럽게 커다란 장검이 솟아났다.

“전하!”

채앵-!

칼리스토는 가까스로 내리치는 검을 막아냈다.

끼이이이익- 맞부딪힌 칼날 사이로 섬뜩한 쇠울음 소리가 났다.

돌아 버린 이클리스는 무섭게 검기를 내뿜었다.

“크윽……!”

예기치 못하게 나타난 장검에 의해 당황한 칼리스토가 휘청거리며 뒤로 밀렸다.

“디 하르크!”

나는 앞뒤 가릴 것 없이 외쳤다.

우드드드득, 추왁-!

진흙 속에서 잔줄기가 아닌, 굵직한 줄기들이 두 사람을 모두 덮칠 만큼 어마어마한 높이로 솟아올랐다.

“끼루루루룩-!”

“왕자님!”

퍽- 그 순간, 강한 돌풍과 함께 마물 하나가 전광석화처럼 날아와 이클리스를 채 갔다.

순간 이동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눈 깜짝할 새 일어난 일이었다.

놈을 빼돌리는 것만을 목적에 둔 듯, 그를 움켜쥔 마물은 엄청난 속도로 늪지대를 벗어났다.

전멸하든, 말든 나머지 델만군은 그대로 내팽개친 채로.

“끼루우우욱-.”

나는 순식간에 점이 되어 멀어지는 마물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렇게 놓치다니 허탈함이 몰려왔다.

‘……바로 죽였어야 했나?’

나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망설였음을 부정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남주 중 하나를 내 손으로 죽여야 한다니…….

“공녀!”

부름에 퍼뜩 고개를 돌리자, 그사이 몸을 추스른 황태자가 일그러진 얼굴로 내게 빠르게 다가왔다.

“괜찮나? 다친 곳 없어?”

그는 내 양 뺨을 부여잡은 채 정신없이 내 안위를 살폈다.

나는 대답 대신 주변을 주욱 둘러보았다.

맹그로브 줄기에 묶인 마물과 델만군은 대부분 늪지대로 끌려 들어가다가 친위대의 손에 죽었다.

전투가 얼추 끝난 것 같자 긴장이 확 풀렸다.

“……전하.”

“왜 그래. 그 개새끼가 무슨 짓이라도 했어? 응?”

“저, 어지러워요.”

“페넬……!”

찢어질 듯 확장되는 새빨간 눈동자를 끝으로, 눈앞이 컴컴해졌다.

* * *

똑똑-.

고요한 집무실에 노크 소리가 나지막이 울려 퍼졌다.

“들어오게.”

방문자가 누군지 알고 있던 에카르트 공작이 짧게 명령했다.

문이 열리고 머리가 희끗희끗하게 센 공작가의 집사가 들어와 정중히 인사했다.

들여다보던 서류에서 고개를 든 공작이 곧장 본론부터 물었다.

“어떻게 됐는가.”

“페넬로페 아가씨의 전속 하녀는 여전히 행방이 오리무중입니다.”

돌아오는 답변에 공작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페넬로페를 따라갔을 가능성은 없는 건가?”

“아가씨께서 나가신 후 이틀 후에 사라진 터라…….”

집사가 송구스럽다는 듯 말끝을 흐렸다. 그리고 힘겹게 덧붙였다.

“그리고…… 실종된 레아라는 하녀는 폴이라는 마구간지기와 혼인을 약속한 사이였다고 합니다.”

“혼인?”

“예, 확인해 보니 어제저녁부터 폴을 본 자가 없다고 합니다. 혼인을 위해 도주를 한 게 아닐까 추정 중입니다.”

집사의 말을 듣던 공작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며칠 사이 공작가에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나서 수습할 게 한둘이 아니었다.

돌아온 공작의 친딸을 뚜드려 패고 가출한 양녀와 소리 없이 사라진 그녀의 전속 하녀.

그에 그치지 않고 고용인 둘이 하루아침에 사라졌다.

“……하필 도주라니, 이상하군. 퇴직금도 받지 않은 채로 말인가?”

“예.”

기강을 위해 저택 내에서는 고용인 들끼리의 애정 관계를 엄금했다.

그러나 몰래 눈이 맞아 혼인을 약속한 이들마저 강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때문에 보통은 혼인 자금 겸 퇴직금을 두둑이 챙겨 주고 저택에서 내보내곤 했다.

그런데 그 퇴직금조차 받지 않고 나가 버렸다니 이상하지 않은가.

“……사람을 풀어 행적을 더 조사해 보도록 할까요?”

미심쩍은 표정을 짓는 공작에게 집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되었네. 제 발로 나간 이들을 어찌하겠어.”

공작은 쉽게 고개를 저었다.

도주한 고용인들보다 가출한 딸과 연일 문제를 일으키는 아들놈들이 더 큰 골치였다.

“레널드 놈은 뭐 하고 있나.”

“……만취하신 채로 오늘 새벽에 귀가하신 후 아직도 수면 중이십니다.”

“뭐야?!”

페넬로페가 집을 나간 후 둘째 놈은 매일같이 술을 퍼마셨다.

가끔은 한밤중에 만취한 채 들어와 꼴사납게 울어 젖히는 탓에, 고용인들을 몽땅 깨울 때도 있었다.

- 미아내, 내가 미안하다고…… 그러니까 죽지 마라, 흑…… 씨발, 그가 목걸이 내가 새로 사 주면 될 거 아니야…….

고용인들 사이에서 둘째 도련님이 실연을 당한 게 아니냐는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페넬로페 아가씨가 떠나신 후에 많이 적적하신 모양입니다.”

“……쯧, 한심한 놈 같으니라고.”

집사의 말에 공작이 못마땅하다는 듯 혀를 찼다.

그러나 레널드 놈이 누구에게 그렇게 잘못을 비는지 아는 탓에, 차마 뒤통수를 후려갈길 수 없었다.

그것은 자신의 뒤통수를 때리는 것과 진배없는 행위이기에.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