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207화
둘째 놈의 소식이 끝났다. 다음.
“……데릭, 그놈은.”
“……어제도 집에 귀가하지 않으셨습니다.”
전보다 한층 더 무거워진 주인의 목소리에 집사가 망설이다가 사실을 털어놓았다.
“수행 기사의 전언으로는 수도 근경의 한 마을에 계신다고 합니다.”
“거긴 왜.”
“페넬로페 아가씨를 목격했다는 제보를 받고…….”
“이런 미친놈!”
쾅-!
집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공작이 얼굴을 험악하게 일그러뜨리며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쳤다.
“쌓인 일이 산더미 같은데 아직도 그 짓거리 중이야!”
차라리 술이나 퍼마시는 레널드가 나았다.
언제나 냉정과 이성을 잃지 않았던 자랑스러운 에카르트의 소공작은, 어느 시점부터 이상하게 변해 갔다.
명료했던 눈빛이 점점 기이한 빛을 띠더니, 페넬로페가 사라진 후로는 완전히 돌변해서 미쳐 날뛰었다.
해야 할 업무는 모조리 내팽개친 채 허구한 날 기사들을 이끌고 그녀를 찾아 나서는 놈을 도저히 통제할 수가 없었다.
“후…….”
변함없는 데릭의 소식에 공작은 머리가 지끈거려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페넬로페가 저택을 나간 후 집안이 개판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 아이는 뭘 하고 있다던가.”
몇 분 새 10년은 늙어 버린 얼굴로 공작이 나머지 한 명을 확인했ek.
“아직 몸이 미령한 상태인데, 막 배정된 하녀가 제대로 시중을 들지 않아서 크게 상심하신 것 같습니다.”
저택에서 가장 애매한 위치에 있는 이인지라, 집사는 그 주어를 모호하게 생략했다.
도망을 가 버렸으니 시중을 들지 않는 건 당연했다.
“후우…….”
공작은 또 한 번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명치에 시퍼렇다 못해 거무튀튀한 피멍이 든 이본은 며칠간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앓았다.
폭행 장면을 직접 목격하다 못해 같이 얻어맞았다는 하녀장이 길길이 날뛰었다.
하지만 그 자리에 있던 또 한 명의 목격자, 에밀리는 제가 범인임을 자처하더니 이튿날 감옥에서 실종됐다.
용의자들이 모두 사라졌기에 사건은 흐지부지 묻혔다.
남은 것은 ‘진짜 공녀를 뚜드려 패고 가출한 가짜 공녀’라는 무성한 소문뿐.
“그래도 많이 나아지셔서, 오늘은 아침을 잘 드셨다고 합니다.”
“가 봐야겠군.”
공작은 끙, 하고 앓는 소리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집사가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직접, 말씀이십니까?”
“아픈 애를 오라 가라 할 순 없지 않은가.”
공작은 이본이 저택으로 돌아온 후 단 한 번도 직접 방을 찾은 적이 없었다.
게다가 최근 연달아 벌어진 페넬로페의 일로 온 신경을 기울이느라, 완전히 방치나 다름없게 돼 버렸다.
많이 보고 싶었다며 울먹이던 이본의 말간 얼굴이 가슴 한편을 무겁게 짓눌렀다.
집사의 안내를 따라 이윽고 공작은 저택의 1층에 마련해 둔 이본의 방에 도달했다.
손님들에게 내주는 방 중 하나였다. 그것을 깨닫자 여린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 저…… 제 방을 한번 구경해 봐도 될까요? 아직도 그대로인지 궁금해서…….
3층에 가 보고 싶다는 이본의 부탁을 공작은 거절했다.
2층에 있는 페넬로페와 부딪힐까 염려가 되었기 때문이다.
저택에 온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게스트 룸에 머무는 이본의 처지를 확인하자, 다시금 마음이 무거워졌다.
똑똑-.
“누구세요?”
“나다.”
“아, 아버…… 아니, 공작님?”
노크하자, 안쪽에서 깜짝 놀란 음성이 들려왔다.
“들어가도 되겠느냐.”
“네, 네! 자, 잠시만요!”
끼이익- 다급히 달려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고, 공작님! 어쩐 일로…… 이, 일단 안으로 들어오세요.”
당황하여 우물쭈물하던 이본은 서둘러 공작을 방 안으로 들였다.
집사가 그 뒤를 따랐다.
창문 앞에 마련된 테이블에 착석한 공작이 안부를 물었다.
“……몸은 좀 괜찮은 게냐.”
“네, 그럼요. 저, 괜찮아요.”
이본이 밝게 웃으며 답했다.
며칠 내내 밥도 못 넘길 정도로 앓았다는 보고를 받았는데, 말간 얼굴은 그림자 없이 건강해 보였다.
“다행이구나.”
공작은 한시름 놓았다.
그리고 둘 사이로 어색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다행히 우물쭈물하던 이본이 용기를 내어 대화를 주도했다.
“저…… 다과라도…… 같이 들어 주시겠어요?”
“그래, 그러자꾸나. 집사.”
공작의 나지막한 부름에 집사가 서둘러 방을 나갔다.
얼마 가지 않아 테이블에 따끈한 차와 디저트들이 올려졌다.
“더 필요한 일이 있으면 불러 주십시오.”
다과를 준비한 집사는 부녀의 대화를 위해 눈치껏 자리를 피해 주었다.
집사가 가자마자, 이본은 그렁그렁한 눈으로 공작을 바라보았다.
“……오실 줄 몰랐어요. 와 주셔서 정말 기뻐요, 공작님.”
그런 그녀의 모습에 공작은 미약한 죄책감이 들었다.
아픈 애라는 것을 알면서도 찾지 않았다.
기실, 페넬로페의 성인식 이후 묘하게 이본에게 거리를 두었다. 그것 또한 페넬로페를 향한 죄책감 때문이었다.
‘못난 아비가 따로 없군.’
그는 아직도 어린 딸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게다가 매번 필요한 말만 내뱉고 쌩하니 가 버리는 페넬로페와 이본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제가 차를 따라 드려도 될까요?”
이본은 답을 듣지도 않고 벌떡 일어나 손수 찻잔에 차를 따랐다.
원래대로라면 하녀가 했어야 할 일이지만, 그녀에겐 현재 하녀가 없었다.
“……큼.”
나긋한 이본의 애교에 헛기침을 한 그가 힘겹게 서두를 열었다.
“……지내는 동안 어디 불편한 점은 없느냐.”
“불편한 점이요? 전혀 없어요. 오히려 제가 너무 과분한 대접을 받는 게 아닌가 종종 걱정이 돼요.”
“과분하다니. 그런 말 마라. 너도 마땅히 누려야 할 것들이니.”
이본은 잔뜩 감동받은 얼굴로 공작을 응시하다 울먹이며 답했다.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해요.”
“……이본.”
“네?”
공작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페넬로페를 너무 원망하지는 말거라.”
“아…….”
“그 애가 삐뚤어진 것도 다 내 탓이야.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세히 묻진 않으마. 그래도 심성이 나쁜 아이는 아니니 네가 조금만 이해해 주렴.”
페넬로페가 이유 없이 그러지는 않았으리라 여겼지만, 어쨌든 이본은 폭행당한 입장이었다.
공작은 차마 그녀를 마주 보지 못하고 시선을 찻잔으로 내렸다.
그 탓에 이본의 얼굴이 묘해지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럼요, 공작님. 전 아무렇지도 않아요.”
얼마 후 이본이 물기 가득한 음성으로 답했다.
“제가 페넬로페의 눈에 띄지 않게 더 조심했어야 했는데…… 죄송해요.”
“아니야, 네가 사과할 일은 아니지.”
“아니에요, 다 제 잘못이에요. 페넬로페는…… 아직 찾지 못했나요?”
그녀의 눈에 순식간에 눈물이 그득 차올랐다.
“무슨 일이라도 있을까 봐 너무 걱정돼요. 어서 돌아와야 할 텐데…….”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제 앞가림은 알아서 잘할 아이이니.”
그 말에 이본의 푸른 눈동자가 서늘해졌다.
이번에는 공작도 그것을 보았다.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차올라 있는데, 얼굴은 인형처럼 무표정했다.
순간 섬뜩함이 공작의 뒷목을 스쳐 지나갔다.
다행히 이본은 금세 표정을 허물고 사르르 미소 지었다.
“맞아요. 페넬로페는 똑똑한 아이니까요…….”
“큼, 그…….”
공작은 얼떨떨한 심경을 애써 감추며, 화두를 돌렸다.
“며칠 내내 방 안에만 있느라 답답하진 않고? 뭐 가지고 싶은 거라도 있으면 말하거라.”
“가지고 싶은 것이요?”
예상치 못한 말이었는지, 이본의 푸른 눈이 댕그래졌다.
“이, 이미 넘치도록 충분한걸요, 괜찮아요.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해요.”
“하녀장도 병가를 낸 터라 수발들 사람이 없어서 불편하지 않느냐. 아직 몸이 낫지 않아 외출은 힘들 테고…… 부담 갖지 말고 말해 보거라. 내 집사에게 일러두지.”
“아니에요! 제겐 레아가 있는걸요. 아, 레아는 얼마 전에 제 하녀가 된 아이예요.”
이본은 고개를 휘저으며 손사래를 쳤다.
“그 아이는…….”
공작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자신도 좀 전에 들었으니, 이본은 모르는 것이 당연했다.
“……집사에게 듣자 하니, 그 하녀가 엊저녁에 저택에서 도망을 친 것 같더구나.”
“도, 도망이요?!”
예상대로 이본은 뜻밖의 소식에 까무러칠 듯 놀랐다.
“왜, 왜요? 어, 어제부터 갑자기 보이지 않아서 이상하다곤 생각했지만…… 제 하녀를 하기가, 그렇게 싫었던 걸까요?”
“그럴 리가. 네 탓이 아니니 너무 상심하지 말렴.”
놀란 음성이 금세 물기로 축축해졌다. 공작은 어색한 위로를 전했다.
“괜찮은 이를 물색해서, 하녀는 곧 새로 배정해 주마.”
“감사해요…….”
이본은 풀이 잔뜩 죽은 얼굴로 말했다.
“그래도…… 레아가 그곳에선 부디 폴이랑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퇴직금도 내팽개치고 황급히 도망갈 만큼 열렬한 사이니, 잘 살겠지.”
상냥한 마음씨에, 공작이 덩달아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답을 하던 그 순간이었다.
번뜩 위화감이 뇌리를 스쳤다.
‘그런데…… 내가 마구간지기도 같이 도망친 것을 얘기했던가?’
공작은 멈칫 이본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티 하나 없이 맑은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왜 그러세요?”
푸른 눈동자에는 거짓이나 음험함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미 들어 알고 있던 것이겠지.’
데릭 놈 때문에 신경이 너무 날카로워진 것 같다.
공작은 애써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관심을 돌렸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차가 식겠구나. 어서 들려무…….”
어색해진 분위기를 무마하기 위해 서둘러 차를 권하던 그는, 순간 말을 멈췄다.
이본의 찻잔 안에,
비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