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208화
공작은 반사적으로 시선을 내려 자신의 찻잔을 내려다보았다.
맑고 투명한 찻물 안에, 딱딱하게 굳은 자신의 얼굴이 비쳤다.
찰나, 누군가의 음성이 벼락같이 귓가를 스쳐 지나갔다.
- 그 애와 있을 때…… 찻잔 안의 찻물을 들여다보세요, 아버지.
‘아.’
공작이 터져 나오는 신음을 가까스로 삼켰다.
까맣게 잊고 있었다.
가출하기 전, 페넬로페가 그런 말을 했었다는 것을.
‘페넬로페는 왜 갑자기 그런 이야기를 했었던가.’
해일처럼 혼란이 몰려왔다.
공작은 필사적으로 그때 했던 대화를 되살렸다.
무슨 이유에선지, 갑자기 페넬로페와 오찬을 들고 싶어졌다.
그래서 온실로 그녀를 불렀다. 그 후 무슨 대화를 나눴냐면…….
‘외출.’
그래, 외출 이야기를 했다.
외출을 빙자한, 가출을 하더라도 도와주겠다고 말하는 중이었다.
성인식 이후 하루가 다르게 살이 내리는 그 애를 더 두고 볼 수가 없어서, 밤새 고심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그 말을 하자 페넬로페가 뜬금없이 꺼낸 말이 그것이었다.
찻물을 보라고.
섬뜩함이 등골을 타고 흘렀다.
사람이라면, 응당 찻물에 비치지 않을 리가 없었다.
사람이라면 당연히…….
‘……그렇다면 내 앞에 있는 저 애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
이본은 무수히 많은 시험을 통해 친딸이라는 것이 확신 단계에 이른 상태였다.
죽은 전처를 똑 닮은 외양도 외양이었지만, 본인이 아니면 절대 알 수 없는 비밀, 일화, 기억들.
그것은 절대로 거짓이 아니었다.
페넬로페가 아니었다면 망설임 없이 바로 친딸이 돌아왔음을 공표하였을 만큼.
‘페넬로페. 페넬로페는 대체 언제부터 이 사실을 알고 있었지?’
그 말을 할 때 그 애의 표정이 어땠던가?
이상하게 그날, 오찬에서의 기억이 선명치 않았다.
머릿속이 폭풍처럼 빙글빙글 돌았다.
그리고 그 끝에, 겁에 질린 채 여러 번 망설이다 가까스로 그 말만 내뱉고 도망치듯 온실을 빠져나가던 페넬로페의 잔상이 자리했다.
- 그 애 조심하세요, 아버지!
“……속상하지만, 그래도 다행이에요. 저도 눈치챌 만큼 레아가 폴을 많이 좋아하는 것 같았는데…….”
“…….”
“두 사람은 이제 영원히 함께하게 된 거…… 공작님?”
자신을 부르는 음성에 공작이 퍼뜩 회상에서 깨어났다.
“아…….”
고개를 드니 이본이 재잘거림을 멈추고 동그랗게 뜬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영락없는 순한 이본의 얼굴인데, 왜인지 식은땀이 목뒤를 타고 흘러내렸다.
“미…… 미안하구나. 무슨 이야기 중이었지?”
“차 안에 이물질이라도 있으세요?”
“……응?”
“계속 찻잔을 바라보기만 하셔서요.”
이본은 웃지 않았다.
테이블 아래 있는 공작의 주먹이 꽉 쥐어졌다.
“아…… 아니다. 갑자기 잊고 있던 일이 떠올라서 말이야.”
“큰일이라도 있으세요? 안색이 안 좋아지셨어요.”
“괜찮다. 걱정해 줘서 고맙구나.”
이본은 금세 걱정 어린 표정을 지었다.
공작은 아무런 내색을 않으려 노력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끼익-.
“……일이 있어서 먼저 일어나 봐야겠다. 다과는 다음에 또 들자꾸나.”
“버, 벌써요?”
“아픈 사람을 붙들고 너무 오래 있는 것도 예의가 아니지.”
그는 그 말을 끝으로 테이블을 벗어나려 했다.
그러나 미처 한 걸음 떼기도 전에 덥석 옷소매가 잡혔다.
“저…… 공작님.”
멈칫 돌아보니, 이본이 할 말이 많은 얼굴로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잡힌 소맷자락을 내려다본 공작의 눈빛이 반사적으로 서늘해졌다.
그녀는 우물쭈물대다가 입을 열었다.
“……가지고 싶은 게 있느냐고 여쭤보셨잖아요.”
“아, 그랬지.”
그제야 공작이 굳은 표정을 풀고 애써 웃었다.
“뭐 가지고 싶은 거라도 생각났느냐?”
“가지고 싶은 것은 아니고…… 외출을 좀 하고 싶어요.”
“외출?”
“네. 갑자기 이곳으로 오는 바람에 원래 살던 마을 사람들에게 인사도 못하고 헤어졌거든요. 앓고 나니까 이웃들이 보고 싶어져서…….”
공교롭게도 페넬로페와 마지막에 나눈 것과 같은 주제였다.
“아직 몸도 편치 않은데, 외출이라니. 시간은 많으니 나중에 가려무나.”
“하, 하지만…… 보살피던 고아 아이들이 있어요. 제가 없는 사이 굶진 않았는지 걱정돼요. 부탁드릴게요, 네?”
이본은 공작의 손을 살며시 흔들었다. 애교를 부리는 사랑스러운 모습이었다.
그러나 공작은 자꾸만 텅 빈 찻잔 안으로 시선이 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페넬로페처럼 잘못을 저지른 것도 아닌데, 외출한다는 사람을 강제할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공작은 짧은 시간 동안 고심 끝에 힘겹게 답했다.
“……같이 갈 호위를 붙여 주마.”
“아니에요, 저 혼자 금방 갔다 올 수 있어요.”
“하지만 저택 밖은 위험하단다, 이본. 호위도 없이 어찌 여인 혼자 돌아다니겠느냐.”
“그 저택 밖에서…… 저는 평생을 살아왔는걸요.”
그녀는 조금 시무룩해진 채 말했다.
그 말을 알아들은 공작의 얼굴이 일순 일그러졌다.
세상 그 누구보다 귀하고 풍족하게 자라야 했을 이본.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던 막내딸이, 자신이 모르는 더럽고 위험천만한 곳에서 살아간다는 상상만 하면 자다가도 눈이 번쩍 떠졌다.
딸에 대한 그리움으로 페넬로페를 데리고 왔지만, 죄책감은 조금도 덜어지지 않았다.
“저 괜찮아요, 아버지.”
마치 그 심정을 모두 알고 있다는 듯, 이본이 공작을 보며 밝게 웃었다.
따듯함을 품고 있는 푸른 눈을 한참 동안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공작이 이윽고 입을 열었다.
“……마차를 내주마. 이것까진 양보 못 해.”
“감사히 받아들일게요.”
“해가 지기 전엔 꼭 돌아오렴.”
“네.”
이본은 다시 환하게 웃었다.
공작은 그리워서 사무치던 딸의 얼굴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꼭 그럴게요, 아버지.”
하염없이.
“이본의 외출을 준비해 주게.”
집무실로 돌아온 공작은 집사에게 짧게 명령을 내렸다.
“네, 알겠습니다.”
충실히 대답한 집사가 되물었다.
“이본 아가씨와…… 이야기는 잘 나누셨습니까?”
공작은 그런 집사를 돌아보았다.
주름이 자글자글한 눈이 미약한 기대로 반짝였다.
잃어버린 막내딸을 기다린 것은 비단 공작과 두 아들뿐이 아니었다.
페넬로페에겐 잔인한 일이지만, 사랑스러운 공녀의 어린 시절을 기억하는 모든 이들이 그녀가 돌아오길 간절히 기다렸다.
“……펜넬.”
공작은 대답 대신 무겁게 집사의 이름을 불렀다.
“예, 주인님.”
오랫동안 그를 보살핀 충복은, 심상치 않은 주인의 기색을 금세 알아차리고 고개를 조아렸다.
공작은 무거운 목소리로 읊조렸다.
“……그 애에게 미행을 붙이게.”
“네? 무슨…….”
“추적 마법을 할 수 있는 마법사로.”
집사의 눈이 흔들렸다.
그러나 공작의 말은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그리고…… 마법사들과 1사단을 저택 뒤에 모두 집합시켜. 데릭 그놈도 통신 마법으로 속히 불러들이게.”
이본을 태워 갈 마차가 저택 앞에 도착했다.
창밖을 바라보는 공작의 눈이 차갑게 침잠했다.
“저택에 비상이 걸렸다고.”
* * *
뷘터 베르단디는 해가 다 질 무렵에서야 상단 골목에 들어섰다.
온종일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닌 탓에 몸이 부서지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그는 쉴 수 없었다.
모아 온 문서와 정보들 중 쓸모 있는 것을 분류하고, 재생하고, 고대 문자들을 해석해야 했다.
고대 레일라에게 타격을 줄 수 있는 것은 고대 마법뿐.
그러나 치열했던 전쟁 끝에 고대 마법사들은 명맥이 끊겼고, 그들이 사용한 마법은 사장된 상태였다.
게다가 오랫동안 숨죽인 채 힘을 키워 온 레일라에게 대적하려면 단순한 힘, 그 이상이 필요했다.
뷘터는 전국을 돌아다니며 고(古) 문서들을 닥닥 끌어모았다.
진실의 거울을 다시 만들기 위해서.
오늘도 과연 진실인지 거짓인지 모를 재료들을 구하느라 탈진에 이른 그는 천천히 계단을 올랐다.
‘히드라의 뿔, 페일롯의 날개, 우르투스 호수 바닥 수은…….’
오늘 밤 그와 함께 밤을 새울 전리품들이었다.
상단 거리에서도 가장 깊고 음침한 곳에 있는 그의 상단은 벌써 어둠에 잠겨 있었다.
문고리를 잡고 나지막이 주문을 외자, ‘철컥-’ 하고 잠금이 풀렸다.
상단의 문은 그가 지정한 의뢰인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열 수 없는 마법이 걸려 있었다.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 기다리다 돌아가 버리는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가령, 보라색 꽃을 받고도 눈 하나 깜짝 않고 매정하게 떠나 버린 여인이라든지…….
끼이익-.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지친 걸음을 막 한 발짝 안으로 들였을 무렵이었다.
그는 흠칫 걸음을 멈추고, 날카롭게 어딘가를 노려보았다.
“누굽니까.”
응접 테이블과 소파 너머 깊숙한 안쪽.
어둠이 잠긴 곳에서 누군가 뚜벅뚜벅 걸어 나왔다.
“이제야 오셨네요.”
저벅-. 바깥에서 들어오는 희미한 빛의 경계가 맞물리는 곳에서, 발걸음은 우뚝 멈췄다.
“의뢰를 맡기러 왔어요.”
나약하고 여린 음성은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뷘터를 바라보는 눈동자가 기이하게 번뜩였다.
“아니…… 잃어버린 물건을 찾으러 왔어요.”
“…….”
“베르단디 후작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