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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엔딩은 죽음뿐-209화 (209/243)

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209화

컴컴한 사무실 안에 소름 끼치는 정적이 내려앉았다.

침묵하던 뷘터는 이내 ‘끼이익-’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섰다.

밖을 위험 요소로부터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다행히 문을 닫아도 창을 통해 들어오는 희미한 달빛으로 인해 사물을 구별할 정도는 되었다.

그럼에도 유달리 이본이 있는 곳만 컴컴한 어둠이 도사렸다.

거칠어지는 호흡을 억누르며, 그는 차분히 입을 열었다.

“……여긴 대체 어떻게 들어온 겁니까.”

“문이 열려 있던걸요.”

이본은 어깨를 으쓱이며 천진하게 답했다.

그럴 리 없었다. 그러나 뷘터가 부정하기도 전에 이본이 앞섰다.

“그보다…… 제 물건을 돌려주시겠어요, 후작님?”

“무슨 이야기를 하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레이디. 오늘은 날이 너무 늦었으니, 내일 다시 오는 게…….”

“제가, 얼마나 더 후작님께 실망해야 하나요?”

문득 그녀가 어둠과의 경계를 넘어 한 발짝 앞으로 나왔다.

달빛에 그녀의 얼굴이 반쯤 드러났다.

반쪽짜리 얼굴은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차오른 채 잔뜩 흐려져 있었다.

“제가, 제가 마을에서 얼마나 힘들게 살아가는지 다 보셨잖아요.”

이본이 애처롭게 흐느꼈다.

“그리고…… 제가 에카르트 공작가의 잃어버린 공녀라는 걸 다 알았으면서…… 흑.”

“…….”

“어떻게 그렇게 매몰차게 저를 내버려 두실 수가 있으세요?”

뷘터는 그 순간 이를 악물었다.

필사적으로 외면해 온 자신의 죄악.

진짜 공녀가 돌아오면 상처받을 페넬로페를 위해, 이본이 공작의 친딸임을 알면서도 아무런 언질조차 하지 않았다.

그것을 당사자가 후벼 파자, 일순 눈앞이 아득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마물의 습격을 받았을 때, 저 정말 죽을 뻔했어요, 후작님. 다친 이마가 너무 아팠어요.”

“…….”

“하지만 다친 것보다 더 아픈 건…… 후작님이 이유 없이 저를 멀리하고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는 거예요.”

“…….”

“왜 이후로 봉사 활동하러 안 오셨어요? 기다렸어요.”

솔레일에서 페넬로페를 집으로 데려다준 직후였다.

무의식의 공간 속에 보라색 장미꽃이 조그맣게 피어난 것은.

꽃이 핀 이유도 알지 못하면서, 그는 멀리서 이본을 지켜보기만 할 뿐 따로 만나지 않았다.

“공작저에 오고 난 이후에, 성인식에서 후작님을 바로 알아보고 전 너무 기뻤는데…… 어떻게 저를 가짜 공녀를 해친 범인으로 몰 수가 있어요? 어떻게 저한테 그렇게…….”

“…….”

“……잔인하게 구실 수가 있어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잠잠한 뷘터를 이본이 기어이 헤집었다.

그녀의 한쪽 볼을 타고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뷘터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한땐 그녀의 저 눈물 가득한 푸른 눈을 보면 무엇이든 들어주고 싶었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그것은 건조하고 메마른 청록색 눈동자로 덮이기 시작했다.

모두가 자신을 믿어 주지 않을 것을 이미 알고 있다는 듯, 체념을 넘어 무심하기까지 하던 그 눈빛.

그는 이윽고 눈을 떴다.

“당신이 다친 건 마물 때문이 아니라 솔레일에서 페넬로페 영애가 쓴 마법 때문이겠지요.”

튀어나온 음성이 차갑기 그지없었다.

이본의 물기 가득한 눈이 흔들렸다.

“네? 그, 그게 무슨…….”

“마물에게 습격당한 사람들은 대부분 환부가 넓고 출혈량이 많은 편이었지요.”

“…….”

“그에 비하면 당신은 발견 당시 찢어진 이마를 제외하곤 가벼운 타박상뿐이었다는 걸 이미 확인했습니다. 마치…… 떨어진 무언가에 맞은 듯 말입니다.”

마물이 아니면 무엇이 이본을 상처 입게 하였는가.

페넬로페가 쓴 광역 마법으로 동굴이 무너졌으니, 그 잔해로 인한 것이라면 앞뒤가 맞아 떨어졌다.

레일라라는 새로운 전제가 생긴 후 뷘터는 그녀의 행적 조사부터 다시 시작했다.

그러자 이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원래 살던 마을이 아닌, 꽤 멀리 떨어진 마을에서 갑자기 나타난 마물 떼에 습격을 당한 그녀.

게다가 습격한 날이 하필이면, 솔레일에서의 일이 일어난 직후였다.

뷘터는 거침없이 다음 말을 내뱉었다.

“베키라는 하녀를 통해 독을 구하고 자작극을 사주한 것도 이미 알고 있습니다. 영혼은 거짓말을 하지 않으니까.”

공작저 후원에서의 대화 이후, 엄청난 마력을 소모하여 영혼 소환술을 진행한 그는 참담함을 금치 못했다.

왜 진작 그녀를 믿지 못했을까.

당장이라도 이 사실을 공작저에 밝히고 누명을 벗겨 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끝내 할 수 없었다.

제국에서 금기한 소환술을 쓴 것도 있었지만, 결정적으로 페넬로페가 원치 않았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공작저를 떠나지 않으면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으니까.

“더 할 말이 있습니까?”

뷘터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경고하듯 물었다.

“그, 그런, 저는 그런 짓을…….”

날카로운 사실들에, 이본이 울먹이며 한 발짝 더 앞으로 나왔다.

그늘에 가려져 있던 나머지 반쪽 얼굴이 드러났다.

눈물이 뚝뚝 내리흐르던 반대쪽 얼굴과는 달리, 나머지 반쪽 얼굴은 소름끼치도록 무표정했다.

“안 속네.”

반은 울고 반은 멀쩡한, 그 기괴한 얼굴로 그녀는 천천히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그럼 같잖은 가면 놀이는 집어치우고, 본론이나 말하죠.”

“…….”

“제 물건, 돌려주세요.”

“무엇을 찾는지 모르겠지만, 제게 없습니다.”

스산함이 목뒤를 스쳐 지나가는 것을 느끼며, 뷘터가 애써 덤덤하게 말했다.

이본이 즉각 대꾸했다.

“똑같군요, 반응이.”

“무슨…….”

“페넬로페. 그년도 똑같이 발뺌부터 했었죠. 그러다 나한테 잡아먹히기 직전 허겁지겁 도망쳤지만.”

- 나, 저택에서 세뇌당했어. 중간에 간신히 저지하고 도망쳐 나온 거야.

이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페넬로페가 했던 말이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다시 한번 눈앞이 아득해졌다. 그는 새어 나오는 침음을 가까스로 삼켰다.

“몰래 저택 밖으로 빼돌리면 내가 모를 줄 알았겠지? 그럴 거면 제 오라비에게 여기 온 것을 들키지나 말든지, 가엽게도.”

“…….”

“뭔가 좀 바뀐 게 있을 줄 알았더니, 그 애는 저번 삶처럼 멍청한 건 여전하더라고요.”

“…….”

“사족은 이쯤이면 된 것 같고…….”

말끝을 흐리던 그녀가, 불현듯 눈을 번뜩이며 되뇌었다.

“그만 내놔, 내 조각.”

“저한테, 없습니다.”

“그럼 이건 어때?”

그녀가 싱긋 웃으며, 한 손을 주머니에 집어넣어 무언가를 꺼냈다.

빛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것, 거울 조각이었다.

“이걸로 내가 네 머리를 뒤진다고 해도?”

“소용없을 겁니다.”

뷘터는 그것을 바라보며 덤덤히 말했다.

이미 수많은 상황을 가정하고 단단히 대비를 해 둔 상태였다.

그의 말에 이본이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왜지?”

“당신이 제게 걸었던 세뇌는 풀린 지 오래니까.”

“그걸 어떻게 확신하나요, 후작님?”

“전 더 이상 당신이 안타깝지도, 가엾지도 않습니다. 당신에게 남은 건…….”

“…….”

“오로지 혐오와 역겨움뿐이지요.”

뷘터의 발언이 타격이 있는지 이본의 고운 미간이 조금 일그러졌다.

“그렇단 말이지…….”

그러나 그녀는 의외로 고개를 끄덕이며 세뇌가 완전히 풀렸다는 뷘터의 말에 수긍했다.

그러더니 주머니에서 꺼낸 조각을 다시 집어넣는 게 아닌가.

눈살을 좁힌 채 그것을 예의 주시하던 뷘터가 움찔할 무렵, 그녀가 한 발짝 다가왔다.

눈치채지 못한 사이, 어느새 그들은 세 발짝 남짓만 남겨 놓은 상태였다.

“……수백 년 동안 너희 마법사 놈들이 착각하는 게 하나 있어.”

그녀가 다시 입을 열자 뷘터는 바짝 긴장했다.

차근차근 거리를 좁히던 레일라처럼, 그의 손도 차근차근 품을 향해 다가갔다.

안에 있는 지팡이를 향해.

“내가 진실의 거울 조각이 없으면 세뇌를 하지 못할 거라 생각하지.”

뷘터의 눈이 일순 부릅떠졌다. 그건 당연한 전제였다.

“그럼…….”

“상식적으로, 상극인 마법사 놈들이 만든 거울을 통해서 힘을 쓴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

이본이 싱긋 웃었다. 뷘터는 순식간에 심각해진 얼굴로 성급히 되물었다.

“무슨 소립니까.”

“그러니까…… 그 반대란 소리야. 거울 조각은 오히려 내 힘을 억제시켜 주는 거라고.”

“……그게.”

“내가 인간들의 머릿속을 주무르다가 힘을 조절하지 못해서 뇌를 우그러뜨릴 수도 있으니까.”

다시 한 발짝, 그녀가 다가왔다.

뷘터는 지팡이를 바짝 고쳐 잡았다.

완전히 빛에 드러난 이본의 눈이, 먹잇감을 노리는 뱀처럼 희번덕거리며 빛났다.

“그런데 뷘터, 내가 지금 먹이를 먹은 지 얼마 안 돼서 살살 조절할 자신이 없거든?”

“…….”

“그러니, 내가 네 뇌를 터뜨리기 전에 조각이 어디 있는지 밝히는 게 좋을 거야.”

그 말과 동시에, 그녀가 번뜩 뷘터의 머리 쪽으로 손을 뻗었다.

미처 피할 새조차 없을 만큼 빠른 기습이었다.

날카로운 손톱이 그의 피부에 닿는 순간.

치이이익-!

“아악-!”

이본이 괴성을 지르며 뒤로 확 물러섰다.

‘치이익, 치이익-’ 무언가가 불에 지글지글 익는 소리가 연달았다.

그녀는 시커멓게 타들어 간 채 연기가 솟아오르는 손을 부여잡고 뷘터를 찢어 죽일 듯 노려보았다.

“이게 무슨……!”

“소용없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뷘터는 괴로워하는 그녀를 무감각하게 바라보며 손을 들어 생채기가 난 이마를 매만졌다.

검지에 투박한 쇠반지가 빛을 내며 반짝였다.

고대 마법을 직접 사용할 순 없어도, 그에겐 몸을 지킬 만한 강력한 아티팩트들이 있었다.

“고대 마법사 놈들이 남긴 유물이군.”

그를 알아본 이본이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포기하십시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지팡이를 꺼내 든 뷘터가 서늘하게 읊조렸다.

“당신은 아무것도 가져갈 수 없습니다. 설령 이 유물을 파훼하고 제게 세뇌를 걸더라도 그 즉시, 의식이 사라지도록 설계해 뒀으니까.”

“…….”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부디 제 손으로 영애를 해치지 않게 도와주십시오. 힘든 삶을 살아가고 있는 이들을 불쌍히 여기던 그 모습들이, 다 거짓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는 꽤 간절한 눈으로 이본을 설득하려 들었다.

굶어 죽는 아이들을 걱정하는 그 상냥한 얼굴, 신분 사회의 불합리함을 서글퍼하던 그 진실한 모습들이 다 거짓일 리는 없지 않은가.

아니, 그는 천사 같은 그녀에 대한 기억들이 모조리 레일라의 농간이라는 걸 쉽사리 받아들일 수 없었다.

마지막 희망을 담아 그녀를 바라보고 있을 무렵.

“하, 하…….”

제게 겨누어진 지팡이 끝을 가만히 노려보던 이본이 문득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한 번 해 봤으니, 과거보단 쉬울 줄 알았는데…… 상황이 참 재밌게 돌아가고 있어.”

“…….”

“누구보다 날 사랑하던 네가, 이젠 누구보다 앞장서서 내 앞길을 막고 있다니.”

뜻 모를 말에 뷘터는 눈살을 찌푸렸다. 마귀의 유혹처럼 속삭이는 그녀의 말에 답하지 않았다.

그는 이본을 동정했을지언정, 사랑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그런 뷘터의 머릿속을 훤히 꿰고 있다는 듯 이본은 여유롭게 웃었다.

“아, 넌 기억 안 나려나? 날 사랑한다는 이유로 지켜 온 신념도 마법사의 의무도 모두 버린 채, 내게 죽을 때까지 마력을 바치겠노라고 맹세한 네가, 갑자기 내 뒤통수를 치고 시간을 돌렸던 일 말이야.”

“…….”

“이 세상을 내 손안에 쥐는 것을 바로 코앞에 둔 순간, 갑자기 먼 과거로 끌려온 기분을 알아?”

“…….”

“그건 아주, 더럽고, 개 같아.”

짓씹듯이 한 자, 한 자 힘주어 내뱉은 이본이 슬금슬금 몸을 옆으로 움직였다.

“무슨 소리인지, 저는 알지 못합니다.”

그에 따라 뷘터 또한 경계를 풀지 않은 채 반대편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래서 이번엔 더 촘촘히 그물망을 짜 봤어. 특히 내 뒤통수를 친 네게 공을 많이 들인 편이었지. 조금도 눈치채지 못하도록, 아주 조금씩, 천천히…….”

“…….”

“그런데 페넬로페, 그 앙큼한 년이 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다들 하나같이 내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걸까?”

“그만.”

뷘터는 짤막하게 페넬로페를 모욕하는 그녀를 저지했다.

그들은 어느새 소파 두 개를 사이에 둔 채 대치하는 상태가 되었다.

“당신은 오늘 여기 온 것을 후회할 겁니다.”

지팡이 끝에 매달린 흰빛 덩어리가 점점 커졌다.

고대 유물 덕에 세뇌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 이상, 이본을 제압하긴 어렵지 않았다.

언제 공격을 감행할지 시간을 재는 뷘터를 보며 그녀가 짙은 미소를 지었다.

“지금이라도 얌전히 조각을 내놓는 게 어때?”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그래, 그럼.”

고개를 한 번 끄덕인 이본이 곧바로 무언가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사무실 구석 한쪽에 푸른 마법진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레일라들이 쓰는 소환 주술이었다.

‘마물 소환이다!’

그것을 알아챈 뷘터는 더 볼 것 없이 곧장 주문을 외웠다.

“리베이라 불칸……!”

그때였다.

“라온.”

이본의 나지막한 부름과 동시에, 마법진에서 무언가 튀어나와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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