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210화
갑작스레 튀어나온 작은 인영을 확인한 뷘터는 숨을 멈췄다.
그는 기하급수적으로 커지고 있는 빛 덩어리가 매달린 지팡이 끝을 황급히 옆으로 치웠다.
콰아앙-!
간발의 차로 이본이 있는 쪽을 빗겨 나간 공격 마법이 벽에 맞고 거대한 굉음과 진동을 일으켰다.
그러나 건물에 몇 겹으로 걸어 놓은 강화 마법 덕분에 벽을 뚫진 못했다.
“으윽……!”
마법이 휩쓸고 지나간 사무실 안은 순식간에 쑥대밭이 됐다.
피어오른 연기 사이로 털끝 하나 다치지 않은 여자와 사자 가면을 쓴 어린아이가 드러났다.
“내가 분명 촘촘히 짰다고 했지.”
이본이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뷘터의 얼굴이 고통스럽게 찌푸려졌다.
“라온!”
영특해서 유난히 아끼던 아이였다.
그러나 사자 가면 틈으로 보이는 라온의 눈은 흐리멍덩한 채 초점이 사라져 있었다.
“대체, 대체 언제 라온을……!”
“원래대로라면 그날, 라온을 미끼로 따라온 네가 진정한 내 수족으로 거듭났어야 했는데……. 넌 네가 미끼를 둔 거라 생각했겠지?”
그녀가 허연 이를 드러내며 미소 지었다.
성인 마법사보다 어린 마법사의 뇌를 주무르는 게 쉬운 건 당연했다.
작은 불행의 씨앗을 심어 놓는 것엔 짧은 시간이면 충분했다.
“……아, 그러고 보니 그것도 페넬로페 그년 때문에 틀어졌네?”
그러나 애당초 세운 계획이 모두 틀어진 이상 무용지물이었다.
버린 패라고 생각했었는데…… 운이 좋았다.
비열한 웃음을 지으며 이본이 손가락으로 뷘터를 가리켰다.
“라온, 가서 네 스승이 꽁꽁 숨겨 놓은 내 물건을 가져와.”
“라온! 정신 차리거라!”
뷘터는 사자 가면을 절박하게 응시하며 고개를 젓다가, 다급하게 기절 주문을 외웠다.
“에스 파라……!”
“하지 않는 게 좋을걸, 상냥한 뷘터 베르단디.”
하지만 주문을 다 외기도 전에 저지하는 말이 돌아왔다.
“내가 라온의 머릿속을 뒤져서, 아이들과 에밀리를 빼돌린 안전가옥으로 먼저 가기 전에.”
“크윽, 당신…….”
뷘터는 흔들리는 눈으로 이본을 응시했다.
짧은 순간, 수없이 많은 번뇌가 휘몰아쳤다.
설마 하니 라온에게 손을 끼쳤을 줄은 몰랐다.
솔레일에서 돌아온 이후 몇 번이나 라온을 검사했지만, 세뇌의 영향을 받은 흔적이 전혀 없었기에.
“지팡이 내려요.”
“…….”
“얌전히 조각만 주시면 아이들은 건들지 않을게요, 후작님. 저도 아이들을 해치긴 싫어요.”
조각이냐, 아이들의 목숨이냐.
답을 내리는 건 쉬웠다.
이본을 향해 빳빳이 쳐들고 있던 지팡이가 서서히 아래로 내려갔다.
그 순간, 이본이 중얼거렸다.
“다흐 티 뭄.”
그러자 바닥에서 검고 투명한 아지랑이들이 솟구쳐 올랐다.
“으윽!”
아차 할 틈 없이 그것들에 사지를 결박당한 뷘터는 ‘쿵’ 하는 둔탁한 소음과 함께 바닥에 무릎 꿇려졌다.
“움직이지 마세요. 후작님의 사지가 절단되는 걸 보면 마음이 너무 아플 것 같으니까.”
산뜻한 목소리로 무시무시한 말을 속삭인 이본은, 비교적 상태가 멀쩡한 소파에 걸터앉아 흥얼흥얼 콧노래를 불렀다.
라온은 쉽게 벽에 감춰진 비밀의 문을 찾아 열었다.
공간의 주인이 체념한 상태였기에 아이의 거침없는 발길을 막아서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얼마 후 라온은 손아귀에 뿌리째 뽑힌 꽃 한 송이를 들고 벽 속에서 자박자박 걸어 나왔다.
“지독하네.”
그것을 건네받은 이본이 꽃의 끄트머리를 잡고 달랑달랑 흔들며 짤막한 감상을 내뱉었다.
뽑힌 보라색 장미꽃의 뿌리는, 페넬로페에게 받은 거울 조각을 악착같이 숨기려는 것처럼 가닥가닥 그것에 엉겨 붙어 있었다.
바닥에 엎드린 채 그런 이본을 올려다보며 뷘터는 이를 악물었다.
“내겐 분홍 장미를 바치더니. 하여간 인간 사내들이란.”
우습지도 않다는 듯 혀를 찬 이본은 망설임 없이 조각을 잡아 뜯었다.
우드득-.
뿌리가 상한 장미꽃은 빠르게 꽃잎을 떨어뜨리며 시들었다.
이본은 그것을 쓰레기처럼 뷘터의 앞에 툭 집어 던졌다.
그리고 엄지와 검지를 입에 대고 ‘휘이!’ 세게 휘파람을 불렀다.
얼마 안 가 ‘와장창!’ 창문을 깨부수고 거대한 새 마물 한 마리가 들이닥쳤다.
“끼루루룩-!”
“라온, 넌 저 마물을 타고 안전가옥으로 가 있어.”
거칠게 날개를 푸닥거리는 마물을 가리키며 이본이 명령했다.
뷘터가 눈을 부릅떴다.
“약속이, 약속이 다르지 않습니까!”
“약속? 하하, 레일라에게 많은 것을 기대하네.”
“제기랄! 라온! 멈추거라! 라……! 크윽!”
속았다.
고분고분 마물 위에 올라타는 라온을 바라보며 뷘터가 절박하게 외쳤다.
그러나 얼마 안 가 관절을 파고드는 어마어마한 고통에 그는 신음할 수밖에 없었다.
“라온, 제발…….”
“끼루루룩-!”
아이를 태운 마물은 지체 없이 창문 너머로 날아올랐다.
그의 얼굴에 절망과 좌절이 서서히 드리워졌다.
“왜…… 왜 이렇게까지 하는 겁니까! 원하는 대로 조각을 넘겼잖아!”
뷘터는 일그러진 얼굴로 처절하게 소리쳤다.
소파에 걸터앉아 거울 조각을 만지작거리던 그녀가 몸을 일으켰다.
“그냥, 재밌잖아.”
그녀는 쭈그려 앉아 손가락으로 그의 턱을 들고 눈을 맞췄다.
“선량한 얼굴이 죄책감으로 일그러지는 게.”
“……당신, 미쳤군.”
“그럴지도.”
뷘터가 치를 떨며 뱉은 말에 이본은 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참혹한 동족 학살에서 홀로 살아남았다.
또한, 차라리 그때 죽는 게 나을 만큼 지루한 시간을 숨죽인 채 버렸다.
그리고 마침내 복수를 완성하기 직전 과거로 회귀했다.
미치지 않고 배길 수가 있겠는가.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네 손으로 남은 마법사들을 도륙 내는 꼴을 보는 것도 즐거웠지만…….”
“…….”
“목숨 걸고 지키려던 세상이 멸망해 가는 걸 무력하게 바라보며 미쳐 가는 네 얼굴을 구경하는 것도 꽤 재밌을 것 같네.”
“후회할 겁니다.”
뷘터가 섬뜩한 눈으로 그녀를 노려보며 짓씹듯 내뱉었다.
과거에선 볼 수 없던 낯선 모습이었다.
그녀는 문득 스스로도 알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모든 것들이 정말로 동족의 복수를 위한 건지.
아니면, 더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 인간들을 향한 증오심인지.
“사랑하는 페넬로페가 내 손에 어떻게 죽어 가는지 똑똑히 지켜보세요, 후작님.”
“…….”
“그럼 이만.”
그의 턱을 치켜든 손을 털고, 조각을 챙긴 채 자리에서 일어날 무렵이었다.
“파이어 피숀.”
불현듯 뷘터가 작게 주문을 외웠다.
화르륵- 그들 사이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시든 꽃잎 줄기에 작은 불길이 붙었다.
“뭐…….”
이본이 멍하니 그것을 내려다보던 찰나.
콰아아앙-!
폭발이 일어났다. 동시에 이본의 작은 신영이 집어 던져지듯 뒤로 튕겨 나갔다.
쿠르르릉-.
건물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타오르는 불길과 재만 남은 터는 원래의 형체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참담했다.
그러나 이 거대한 폭발에도 주변은 고요했다.
마치 외부에선 폭발도, 폭음도 아무도 보이고 들리지 않는 것처럼.
한동안 불꽃이 튀는 소리를 제외하고 사방이 고요했다.
그러나 얼마 안 가, ‘덜그럭’ 하는 소음과 함께 무너져 내린 건물 잔해가 움직이더니, 콰앙-!
쌓인 잔해 일부가 반대편으로 거칠게 날아갔다.
“흐, 으윽…….”
뻥 뚫린 구멍 사이로 기어 나온 것은, 얼굴 한쪽이 녹아내린 끔찍한 몰골의 여자였다.
“빌어먹을, 뷘터 베르단디-!”
비척비척 걸어 나온 이본이 악을 지르며 제 몸을 더듬었다.
넝마주이가 된 옷은 물론이고, 그 사이로 뼈를 드러낸 살점들이 시커멓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인간이라면 도저히 살아날 수 없는 끔찍한 몰골이었다.
엉망이 된 몸에서 시선을 돌린 이본은 눈을 번뜩이며 주변을 샅샅이 훑었다.
하인을 두 명이나 잡아먹은 것이 무색할 만큼, 비축해 둔 힘을 몸을 소생시키는 데 몽땅 소요하고 있었다.
당장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지만, 일단 뷘터라도 먹어 치워야 했다.
“흐, 흐익!”
그러나 찾는 이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엄한 인간과 눈이 맞닥뜨렸다.
얼굴이 낯익었다. 공작저에 고용된 마법사였다.
“하! 여우 같은 늙은이, 쥐새끼를 잘도 붙여 놨네.”
마부를 쉽게 따돌렸기에, 또 다른 추적이 붙어 있을 거란 건 미처 예상치 못했다.
건물 밖에 숨어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것처럼 보이는 마법사는 겁에 잔뜩 질린 채 벌벌 떨었다.
어쩌면 당연했다.
모시는 아가씨가 들어간 건물이 뜬금없이 무너져 내린 것도 모자라, 일반인들 눈에는 보이지 않는 엄청난 폭발에도 불구하고 흉측한 몰골로 살아남은 채 제게로 다가오고 있었으니.
“이리 오세요, 마법사님.”
끔찍한 몰골의 여자가 천천히 건물 밖으로 걸어 나왔다.
반 줌 남은 사랑스러운 분홍빛 머리가 화마에 휘날렸다.
“흐, 흐으!”
마법사는 고개를 저으며 뒷걸음질 쳤다.
그러나 실제로는 꿈쩍도 할 수 없었다. 이본은 몸을 재생시키던 힘을 세뇌로 돌렸다.
“시, 신이시여…….”
인간은 죽음을 목전에 두고 언제나 신을 찾았다.
이본은 그것이 너무나도 우스웠다.
빌어먹을 용이 근간인 제국에 신이 어디 있겠는가.
“내가 너의 신이란다.”
물기로 반질반질한 남자의 눈에, 검붉게 녹아내린 입술이 찬찬히 호선을 그리는 게 비쳤다.
* * *
공작저에 도착했을 땐 자정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다행히 빈 마차를 끌고 수도 외곽을 한 바퀴 돌게 한 후 시간 맞춰 돌아가게 한 것이 통했는지 저택은 불이 모조리 꺼져 있었다.
대문에서 꽤 떨어진 곳에 도착한 그녀는 천천히 발걸음을 죽여 현관을 향해 걸었다.
막 정원을 지나치던 때였다.
“늦었구나.”
불쑥 앞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누, 누구…….”
당황한 이본은 걸음을 우뚝 멈추고 겁에 질린 채 물었다.
현관 앞 음영에 서 있던 사람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달빛에 그의 얼굴이 드러났다.
“고, 공작님?”
이본은 깜짝 놀라 에카르트 공작을 불렀다.
문득, 그가 번뜩 손을 치켜들었다.
더는 다가오지 말란 신호 같아서, 이본은 눈을 커다랗게 뜬 채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착각이었다.
스스스스슷-.
공작이 손을 들기 무섭게 정원에서 시커먼 인영들이 천천히 몸을 드러내며 다가오기 시작했다.
하나, 둘 조명에 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빠져나갈 틈 없이 이본을 감싼 기사들은 모조리 칼을 빼 들고 있었다.
“이, 이게 다…… 무슨 일이예요?”
주변을 둘러본 이본이 겁에 질린 얼굴로 공작을 돌아보며 물었다.
공작은 물론이고 그의 옆에 선 데릭, 레널드마저 서늘한 눈으로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의 눈이 미약하게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