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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엔딩은 죽음뿐-211화 (211/243)

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211화

“네게 몇 가지 질문을 하고자 한다, 이본. 신중하게 대답해 주었으면 하구나.”

“네? 어, 어떤…….”

하얗게 질린 그녀의 안색에도 공작은 차가운 눈빛을 풀지 않았다.

“지금까지 어디에 있다 온 게냐.”

“외출에서 돌아온 후에 잠깐 산책을 하다가 숲에서 깜빡 잠이 들었어요. 그래서 허겁지겁 돌아오는 길인데…….”

“그럼 계속 저택 내에 있었단 말이냐?”

“네, 네. 그럼요.”

“거짓말을 하는군.”

공작이 싸늘하게 일갈했다.

“빈 마차가 돌아온 것을 내 눈으로 확인했다.”

“그, 그건…….”

공작의 지적에 이본은 눈에 띄게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이내 힘겹게 토로했다.

“사실은…… 잠깐 볼일을 보는 사이 마차가 절 두고 먼저 가 버렸어요. 그래서 간신히 다른 마차를 얻어 타 뒷문으로 돌아온 거예요, 공작님.”

“돌아온 마부는 미친 사람처럼 횡설수설하더군. 꼭 정신계열 마법에 걸리기라도 한 듯이 말이다.”

이본의 변명에 공작이 뜬금없는 말을 했다.

공작저에 고용된 마법사는 마부를 고칠 방법이 없다며 낭패 어린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여우 같은 늙은이. 마법사까지 대동해서 확인하다니.’

이본은 뒤로 숨긴 주먹을 남모르게 꽉 쥐었다.

“저, 저는 모르는 일이에요! 정말이에요.”

“네 말이 사실이라면 왜 바로 내게 말하지 않았지?”

“바로 말씀드리지 않은 건…….”

이본은 물기 가득한 눈으로 제게 몰린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공작님께서 저를 돌려보내신 걸까 싶어서……. 모른 척하면 여기 더 있을 수 있을 거란 생각에…….”

그녀는 끝내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가녀린 눈물이 턱을 타고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누가 보아도 안쓰러운 그 모습에 보다 못한 누군가 만류하고 나섰다.

“아버지, 밤이 늦었습니다. 멀쩡히 돌아왔으니 된 것 아닙니까. 혼을 내는 건 내일 하시지요.”

며칠간 잠을 자지 못해 눈에 핏발이 잔뜩 선 데릭이었다.

사라진 이본을 찾기 위해 자신을 소환하고 기사들을 집합시킨 거라 여긴 그의 얼굴에 깊은 피로함이 떠올랐다.

“오늘, 상단 거리에는 왜 간 것이지?”

그러나 공작은 요지부동이었다. 이본이 기죽은 얼굴로 답했다.

“사, 상단 거리요? 저는 그곳이 어딘지도 잘 모르는…….”

“페넬로페의 성인식 전에 네 하녀를 맡던 베키라는 아이가 다른 이들에게 상단 거리의 위치를 묻고 다녔단 증언이 있더구나.”

“아버지! 그건 이미 끝난 일이지 않습……!”

“입 다물어라, 데릭!”

데릭을 부리부리하게 노려본 공작은 다시 이본에게 시선을 돌려 말을 이었다.

“하녀장이 이유를 묻자 네가 시킨 물건을 사기 위함이었다고 답했다더군.”

이본이 외출한 사이 공작은 급히 하녀장을 불러들여 심문했다.

죽은 하녀에게 시선이 집중된 데다가, 오래간 공작저에 충성을 바쳐 일한 탓에 하녀장은 일찍이 조사 대상에서 제외됐었다.

그런 그녀의 증언이 추가되자, 사건이 새롭게 재구성됐다.

이본에게 쏠린 시선이 부러워서 죽은 하녀를 통해 독을 구하여 자작극을 했다던 페넬로페.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베르단디 후작의 말처럼 앞뒤가 맞지 않았다.

전담 하녀를 내버려 두고, 왜 하필 이본의 시중을 들던 이를 통해 독을 구한단 말인가.

게다가 그 하녀는 심문 도중 왜 갑자기 자살을 했고, 에밀리는 왜 페넬로페가 가출하자마자 자취를 감춘 건지.

“하녀장에게 성인식에 참여할 수도 있으니 미리 금배를 준비해 두라 했던 것도 너였더구나. 이게 어찌 된 일이지?”

공작은 의구심이 잔뜩 서린 눈으로 쐐기를 박았다.

처음 듣는 얘기에 레널드와 데릭의 얼굴이 놀라움으로 물들었다.

“……이본, 아버지의 말이 사실이냐?”

데릭이 멈칫 이본을 돌아보며 물었다.

“뭐야.”

오만상을 찌푸린 채 곰곰이 공작의 말을 되뇌던 레널드가 불쑥 중얼거렸다.

“그럼 페넬로페 걔가 자작극 벌인 게 아니라, 쟤가 독살하려고 그런 거…… 아니, 아니지, 해독제도 같이 구했으니까…….”

그는 그때 조사했던 것들을 다시 떠올려 보았다.

그러다 아직 술기운이 남은 머리가 깨질 듯 아파 와 “아오, 씨발!” 하고 욕설을 내뱉으며 제 머리를 주먹으로 퍽퍽 내리쳤다.

효과가 있는지 시야가 한결 명료해졌다.

“아버지, 설마…… 쟤가 자작극 벌이려고 한 건데 잔이 바뀌었다는, 뭐…… 그런 병신 같은 일은 아니죠?”

그는 아까부터 굳은 표정을 풀지 않는 제 아버지를 슬쩍 올려다보며 물었다.

“진짜……?”

돌아오는 답이 없었다.

“와! 저거, 저거……!”

마침내 깨우침을 얻은 레널드는 입을 떡 벌린 채 말을 잇지 못했다.

페넬로페가 쓰러졌을 때, 이본은 정말로 영문을 모르는 사람처럼 막막한 얼굴로 울면서도 페넬로페의 안부를 물었다.

누가 봐도 무고한 사람 같은 그 천진한 모습.

때문에 레널드는 후에 가서 이본도 용의자일지 모르지 않냐, 말하면서도 내심 찝찝했다.

그런데 그 모든 게 연기에 불과했다니.

“섣불리 결론 내리지 마라.”

기가 막혀 붕어처럼 입을 벙긋대는 레널드에게 핀잔을 준 데릭이 공작에 이어 물었다.

“이본, 네가 답해. 아버지의 말이 진정 사실이냐.”

“전…… 저는, 모르는 일이에요! 정말이에요!”

이본은 고개를 저으며 필사적으로 부정했다.

“상단 거리가 어딘지도 모르는데 제가 거길 왜 가겠어요, 공작님…….”

푸른 눈에 그렁그렁 차올랐던 눈물이 볼을 타고 뚝뚝 흘러내렸다.

억울함을 감추지 않고, 이본은 서럽게 울었다.

“집사.”

그때 공작이 나지막이 집사를 불렀다.

그녀가 돌아왔으니 감시를 붙인 마법사도 돌아왔어야 했다.

“공작님, 잠시 귀를…….”

뒤편에서 상황을 주시하며 대기하고 있던 집사가 황급히 다가와 작은 목소리로 소식을 전했다.

공작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었다.

30분마다 상황을 보고하던 마법사는 이본이 한 상단에 들어간 이후, 마물이 나타났다는 보고를 끝으로 연락이 두절됐다.

“이본.”

조금 전 마법사의 생명 신호마저 끊겼다는 소식을 접한 공작의 눈이 어둡게 침잠했다.

“마지막으로 질문하마.”

“흑, 흐으…….”

이본은 어깨를 들썩이며 겁에 질린 얼굴로 공작을 올려다보았다.

죽은 아내를 닮은 사랑스러운 분홍색 머리칼, 에카르트를 상징하는 맑은 벽안.

영락없는 딸의 모습이 분명한데, 그런데…….

“……어째서 물에 네 얼굴이 비치지 않는 것이냐.”

공작이 파르르 떨리는 입꼬리에 애써 힘을 주었다.

공작이란 지위에 있다 보면 종종 우연찮게 황궁에서 숨기는 기밀 사항들을 접할 때가 있다.

알려지지 않은 고대의 문서라든지, 설화 속에서나 등장하는 기이한 존재라든지…….

“아버지,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심각한 상황 중 다소 황당한 질문에 데릭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살을 좁히며 물었다.

레널드 또한 마찬가지였다.

“갑자기 물에 비치지 않는 건 또 뭡니까? 쟤가 뭐 귀신도 아니고…….”

“대답하거라, 이본!”

아들들의 질문을 무시한 채 공작이 이본을 채근했다.

그는 내심 그녀가 잘못 본 것이라고, 지금이라도 물에 제 얼굴을 비춰 보겠다고 답하길 바랐다.

그러나 이본은 고개를 숙인 채 하염없이 울기만 했다.

“흑, 흐윽, 흣.”

고요한 정적을 가르고 그녀의 서글픈 흐느낌만이 울려 퍼졌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였다.

“흐, 흐으, 흐흐.”

이본의 흐느낌이 점점, 웃는 소리로 변하기 시작한 것은.

“흐흐, 흐흐흐흐…… 하흐흐, 하하하!”

“…….”

“하…… 들켰네.”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이본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찰나, 저택 앞마당에 있는 모든 이들이 흠칫 몸을 굳혔다.

드러난 그녀의 얼굴은, 눈물로 흥건히 젖은 채 활짝 웃고 있었다. 재미있어 죽겠다는 듯.

“그냥 모른 척하시지 그러셨어요, 공작님.”

“너…….”

“그럼 그 알량한 목숨들, 좀 더 연명할 수 있었을 텐데.”

삼부자를 번갈아 보며 하는 말에 레널드가 발끈해서 버럭 소리쳤다.

“저게 미쳤나. 야, 너 무슨 말을 그따위로…….”

“드 옴메놈 하레흐.”

그 순간이었다.

돌연, 그녀가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땅을 향해 손을 뻗었다.

모두가 영문 모른 채 어리둥절해 하는 사이.

두두두두두-.

불현듯 땅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발밑으로 느껴지던 미약한 진동은 점점 거세지더니, 하나둘 휘청거리는 이들이 속출했다.

“무슨……!”

당황한 기사들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경계 태세를 갖추었다.

그때였다.

콰앙-!

불현듯 정원 한쪽 땅 속에서 무언가 폭발하듯 튀어나왔다.

부연 먼지 사이에서 튀어나온 것은 거대한 괴생물체였다.

상반신은 사마귀, 하반신은 지렁이로 이루어진.

“케에에에엑-.”

먹잇감을 발견한 사마귀의 입에서 침이 질질 흘렀다.

“집사, 내가 지금 술이 덜 깨서 그런데…… 저거, 마물 아니지?”

레널드의 현실 부정이 무색하게, 곧바로 누군가의 비명이 들려왔다.

“으아아악- 마물이다! 피해!”

그러나 마물 한 마리가 끝이 아니었다.

쾅, 쾅! 콰앙-!

처음 등장한 것을 시작으로 정원 곳곳이 폭발했다.

삼부자가 있는 저택의 현관 근처 화단 속에서도 한 마리가 튀어나왔다.

“저년 뭐예요, 아버지?”

레널드가 허겁지겁 검을 빼 들고 경악에 가득 차 소리쳤다.

나타난 여러 마리의 마물들 속에서 요요히 웃고 있는 이본이 보였다.

공작저에 오자마자 산책을 핑계로 온갖 곳을 돌아다니며 심어 둔 그녀의 씨앗들이었다.

“케에에에엑-!”

지렁이로 이루어진 하반신을 미친 듯이 꿈틀거리며 마물들이 사냥을 개시했다.

“전군! 마물을 막고 이본, 아니, 저 아이를 포박하라!”

순식간에 저택을 점령한 마물들의 모습에 넋을 놓고 있던 공작이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명령을 내렸다.

레널드는 이미 튀어나간 후였다.

“집사, 당장 황궁에 전보를 보내게! 저택 안에 사람들도 어서 대피시……!”

“케에에에엑-!”

불현듯 집사에게 서둘러 대피 명령을 추가하던 공작의 머리 위를 거대한 그림자가 덮쳤다.

그가 간발의 차로 몸을 날려 피했을 때.

채앵-! 레널드가 쏜살같이 달려와 내리 찍는 사마귀의 앞발을 쳐 냈다.

“씨발! 형, 뭐 해! 정신 차리고 아버지 엄호해!”

그 위험천만한 순간에도 가만히 서 있기만 하는 데릭을 향해 레널드가 거칠게 외쳤다.

“형-!”

‘오라버니.’

레널드의 목소리와 동시에, 데릭의 귓가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겹쳐 울려 퍼졌다.

- 오라버니.

- 오빠, 우리 축제 가면 안 돼?

아비규환 속. 데릭의 눈과 귀를 가린 것은 어린 여동생의 모습이었다.

- 보고 싶었어요, 오라버니,

- 오빠.

그의 손을 꼭 붙잡은 어린 여동생은 너무 신난다며 예쁘게 웃었다.

“이본.”

데릭이 손을 뻗으며 주춤주춤 앞으로 나아갔다.

레널드의 욕설 섞인 부름 따윈 전혀 들리지 않았다.

- 오빠!

눈 깜짝할 새 퍼레이드 행렬에 휩쓸린 이본이 점점 멀어진다.

자신을 보며 울고 있는 동생.

“안 돼, 이본. 내가 지금 갈게. 조금만 기다……!”

불쑥, 뻗은 손에 누군가의 보드라운 피부가 닿았다.

“오라버니.”

데릭이 눈을 떴다. 어느덧 훌쩍 큰 이본이 그를 꼭 붙들고 있었다.

“사냥이 끝날 때까지 제 인질이 좀 되어 주세요.”

이본이 어여쁜 얼굴로 웃었다.

퍼뜩 눈앞이 갠 데릭은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으악, 크아아악! 도와줘!”

“케에에에엑!”

챙, 채에엥-! 고요한 공작저는 온통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이게, 무슨…….”

낫 같은 앞발을 사정없이 휘두르며 꿈틀꿈틀 빠르게 기어 다니는 마물.

비명을 지르며 죽어 가는 기사들과 그 사이로 마물을 피해 몸을 날리는 레널드.

그리고.

“아버지.”

데릭의 눈이 부릅떠졌다.

집사의 부축을 받고 몸을 옮기는 공작의 뒤로 마물 한 마리가 바짝 따라 붙은 상태였다.

그는 곧바로 칼을 빼 들고 그쪽으로 달려가려 했다.

그러나 몸이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검은색의 아지랑이 같은 것으로 온몸이 꽁꽁 묶여 있는 게 아닌가.

“윽! 제기랄, 이게 무슨……!”

버둥거리는 것도 잠시, 데릭은 공작을 덮치는 마물의 모습에 호흡이 멎었다.

“아버지!”

사마귀의 앞발이 허공을 가르고, 공작을 내리찍으려던 그 순간이었다.

“데키나 레바티움-!”

콰아아앙-!

어디선가 거대한 빛 덩어리 하나가 쏜살같이 튀어나와 마물을 덮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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