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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엔딩은 죽음뿐-212화 (212/243)

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212화

* * *

“꼭 가야겠어?”

황태자는 탐탁지 않은 얼굴로 세 번째 같은 질문을 했다.

늦은 밤, 마법사 한 명과 여섯 명의 호위를 대동한 채 수도 북문에 도착한 우리는 마차를 타고 공작저로 이동 중이었다.

장거리 이동 마법을 시전한 황궁 마법사가 기어이 탈진했기 때문이다.

나는 잔뜩 찌푸려진 수려한 얼굴을 흘끔 곁눈질하며 시큰둥하게 단행다.

“죽일 거라고 했잖아요.”

“내 말은, 꼭 도착하자마자 지금 바로 가야 하느냔 소리야. 날이 밝고 갈 수도 있잖아.”

“이제 괜찮아요.”

“소리 하나 없이 픽 쓰러졌으면서, 괜찮긴 뭐가…….”

버럭 소리를 지르려던 그는 이내 한숨을 내쉬며 입을 다물었다.

곧바로 공작저로 가서 이본을 해치우겠다는 내 계획이 황태자는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늪지대에서 이클리스와 마물들을 향해 마법을 쓰고 기절한 직후부터 칼리스토는 나를 꼭 불면 날아갈 깃털처럼 대했다.

어찌나 유난을 떨었는지, 제국군의 진영에서 다시 눈을 떴을 때 세드릭이 기가 질린다는 얼굴로 마법사를 냉큼 내주었다.

‘그 정돈 아니라니까…….’

민망하고 간지러운 기분이 들었다.

나는 남몰래 팔꿈치를 긁다가 물었다.

“전하께서야말로 빨리 북방으로 돌아가 보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아직 전쟁 중이잖아요.”

“지금 그깟 전쟁이 문제야? 또 쓰러지면 그대는 누가 챙기나?”

마치 공작저에는 내가 죽어 나자빠져도 신경 쓸 이가 아무도 없다는 어투였다.

‘맞는 말이긴 한데…….’

그렇지만 아직 노멀 모드가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시점에다가, 세뇌에 필요한 조각을 내게 2개나 빼앗겼기에 이본이 크게 활개치고 다니진 않았으리라.

그러니 치려면 지금이 바로 시의적절했다.

문득 기절하기 직전의 일들을 떠올렸다.

〈SYSTEM〉 단, [고대 마법]은 많은 체력과 정신력을 요구합니다! 중요한 때에 신중히 사용하십시오!

그러려니 하고 대충 넘겼던 시스템의 경고는 과장이 아니었다.

마법을 쓴 직후 정말로 체력이 몽땅 사라진 것처럼 몸에서 힘이 쭉 빠지고 눈앞이 아찔해졌다.

꼬박 사흘을 죽은 듯이 내리 잤으니 황태자가 난리를 칠 만도 했다.

‘마법 쓸 때마다 매번 기절하면 곤란한데.’

이본년을 죽일 때까지 얼마나 많은 공격이 필요할지 알 수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나는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달그락’ 하는 소리와 함께 차가운 유리병의 감촉이 손끝에 닿았다.

황궁 마법사에게 받은 체력 증진 물약은 총 다섯 개였다.

‘부디 다 쓰기 전에 해치울 수 있을 만큼 X밥이길.’

가출 전에 이본과 직접 부딪혀 본 바로는 고대 마법 한 방에도 나가떨어지긴 했다.

그러나 방심은 금물이었다.

이 미친 게임이 최종 보스를 그렇게 쉽게 처치할 수 있도록 해 줄 거란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그때였다. 마차가 속도를 줄이며 정차하는 것이 느껴졌다.

“전하, 공녀님, 마차가 에카르트 공작저 앞에 도달하였습니다.”

“그래? 공작에게 제국의 황태자가 왔노라고 전하라.”

외부 마차는 저택 주인의 허락이 있어야 대문을 통과할 수 있었다.

“친딸을 뚜드려 패고 집 나간 양딸의 금의환향이군. 안 그래?”

오만하게 명령을 내린 황태자는 이내 나를 돌아보며 눈을 찡긋했다.

황태자인 자신이 함께 와 준 것이다.

자랑스럽지 않느냐는 뜻 같았다.

나는 무시한 채 대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하온데 전하, 잠시 나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육중한 철문이 열리는 소리 대신 호위의 목소리가 들렸다.

“뭐야.”

황태자는 불쾌한 표정으로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공작이 문 못 연다고 시위라도 하나?”

“그, 그게…….”

열린 마차의 문틈으로 익숙한 공작저의 대문이 보였다.

그러나 어딘가 묘하게 이상함이 느껴졌다.

위화감의 정체는 마차에서 내려선 칼리스토의 중얼거림으로 바로 알 수 있었다.

“문지기들이 없군.”

“게다가 확인해 본 결과 대문이 열려 있습니다, 전하.”

사시사철 대문을 지키던 문지기들이 사라진 공작저는 무척이나 고요해 보였다.

나는 심상치 않은 저택의 분위기에, 개구멍으로 가자고 말을 할지 고민했다.

그 순간이었다.

쿠구구구구궁-.

불현듯 땅이 미약하게 진동했다.

“무슨…….”

황태자와 호위들이 빠르게 칼을 뽑아 들었다.

케에에에엑…….

그와 동시에 기괴한 울음소리가 멀찍이서 울려 퍼졌다.

“마물 소리예요, 전하.”

나는 그것의 정체를 곧장 알아차렸다.

칼리스토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다시 마차에 올라타며 소리쳤다.

“제기랄! 자리에 앉아, 공녀. 마차를 출발해라! 황궁으로 간다!”

나는 뜬금없는 명령에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를 돌아보았다.

“무슨 소리세요? 이본이 정체를 드러낸 거예요. 저택으로 가야 해요!”

“지금은 안 돼. 느껴지는 기척으론 한두 마리가 아니야.”

“그럼 저 혼자 갈게요. 전하는 황궁으로 가시든지요.”

“그 몸으로 가긴 어딜 가!”

마차가 출발하기 전에 서둘러 내려서려는 나를 칼리스토가 다급히 붙잡았다.

“몇 번을 말씀드려요? 저 이제 괜찮아요, 전하.”

“지금 괜찮으면 뭐 해. 가서 또 그 빌어먹을 마법 쓸 거 아니야. 어서 마차 출발 안 하고 뭐 해!”

마차 안의 소란을 고스란히 듣고 있었는지 미적거리는 밖을 향해 황태자가 거칠게 윽박질렀다.

그제야 마차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여전히 내 어깨를 꽉 붙든 칼리스토를 올려다보며 조용히 읊조렸다.

“……제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게 해 준다고 하셨잖아요.”

“그것도 몸이 멀쩡할 때 얘기지.”

그는 절박한 얼굴로 응수했다.

“그리고 공작가 놈들이 그대를 어떤 꼴로 만들었는데.”

“…….”

“그놈들은 제 무덤을 판 거나 다름없다. 마물 밥이 되어 뒈지든 말든 신경 쓰지 마. 죄책감조차 아까운 놈들이니까.”

솔직히 맞는 말이라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공작가 인간들이 죽어 나가는 것과 레일라를 처치하는 것은 엄연히 별개였다.

“……또 쓰러지면 전하께서 구해 주시면 되죠.”

“그게 말이 되는 소리……!”

“저도 무서워요, 전하.”

나는 점점 공작저에서 멀어지는 것을 느끼며 조심스럽게 내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거대하고 기상천외한 괴물들을 보는 것도 모자라, 그것을 다루는 무시무시한 최종 보스를 직접 죽여야 하는데 어찌 무섭지 않을까.

하지만 그렇다고 피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 게임의 엔딩을 보고 원래 세계로 돌아가는 것을 떠나, 이대로 있다간 모두가 다 이본의 손에 개죽음행이었다.

나는 일그러진 채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황태자의 뺨에 천천히 한 손을 가져다 대었다.

“저도 무서워서 그냥 다 때려치우고 도망친 거나 다름없는데…… 그런데, 전하께서 절 붙잡으러 쫓아오셨잖아요.”

기절해 있는 동안, 꿈을 꿨다.

오래전, 사냥 대회에서 동굴에 조난된 채 그의 이야기를 듣던 꿈을.

제국을 멸망시키기 위해 무결한 황제가 되고 싶다던 그의 말이, 정말로 진심이라 생각지 않았다.

내가 고고학을 꿈꿨던 것처럼, 어쩌면 그도 성군이 되어 나라를 어질게 다스리는 것을 꿈꿔 왔지 않을까.

어쩌면 내 욕심일지 모른다.

하지만 일러스트 속 성장한 채 웃고 있는 그의 모습은 너무나도 찬란해서…….

“전하가 제 편이 돼 준다고 하셨으니까…… 제가 위험할 때 지켜 주실 걸 아니까.”

안전한 세상 속에서, 네가 무결한 황제가 되어 살아갔으면 좋겠다.

“그래서 저도 용기 내 보는 거예요. 공작가 사람들을 구해 주겠다는, 뭐 그런 거창한 게 아니라…….”

칼리스토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없이 나를 내려다보았다.

한참을 그러고만 있던 그는, 천천히 내 뺨에 고개를 기대었다.

그리고 눈을 감으며 작게 속삭였다.

“네가 눈을 감고 있을 때마다, 다시 눈을 뜨지 못할까 봐 겁나.”

“…….”

“단순히 기력이 달린 것뿐이란 걸 알면서도, 나도 모르는 사이 수십 번씩 호흡을 세고 입 안을 확인하고 있더군.”

“…….”

“자꾸 피를 줄줄 흘리며 쓰러져 있는 네 모습이 겹쳐 보여서…….”

“아…….”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아듣지 못하던 나는, 작게 탄음했다.

그가 왜 이렇게 내가 쓰러진 것에 예민하게 반응했는지 깨달았기에.

칼리스토는 독주를 마시고 쓰러져 있을 때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다시 올려다보니 무표정한 가면 아래 필사적으로 두려움을 내리누르는 그의 얼굴이 보였다.

기분이 이상해졌다.

“이번엔…… 살살 쓸게요.”

울렁거리는 속을 내리누르고, 나는 장담하지 못할 말로 그를 달랬다.

칼리스토는 그제야 굳은 얼굴을 풀고 피식 헛웃음을 터뜨렸다.

“조절도 못 하면서 어떻게 살살 쓰게.”

“설령 세게 쓰더라도 안 쓰러지면 되죠. 마법사가 준 물약 있잖아요.”

나는 입술을 삐죽이며 대꾸했다.

그러자 그가 혀를 차며 한탄했다.

“쯧, 벌써부터 이렇게 물러 터져서 큰일이군.”

그리고 다시 명령했다.

“마차를 돌려라.”

방향을 바꿔 다시 공작저에 도달한 마차는, 이내 대문을 뚫고 저택으로 질주했다.

“케에에엑!”

“으아아아악-! 끄윽!”

챙, 채앵-!

도착한 저택 앞마당은 그 짧은 새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미친! 으으!”

다리가 있어야 할 부분에 꿈틀거리는 지렁이가 달린 사마귀 마물을 보며 나는 진저리를 쳤다.

‘나는 연체동물이 싫다고요!’

마차에서 내려선 황태자는 빠르게 호위들에게 외쳤다.

“세 명은 마차를 호위하고, 나머진 나를 따르라!”

그는 서둘러 내게 몸을 돌려 신신당부했다.

“공녀, 벌써부터 마법 쓰지 말고 마차 안에만 있어. 에카르트 기사단도 있으니, 마물은 최대한 무력으로 해결해 볼 테니까. 알았어?!”

“네…….”

하지만 나는 이본을 찾느라 그의 당부가 귀에 와 닿지 않았다.

‘어디 있지?’

전쟁터를 방불케 할 만큼 피와 살점이 난무한 정원을 샅샅이 훑어보고 있을 즈음.

“공작님!”

귀에 익은 호칭에 불쑥 시선이 휙 돌아갔다.

정원 한쪽에 공작과 집사가 마물에게 쫓기고 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조심하라고 했는데, 왜 말을 안 듣고…….’

세뇌의 영향도 있다는 것을 알지만, 기어이 이 사단을 만든 공작이 야속했다.

어차피 친부도 아닌데, 황태자의 말마따나 굳이 구해 줄 필요가 있을까.

- 파양은 안 돼.

- 그렇지만…… 네가 원한다면, 공작저를 떠날 수 있게 조치해 주마.

그러나 그 순간, 공작의 따뜻한 음성이 귓가를 스쳤다.

- 늙은이랑 같이 입장할 바에야, 차라리 혼자 들어가겠다고 또 거절할 게야?

- 아가, 아비가 다 잘못했다. 울지 말아 다오. 응?

나는 애써 귀를 틀어막으며 이를 악물었다.

그때였다. 뛰던 집사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다.

“펜넬!”

달리던 공작이 돌아와 그를 부축했다.

“케에에에엑-!”

그러나 바짝 쫓던 추격자에게 목을 내주는 꼴이었다.

침을 뚝뚝 흘리는 사마귀의 갈퀴가 사신의 낫처럼 그들의 정수리 위로 떨어지던 순간.

들고 있던 거울 봉의 상단에 하얀 글씨들이 나타나 뱅글뱅글 맴돌았다.

아는 주문에, 나는 앞뒤 가릴 것 없이 외쳤다.

“데키나 레바티움-!”

목 밑이 타들어 갈 듯 뜨겁다고 느낄 무렵.

쿠콰아아아앙-!

굉음과 함께, 어디서부턴가 거대한 빛 덩어리들이 쏟아져 나와 탱탱볼처럼 날뛰기 시작했다.

이 마법은 단시간 내에 많은 수의 마물을 쓸어버리면서, 같은 편은 죽이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었다.

그러나 그 ‘같은 편’에 사물은 속하지 않는다는 단점이 너무 컸다.

쾅, 쾅! 쿠우우웅-!

미친 듯이 날뛴 빛 덩어리는 순식간에 여러 마리의 사마귀를 곤죽으로 만들었다.

알아챌 새 없이, 저택에도 거대한 구멍이 뻥뻥 뚫렸다.

빛에 닿아 갈기갈기 찢긴 마물의 잔해와, 그야말로 초토화된 주변.

공작, 집사, 펜넬, 그리고 앞마당에 있는 모든 이들이 찢어질 듯 커진 눈으로 나를 돌아보는 게 보였다.

“허억, 허억…….”

거칠어진 숨을 몰아쉴 무렵.

투두둑- 비릿한 무언가가 콧속에서 주르륵 흘러내렸다.

“거참, 쓰지 말라니까 정말이지 말 더럽게 안 듣는군!”

억눌린 음성에 고갤 드니, 황태자가 이를 득득 갈며 달려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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