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213화
나는 손을 들어 코를 더듬었다. 새빨간 피가 묻어났다.
‘망할. 수능 전에 몇 날 밤새울 때도 안 난 코핀데…….’
나는 짜증스럽게 옷소매로 축축한 코와 입술을 문질러 닦았다.
“건드리지 마.”
그사이 득달같이 달려온 칼리스토가 내 손목을 억지로 떼어냈다.
그리고 어디서 난지 모를 손수건으로 코를 꽉 막고, 내 턱 밑을 받치며 고개를 앞으로 숙이게 했다.
“이런 것도 가지고 다니세요?”
코맹맹이 소리로 묻자, 그가 분노를 참는 듯한 숨을 내쉬었다.
“그러게. 누구 뒤치다꺼리 때문에 내가 별걸 다 가지고 다니는군.”
“저 괜찮아요.”
나는 소심하게 대꾸했다.
고개를 숙인 상태라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내 입으로 괜찮을 거라 설득해서 와 놓고, 곧바로 코피나 줄줄 쏟았으니 여간 민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이에요. 물약 먹을 정도도 아니고…….”
“알았으니까 눈치 보지 마.”
칼리스토는 내 말을 막고 조용히 읊조렸다.
“그대 하고자 하는 일 하기로 했잖나. 변명할 것 없어. 내 애간장이나 좀 녹고 마는 거지 뭐.”
분명 대수롭지 않다는 투였다.
그런데 왜 그렇게 이를 악문 것 같은 소리가 나는지 알 수 없었다.
“페넬로페!”
그때였다.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슬쩍 고개를 드니, 공작이 집사를 부축하며 얼떨떨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아버지.”
다행히 그때쯤 코피도 멈췄다. 나는 내게 달라붙어 있다시피 한 황태자를 슬쩍 옆으로 밀었다.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이냐! 마법은 어떻게…….”
다가온 기사 한 명에게 집사를 넘기고 한달음에 다가온 공작의 눈이 거울 봉에 닿았다.
나는 민망에서 슬쩍 그것을 내 뒤로 숨겼다.
“공작은 내가 눈에 보이지도 않나 보지?”
순식간에 투명 인간이 된 칼리스토가 삐딱하게 뇌까렸다.
정말이었는지, 그제야 황태자를 알아본 공작의 눈이 부릅떠졌다.
“저, 전하! 바,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북방으로 가시지 않았습니까?”
“난 누구들과는 달리 가출한 공녀가 어디로 갔는지 신경도 쓰지 않을 만큼 냉혈한이 아니라서 말이야.”
“전하!”
나는 화들짝 놀라 공작에게 날카롭게 쏘아붙이는 칼리스토의 입을 틀어막으려 했다.
그러나 이미 엎어진 물에 공작의 안색이 단숨에 어두워졌다.
따지고 보면 황태자의 말은 틀렸다. 저택을 나간다는 내 말에 공작은 오히려 도움을 주겠다 하였으니까.
그가 작정하고 나를 막으려 들었다면, 이본과 접전이 있던 그날 바로 탈출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게…… 어쩌다 보니 마법을 쓰게 됐어요. 저택은 죄송해요. 제가 아직 마법을 잘 조절 못 해서…….”
나는 죄책감에 공작에게 더듬더듬 말했다.
대충 상황을 보아하니, 공작도 이제 이본의 정체를 알게 된 듯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가문의 기사들까지 모두 소집시킬 리 없을 테니.
“그래도…… 늦지 않게 도착해서 다행이에요.”
나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며 천천히 진심을 토해 냈다.
공작이 무사한 모습이어서 안도했다면, 나는 정말 배알도 없는 호구인 걸까.
내 말에 정처 없이 흔들리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공작이, 불쑥 손을 들어 내 뺨을 쓰다듬었다.
“네가 무사해서, 나도 정말 다행이구나.”
“…….”
“비록 다시 돌아왔지만, 오늘처럼 네가 저택에 있지 않은 게 다행스러웠던 적이 없었다.”
나는 그 말에 왈칵 흐려질 뻔한 얼굴을 가까스로 유지했다.
다시 돌아와 마주하게 될 공작 일가는 이본에게 완전히 세뇌되어, 그녀만을 위해 움직일 줄 알았다.
만약 이클리스처럼 그들마저 나를 공격하려 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오는 동안 수십 번 고민했다.
“야, 페넬로페!”
멀리서 레널드가 사랑스러운 분홍빛 머리칼을 휘날리며 허겁지겁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야, 나 아직 술 덜 깼냐? 방금 네가 이상한 마법 봉 휘두르면서 마물들 다 조지는 꿈을 꾼 것 같은데…….”
한달음에 달려온 레널드가 제 머리를 주먹으로 퍽퍽 내리치며 멍청한 소리를 했다.
“이런, 재회 인사를 하긴 아직 이른데.”
그때였다. 귀를 파고드는 목소리에 모두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변이 일어난 정원에서 훌쩍 떨어진 곳에 가녀린 체구의 여자 한 명이 우뚝 서 있었다.
“이본.”
마물을 풀고 그대로 튀었을 줄 알았는데, 이본은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모든 것을 관망하고 있었다.
‘하긴. 조각 하나가 나한테 있으니까.’
곧바로 납득한 나는, 앞을 가로막고 있는 사람들을 밀치고 앞으로 나갔다.
피와 마물의 잔해들로 엉망이 된 정원을 사이에 두고, 우리는 비로소 마주 설 수 있었다.
“내가 무서워서 꽁지가 빠져라 도망간 줄 알았는데. 다시 돌아왔네, 페넬로페?”
이본이 천진하게 웃었다.
그 옆에 데릭이 검은색의 무언가에 묶인 채 눈을 부릅뜨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누가 봐도 자의가 아닌, 붙잡힌 모양새였다.
나는 그를 본체만체하며 다시 이본에게 시선을 돌렸다.
“너야말로 나한테 그렇게 얻어맞고도 정신을 못 차렸니?”
“……뭐?”
“나 같으면 쪽팔려서 벌써 도망갔겠다. 네가 쓰는 세뇌나 힘, 이젠 나한테 안 통하는 거 알잖니.”
왜냐하면 나는 게임 속, 아니, 과거의 페넬로페와 달리 많은 것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내 말에 이본의 입가에 맺힌 웃음이 사그라들었다.
“너한텐 안 통해도, 네 주변에 통하겠지.”
잠시 입가를 바르르 떨던 그녀는 잠시 후 평정을 찾고 대꾸했다.
그 순간이었다.
“으윽!”
그녀의 옆에 서 있던 데릭이 별안간,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뱉으며 털썩 무릎을 꿇었다.
“데릭!”
“형! 아오, 저 미친놈!”
공작과 레널드가 깜짝 놀라 외쳤다.
“과거에는 널 먼저 죽이는 바람에 미처 보여 주지 못했어. 네가 끔찍이도 사랑받길 원하던 네 가족들이, 내게 하나하나 잡아먹히는 모습 말이야.”
“크윽! 이, 이거 놔!”
“젊고 강한 인간들은 생명력 또한 질기지. 네 오라비는 꽤 맛있는 먹잇감이었어.”
이본이 천천히 몸을 숙여 두 손으로 데릭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데릭은 거칠게 몸부림쳤다. 그러나 당연히 움직일 수 없었다.
“이번엔 똑똑히 보여 줄게. 네 가족들이 내게 어떻게 죽어 갔는…….”
“죽여.”
나는 이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답했다.
“죽든 말든 내 알 바 아니니까.”
이본에게 말했지만, 내 시선은 데릭에게 꽂혀 있었다.
하염없이 흔들리던 푸른 동공이 우뚝 멈췄다.
데릭은 방금 전 들은 말이 믿기지 않은 사람처럼 나를 응시했다.
새하얗게 질려 가는 그의 입술이 달싹였다.
애석하게도 나는 그걸 알아듣기 전에 곧장 고개를 돌렸다.
왜냐하면, 내 알 바 아니라는 말은 거짓 한 점 없는 진심이었기에.
“뭐야, 하등 쓸모없는 패였잖아?”
이본은 흉흉하게 찌푸려진 얼굴로 중얼거리더니, 이내 붙들고 있던 데릭을 풀어 주었다.
“크윽!”
무언가에 거칠게 떠밀리듯 그가 흙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이 정도론 어림없다 이거지.”
그런 데릭에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이본은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그럼, 다른 파티를 시작하자.”
그와 동시였다.
스스스, 스스스슷-.
내가 쓴 마법으로 인해 끔찍하게 찢긴 사마귀 마물의 사체들이, 별안간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마치 진동하는 휴대폰처럼.
“무, 무슨……!”
한시름 놓고 있던 기사들은 다시금 바짝 긴장했다.
그 순간, 들썩들썩 움직이던 사체를 퍽 뚫고 여러 줄기가 튀어 나왔다.
“키이이이익!”
“마, 마물이다! 새로운 마물이 나타났다!”
소름 끼치는 울음소리와 함께 누군가 외쳤다.
“미친…….”
나는 사마귀 사체에서 솟아오른 채 꾸물꾸물 춤을 추는 기이한 마물을 보고 그야말로 질색을 했다.
그것은 바로.
‘거대 연가시!’
“키이이이익!”
사체에서 몸을 빼낸 그것들이, 이내 일제히 기사들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아오 씨! 역겨워 죽겠네, 진짜! 공격!”
레널드가 칼을 빼 들고 선두로 달려나갔다.
나는 그저 얼어붙은 채 미친 듯이 꿈틀거리는 그것들을 바라보았다.
뭐가 기어 다니는 것처럼, 온몸이 간질거렸다.
이런 내 심정을 아는 건지, 때마침 거울 봉 위로 흰 글씨들이 떠올랐다.
꿈틀거리는 것들을 ‘극혐’하는 나를 배려해 황태자가 몸으로 앞을 가려 주었다.
“뒤로 물러나 있어, 공녀.”
“파이어 피숀-!”
하지만 나는 미칠 듯한 징그러움의 향연에 이미 정신이 나간 후였다.
화르르륵-!
목청껏 외치자마자, 꿈틀거리며 기사들에게 달려들던 연가시들이 일제히 불에 타올랐다.
갑작스럽게 생긴 불길에 기사들이 멈칫했다.
“키이이이익!”
타닥타닥, 역겨운 냄새를 풍기며 타들어 가는 연가시들이 발광하듯 꿈틀거렸다.
그러나, 얼마 후.
투둑, 투둑-. 불이 붙은 곳들이 툭툭 끊겼다.
마치 도마뱀의 꼬리처럼 까맣게 타들어 간 곳이 떨어져 나갔다.
몸의 절반이 떨어져 나갔음에도 연가시 마물은 여전히 길고, 여전히 살아 있었다.
“키이이이이익-!”
불길이 잦아들자 그것들이 다시 구물구물 달려들기 시작했다.
“뭐야, 왜 안 죽어? 윈드 피숀! 파이어 피숀! 윈드 피숀! 파이어 피숀!”
당황한 나는, 대왕 문어를 떠올리며 마구 주문을 남발했다.
그러나 소용없었다.
“마, 마법이 통하지 않는 것 같사옵니다, 황태자비 전하!”
황태자가 내 곁에 남겨 둔 황궁 마법사가 벌벌 떨며 외쳤다.
“황태자비……?”
공작이 생소한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지만, 망연자실한 나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키이이익!”
“마차 안에 가만있어, 공녀!”
기다렸다는 듯 이쪽으로 달려드는 연가시 한 마리를 칼로 댕강 썰어 내며 황태자가 외쳤다.
이후 그의 전매특허인 칼춤이 시작됐다.
“전하의 말씀이 맞다, 페넬로페! 여기 안전히 있거라!”
“아, 아버지!”
손을 보태는 게 좋다고 생각했는지, 공작 또한 칼을 뽑아 들고 달려 나갔다.
앞에서 날뛰는 황태자와 공작, 레널드의 활약으로 내 주변은 그야말로 안전지대였다.
연가시는 마법이 안 통하고, 여러 번 물리적으로 잘라야 해서 죽이기 번거롭긴 했지만, 사마귀 마물에 비하면 공격력이 매우 낮았다.
‘뭐야. 별거 아니잖아? 파티라더니.’
썰려 나가는 마물들의 모습에 점점 마음의 안정이 찾아왔다.
나는 그래서 알지 못했다.
이본이 왜 연가시 파티를 열었는지.
썰려 나간 마물의 짧은 단면들이 페넬로페 주변에 하나, 둘 떨어져 쌓이기 시작했다.
아직 살아서 꿈틀거리긴 했지만, 너무 짧아서 곧 죽을 것들이었다.
인간들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눈치채지 못한 사이, 짤막한 마물 조각 하나가 꿈틀꿈틀 움직여 근처의 다른 조각에 닿았다.
단면끼리 붙은 그것은 얼마 안 가, 잘린 자국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좀 더 긴 새로운 조각이 되었다.
그리고 또 새로운 조각으로 굼질굼질 이동했다.
몇 번의 반복 끝에, 어느새 마물의 조각들은 인간의 절반 길이만큼 커졌다.
‘멍청한 계집.’
이빨이 달린 머리의 단면까지 찾아 붙은 것을 확인한 이본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서로 달라붙어 재탄생한 마물은 천천히 나무를 타고 올랐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페넬로페의 머리 위에 기다란 나뭇가지가 드리워져 있는 것을.
마물이 막 목표한 가지에 닿은 것을 본 이본은 환희했다.
이제 이것으로 조각을 회수하면 모든 게 끝이었다.
페넬로페는 당장 죽이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 얄미운 얼굴을 갈기갈기 찢어 놓을 수는 있겠지.’
이본의 입이 헤벌쭉 벌어졌다.
“너는 가장 비참하고, 고통스럽게 죽을 거야, 페넬로페.”
그때였다.
푸욱-.
날카로운 것이 살 속을 파고드는 소리와 함께, 페넬로페를 바라보던 이본의 눈이 부릅떠졌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내렸다. 검이 박힌 옆구리가 붉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그녀는 다시 고개를 들어 옆을 확인했다.
“……이본.”
하염없이 떨리는 푸른 눈.
그녀의 오라비, 데릭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