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214화
칼에 찔린 이본이 비틀거렸다.
데릭을 마주한 그녀의 눈은, 믿을 수 없다는 듯 크게 확장되어 있었다.
“오…… 오라버니, 왜…….”
이본이 입술을 달싹였다. 곧 사그라들 먼지처럼 작은 목소리였다.
칼에 찔린 것은 그녀인데, 그 순간 제가 찔린 듯한 선연한 고통이 느껴졌다.
데릭은 벌벌 떨리는 눈으로 제 손으로 찔러 넣은 검을 바라보았다.
간신히 되찾은 여동생을 제 손으로 찌르고 있다.
불쑥, 헛구역질이 치솟았다.
“……넌, 넌 내 동생이 아니야.”
그는 이를 악물고 턱밑을 잠식하는 상념을 털어냈다.
“넌 대체 누구지?”
“저 이본이에요, 오라버니. 오라버니가 축제 날 잃어버린 동생이요.”
이본은 웃는 건지 우는 건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다시 한번 데릭의 죄책감을 일깨웠다.
“제가 이본이 아니면, 대체 누가 이본이겠어요?”
“닥쳐!”
그러나 데릭은 더 이상 속지 않았다.
“이본이, 이본이 너같이 사악한 것일 리가 없어! 이본은, 그 아이는!”
“…….”
“정원에 꽃 한 송이 시든 것만 봐도 하루 종일 방에 박혀 우는 아이였다.”
그는 황망한 눈으로 엉망진창이 된 정원을 바라보았다.
죽은 공작 부인이 손수 가꾼 것으로 유명한 에카르트 저택의 정원은 이본의 보물이었다.
꽃 한 송이라도 시든 것을 발견하면, 어린 여동생은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서럽게 울었다.
그랬던 그녀가, 정원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고 이토록 멀쩡할 리 없었다.
불현듯 안개가 낀 것처럼 혼몽했던 머릿속이 맑아졌다.
“그런데, 대체 넌 누구냐.”
데릭은 낯선 눈으로 제가 찌른 여자를 바라보았다.
분명 틀림없는 이본의 외양이 맞는데…….
“하하…… 이제야 눈치챘어?”
악귀처럼 이를 드러내는 얼굴이,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맞아. 네 동생은 이미 나한테 몸을 빼앗기고 죽은 지 오래인걸.”
“……뭐?”
“불쌍한 이본, 이본, 이본 에카르트.”
칼이 깊숙이 박힌 것이 아무렇지도 않은 사람처럼, 여자가 흥얼거리듯 말했다.
“저를 놓쳐 버린 오라비 때문에 사악한 것에게 몸을 빼앗긴 것도 모자라, 끝내 그 오라비의 칼에 맞고 죽겠네.”
“무, 무슨…….”
“왜, 거짓말 같아?”
여자가 조롱하듯 빙글거리며 한 발짝씩 데릭에게로 다가왔다.
둘의 거리가 가까워지는 만큼, 반쯤 박혔던 칼이 점점 이본의 몸속으로 사라졌다.
마침내 데릭이 잡고 있는 검의 손잡이만 남을 만큼 다가온 여자가, 아이를 놀리듯 그에게 얼굴을 불쑥 들이밀었다.
“이래도?”
인간이라면,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칼에 꿰뚫린 채 아무렇지 않게 걸을 수 있을 리가…….
데릭의 눈앞이 붉게 점멸됐다.
“크아악! 이본-!”
그는 울부짖듯 여동생의 이름을 외치며 박아 넣었던 검을 낯선 여자에게서 거칠게 뽑아냈다.
휘익-!
그리고 한껏 쳐든 그것을 그대로 여자의 목에 휘두르려던 그 순간.
콰득, 푸욱-.
뼈를 부수고 살을 파고드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방금 전과 비슷한 소리였다. 그러나.
“허, 허윽…….”
데릭은 천천히 시선을 내려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왼쪽 가슴에 타인의 손이 박혀 있었다.
다시 시선을 들자, 무척 즐거워 보이는 여자의 얼굴이 보였다.
“역시, 조각이 없으면 세뇌를 조절하기가 어렵다니까…….”
그와 동시에 가슴에 박힌 손이 안을 마구 파헤쳤다.
“커억-!”
데릭의 입 새로 붉은 핏물이 주르륵 새어 나왔다.
철그렁-! 높이 쳐올렸던 그의 손이 검을 놓치며 힘없이 낙하했다.
그는 살기가 가득 찬 눈으로 여동생을 노려보았다.
“크윽…… 이, 본…….”
“이대로 네 심장을 터뜨리면 페넬로페가 무슨 반응을 보일까?”
이본은 그의 눈빛이 가소롭다는 듯 속삭였다.
그녀의 말에 데릭의 푸른 눈동자가 지진 일 듯 흔들렸다.
철옹성 같은 고지식한 사내가, 이름 하나에 속절없이 휩쓸리는 것을 볼 때마다 이율배반적인 감정이 들었다.
자신의 속살거림에 쉽게 속아 넘어가는 멍청한 모습이 썩 유쾌하면서도, 그 이유가 과거처럼 자신을 위함이 아닌 것이 때때로 불쾌했다.
지금이 그랬다.
“그래도 오라비랍시고, 구하는 시늉이라도 할까? 아니면 죽어 가는 널 동정할까? 그도 아니면…….”
이본은 흔들리는 어리석은 사내를 보며, 짓씹듯 독을 내뱉었다.
“역겨워하려나?”
“그, 만.”
데릭은 본능적으로 이본의 입을 막으려 했다.
그러나 그녀의 손에 가슴이 꿰뚫린 채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성인식에 기어이 친동생을 데리고 가서 결국 자살까지 하게 만든 양오라비가.”
“그만, 그만해……!”
“사실은 저를 사랑해서 세뇌까지 깼다는 사실을 알면, 얼마나 끔찍할까.”
기어이 이본의 입을 타고, 그가 꽁꽁 숨겨 온 역린이 쏟아져 나왔다.
하염없이 흔들리던 데릭의 눈동자가 우뚝 멎었다.
“너, 너…… 그게…….”
그의 낯빛이 질식할 사람처럼 새하얗게 질려 갔다.
“가엾은 오라버니.”
“크으, 그만……!”
“페넬로페를 떠올릴 때마다, 뭐 마려운 개새끼처럼 화를 내고 전전긍긍하던 게 사랑인 줄도 모르고.”
이본이 멀쩡한 손으로 안쓰러울 만큼 창백해진 얼굴을 쓰다듬었다.
“이제 편히 쉬어요.”
자장가처럼 속삭이며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넋이 나간 듯한 데릭은 다가오는 여자를 피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이윽고 보드라운 입술이 그의 입술과 맞닿으려던 찰나.
“윈드 피숀 프라숀!”
휘이이이익-!
섬뜩한 기운이 불쑥 그녀를 향해 날아왔다.
“으읏!”
공격을 기민하게 알아챈 이본은 데릭을 밀치며 가까스로 그것을 피했다.
동시에 주변에 있던 마물 하나로 방어했다.
“키익-!”
그러나 마법이 도통 먹히지 않던 좀 전과는 달리, 정면으로 공격을 받은 기생 마물 두 마리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후두두둑-.
소용돌이치는 폭풍이 한차례 휩쓸고 지나간 자리엔, 재생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미세하게 갈린 마물의 잔해가 비처럼 떨어졌다.
그 너머로 누군가 저벅저벅 걸어 나왔다.
“마법 업그레이드 됐다.”
넌 뒈졌어, 하고 덧붙이는 인영은 빌어먹을 페넬로페 에카르트였다.
* * *
잘라도, 잘라도 살아남는 연가시는 완전히 해치울 때까지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렸다.
‘한 방에 자를 수 있으면 해결할 수 있을 텐데.’
후방으로 밀려난 채 끝없이 칼을 휘두르는 황태자와 공작을 바라보며 방법을 고민하던 때였다.
별안간 거울 봉 위에 떠오른 흰 글씨들이 바뀌었다.
더 환장할 주문으로.
‘미친, 주문 합치면 더 강해지는 거냐고!’
너무나도 1차원적인 주문에 황당해하는 것도 잠시.
“윈드 피숀 프라숀!”
바뀐 주문은 확실한 효과를 보였다.
순식간에 생긴 여러 개의 소용돌이가 미친 듯이 정원을 휩쓸고 다니며 연가시들을 한 방에 조각냈다.
이렇게 될 줄은 몰랐는지, 당황한 이본의 얼굴이 눈에 박혔다.
그 옆에 데릭이 볼품없이 나동그라져 있는 것이 스치듯 보였지만, 알 바 아니었다.
‘넌 이제 뒈졌다.’
이제 남은 건 최종 보스 하나였다.
“윈드……!”
그녀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며, 막 주문 한 마디를 내뱉던 찰나였다.
“끼루루룩-!”
그 순간, 창공을 가르고 귀에 익은 새 마물의 울음소리가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그와 동시에, 두두두두-!
땅이 마구 뒤흔들렸다. 한꺼번에 발생한 일이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장내의 모든 이들이 휘청이던 그 순간.
콰아앙-! 땅속에서 무언가 솟구치더니, 눈 깜짝할 새 공작을 집어삼켰다.
“아, 아버지!”
레널드가 외쳤다.
그것은 거대한 지렁이였다.
나는 다급히 주문을 외치려 했다.
그러나 공작을 집어삼킨 지렁이 마물은 미처 공격할 틈도 없이 튀어나온 땅속으로 도로 사라졌다.
“이본!”
나는 다급히 이본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사이 그녀는 새 마물에 올라탄 채 허공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저건 실패했으니 네게 유의미한 인질로 바꾸는 게 좋겠지, 페넬로페.”
쓰러진 데릭을 손가락질하며, 이본이 비열하게 조소했다.
“사랑하는 아버지를 구하고 싶으면 조각을 가지고 나를 찾아와.”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러나 나는 내색하지 않기 위해 갖은 애를 쓰며 태연히 대꾸했다.
“그냥 죽여. 어차피 난 너만 없애면 되니까.”
“페넬로페, 너……!”
내 말에 레널드가 충격받은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그를 외면한 채 이본에게만 시선을 고정했다.
“그래?”
내 말에 이본이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그런데, 인질이 과연 공작 하나뿐일까?”
“그게 무슨…….”
“내게 죽을까 봐 뷘터 베르단디를 통해 빼돌린 하녀가 하필이면 미리 숨겨 놓은 아이들과 함께 있을 게 뭐람.”
‘에밀리!’
그 순간 번뜩 잊고 있던 에밀리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잠깐 멈칫한 사이.
“결정은 빨리 내릴수록 좋을걸? 보름달이 뜨는 날, 그것들을 다 먹잇감으로 쓸 거거든!”
“끼루루루룩-!”
마물을 탄 이본은 빠르게 멀어져 갔다.
‘안 돼.’
나는 주문을 마저 외치기 위해 입을 열었다.
“……!”
그러나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공작과 에밀리, 그리고 얼음에 갇힌 유물을 함께 발굴한 가면들이 차례대로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이본이 완전히 점이 되어 사라질 때까지, 나는 끝내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했다.
‘……병신 같아.’
이 지긋지긋한 게임을 끝낼 기회를 내 손으로 놓쳐 버렸다.
무력감과 자괴감이 나를 덮쳤다.
‘게임 속 인물들이 뭐라고. 그깟 인질들이, 뭔데……!’
불쑥 분노와 닮은 감정이 치솟았다.
그때 누군가 내 어깨에 툭 손을 올렸다.
“병신, 고개 숙이지 마라. 에카르트는 그 어떤 경우에도 무릎 꿇지 않는 거 몰라?”
고개를 드니 핑크빛 머리칼이 보였다. 레널드였다.
“네 잘못 아니야.”
그 말에 나는 결국 얼굴을 왈칵 허물어뜨렸다.
‘……아.’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이 뭔지, 깨달았다.
그것은 이본을 죽이지 못했다는 분노가 아닌, 죄책감이었다.
아까 전 싸늘하게 뱉은 내 말에 분명 충격받은 표정을 지었으면서, 레널드는 마치 내 심정을 다 아는 것처럼 말했다.
“아직 아무도 안 죽었다. 구하면 돼. 그러니까 그렇게 죽을상 짓고 있지 말라고, 알았냐?”
제법 오라버니 같은 놈의 어투에, 나는 입만 벙긋댈 뿐 끝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한차례 격렬한 폭풍이 지나가고, 묘한 탈력감이 찾아왔다.
멍하니 있는 사이, 레널드는 제법 능숙하게 공작과 소공작의 빈자리를 채웠다.
황태자와 그의 지시 아래 부상자들이 옮겨지고 쑥대밭이 된 저택이 조금씩 정리되기 시작했다.
멍한 정신이 돌아온 것은 피를 질질 흘리는 데릭이 실려 가는 것을 보았을 때였다.
‘아직 안 죽었나 보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창백한 그의 얼굴을 보자니 착잡한 기분이 들었다.
이본을 칼로 찌른 후 역공당한 데릭.
놈은 무슨 생각으로 그토록 끔찍이 여기던 여동생을 제 손으로 찔렀을까.
타악-.
그때였다.
들것이 내 앞을 막 지나칠 무렵. 기절한 줄 알았던 놈이 별안간 내 손목을 움켜쥐었다.
“무슨…….”
나는 화들짝 놀라 잡힌 손목과 놈을 바라보았다.
힘겹게 눈을 뜬 놈이 반대편 손에 쥐고 있던 것을 내게 건넸다.
“……받아라.”
낯익은 물건이었다. 그것은 바로,
어린 시절의 페넬로페가 훔쳤다고 누명을 쓴 이본의 것과 똑 닮은.
목걸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