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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엔딩은 죽음뿐-215화 (215/243)

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215화

나는 데릭이 내민 목걸이를 멀거니 바라보았다.

갑자기 이걸 왜 주는 건지, 전혀 예측할 수 없어서였다.

‘그때 그 목걸이랑 완전히 똑같진 않은 것 같고…….’

페넬로페의 꿈을 통해 엿본 그 목걸이는, 어린아이에 걸맞게 장식에 박힌 다이아몬드가 작았다.

그러나 데릭이 건넨 목걸이는 비슷했지만, 엄지손톱만큼 큼지막했다.

“이동 마법을 새겼다.”

선뜻 받아 들지 않는 나를 보며, 놈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세 번. 다이아몬드를 문지르면, 떠오르는 장소가 어디든 거리에 구애 받지 않고 이동할 수 있다더군.”

돌아오는 답이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내 입에서 물음이 튀어나오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왜요?”

“…….”

“이걸 제게 왜 주시는데요.”

그와 동시에 마지막으로 본 그의 절박한 외침이 떠올랐다.

- 화가 났어도 선물을 주면 다시 어여쁘게 웃어 주었잖아. 그렇게 앙숙처럼 싸워 대던 레널드 놈에게마저 오라버니라 불러 주었지 않아. 그런데 왜-!

놈이 선물을 주는 이유. 여동생의 자리를 빼앗은 밉살맞은 계집에게 품은 지저분한 감정들.

아픈 환자라는 것을 알면서도, 심사가 비틀렸다.

입술을 달싹일 뿐, 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그를 대신해서 말했다.

“이제 와서 이거라도 던져 주면, 뭐가 좀 바뀔 것 같아서요?”

한땐 나도 그가 내민 선물이 관계 개선을 뜻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현생에선 끝내 파국에 이른 첫째 개새끼와의 사이.

꼭 게임에서까지 답습할 필요 없지 않은가.

“보석에, 사치에 환장하니까, 값비싼 선물을 주면 천치처럼 다 잊어버리지 않을까 싶어서?”

그러나 크나큰 착각이었다.

나는 그가 건넨 것을 받는 시늉조차 하지 않은 채, 선고했다.

“그렇다면 단단히 착각하신 거예요, 소공작님.”

“…….”

“그때 느꼈던 그 비참함, 당신이 내게 줬던 수많은 치욕과 모욕들.”

“…….”

“그것들을 어떻게 잊어요. 이 목걸이가 바로, 보석에 미치게 된 계긴데.”

나는 그의 손에서 흘러내린 목걸이를 성의 없이 툭 건드렸다.

값비싼 백금 줄이 허공에서 달랑달랑 흔들리고, 그에 맞춰 남자의 푸른 눈에도 지진이 일었다.

“전 이제, 당신이 내게 뭘 줄 때마다 무서워요. 매번 그 이후엔 더 어마어마한 엿을 먹여서 나를 나락까지 떨어뜨렸으니까.”

“…….”

“그러니 받지 않을 거예요, 소공작님. 그 이유가 뭐가 됐든.”

“…….”

“네가 주는 건 다 필요 없어.”

마지막 말은 주변을 의식해서 몸을 숙인 채 작게 읊조렸다.

그나마 소공작임을 감안하여 내가 해 줄 수 있는 최대한의 배려였다.

끔찍하게 여기던 제 여동생에게 가슴이 꿰뚫린 놈에게 남은 감정은 아무것도 없었다.

매번 느껴 오던 분노, 혐오는 물론이고 하다못해 동정조차.

빠르게 속삭인 후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몸을 일으킬 무렵.

“……알아.”

그가 마침내 내 말에 입을 열었다.

“아무것도 잊히지도, 사라지지도 않을 거란 것을.”

이제라도 그걸 안다니 참으로 다행이지 않은가.

무감각한 눈으로 그를 내려다 볼 무렵, 불현듯 창백한 그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나는 그저…… 나는 그저 저택, 으윽.”

말을 잇던 놈이 별안간 핏물을 쏟았다.

나는 조금 놀라서 허둥지둥 하인들에게 말했다.

“어서 저택으로 옮겨라. 이러다 위험…….”

“저택 밖은 위험해.”

그러나 데릭이 불쑥 내 말을 끊고 피와 함께 말을 쏟아냈다.

내 손목을 붙든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충분히 뿌리칠 수 있었지만, 어쩐지 그럴 수 없었다.

“내 눈과 검이 닿지 않은 곳까지 지키고 통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

“네가 가출해 있는 동안 네게 무슨 일이 생겼을 때, 에카르트의 위신을 떨어뜨리지 않고 그 자리를 회피할 수 있는 최적의 방법이 무엇일지.”

“…….”

“고민하고 그에 따른 결론을 내렸을 뿐이야.”

몰랐는데, 다친 데릭 놈은 개소리를 참으로 간절하게도 하는 재주가 있었다.

“그러니까 제발…….”

당황해서 굳어 있는 내게, 바들바들 떨리는 목걸이 쥔 손이 내밀어졌다.

곧 숨넘어갈 듯 껄떡이는 그가 끝내 애원하듯 말했다.

“그러니까 제발…… 받아 주면 안 되겠느냐.”

“미안하지만 안 되겠는데, 소공작.”

그때였다. 불쑥 단단한 것이 허리를 휘어 감았다.

데릭의 손이 미처 내게 닿기 전에 내 몸은 누군가에 의해 뒤로 확 끌어당겨졌다.

“그까짓 것 없어도 내 약혼녀는 내가 알아서 잘 모시고 다닐 거거든.”

“전하?”

퍼뜩 고개를 드니, 인상을 잔뜩 찌푸린 황태자의 얼굴이 보였다.

“크윽!”

그와 동시에, 데릭이 또 한 번 피를 쏟아내며 몸을 들썩였다.

텅 빈 허공에 떠 있던 목걸이 쥔 손이 툭 아래로 떨어졌다. 이후엔 미동이 없었다.

“뭐 하느냐, 어서 옮기지 않고. 공작도 부재하는 마당에, 이러다 후계마저 갈아치우겠군.”

깜짝 놀라 말문이 막힌 나 대신 칼리스토가 하인들에게 턱짓했다.

“죄, 죄송합니다!”

들것 밖으로 삐져나온 손에 걸린 목걸이 줄이 하늘하늘 흔들리며 멀어졌다.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자니, 기분이 이상해졌다.

“……설마 죽은 건 아니겠지?”

심란한 마음에 혼잣말을 중얼거리자, 황태자가 혀를 차며 말했다.

“죽으면 또 어때. 저놈이 그대에게 한 짓들을 생각해 봐.”

“그래도…… 죽는 건 좀 그렇잖아요.”

“쯧, 그댄 마음이 약해서 탈이야. 다른 사람 같았으면 아직도 안 뒈졌냐고 뚫린 곳을 한 번 더 칼로 찍었을 거다.”

‘너나 그러겠지.’

나는 황태자의 파탄 난 인성에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그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피는 멈췄나? 어디 봐.”

그런 나를 다시 돌려세운 칼리스토는 내 양 뺨을 부여잡고 샅샅이 얼굴을 훑었다.

“멈췄어요. 민망하니까 좀 떨어지세요.”

“물약 마셨어?”

“아뇨, 아직.”

“지금 꺼내서 마셔.”

“괜찮은데…….”

아껴 마시려고 했는데, 부리부리하게 노려보는 시뻘건 눈 때문에 별수 없었다.

나는 주섬주섬 주머니에서 체력 물약을 하나 꺼냈다.

“놔줘야 마시죠, 전하.”

그때까지 여전히 내 뺨을 붙들고 있는 황태자를 흘겨보며 불만스럽게 중얼거릴 때였다.

“지금 뭐 하는 짓입니까!”

어디서 벼락같은 괴성과 함께 누군가 쏜살같이 달려와 우리 둘을 떼어놨다. 레널드였다.

“야, 괜찮아? 별일 없어?!”

허겁지겁 내 앞을 막아선 그는 이내 경계하는 고양이처럼 황태자를 쏘아보았다.

“무슨 짓을 하시는 겁니까, 전하? 제 동생 건드리지 마시죠!”

“허. 내가 내 약혼녀와 뭘 하든, 자네가 무슨 상관이지?”

“약혼녀라니요? 페넬로페에게 차이신 후에 다시 받아 달라고 쫓아갔다 또 차인 것으로 끝난 거 아닙니까?”

“그럼 지금이라도 알아 두지. 공녀와 나는 아주 각별한 사이다. 위기를 극복한 연인이 재회의 입맞춤 직전이었는데 눈치 없는 누가 훼방…… 공녀, 어디 가?”

“야, 페넬로페!”

나는 끔찍한 말다툼을 하는 놈들의 주둥이를 틀어막을 자신이 없었다.

도망치다시피 놈들에게서 훌쩍 멀어졌다.

얼마 후 황태자 놈에게서 무슨 소리를 들은 건지, 레널드가 씩씩대며 내게로 달려왔다.

“야, 너 저 새, 아니, 저 전하랑 같이 움직이기로 한 거 사실이냐?”

반쯤은 사실이라 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본 걔 찾으러 다시 갈 거야. 아버지도 구해야 하고.”

“나도 같이 가.”

말 끝나기 무섭게 돌아오는 대꾸에, 나는 좀 생소한 얼굴로 레널드를 돌아보았다.

“넌 아무렇지도 않아?”

“뭐가?”

“방금 봤잖아. 네 친동생이, 사실 무시무시한 괴물인 거 말이야.”

데릭 놈은 변모한 이본의 모습에 아주 사색이 돼서 벌벌 떨었는데.

레널드는 생각만큼 충격을 받은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난 처음부터 걔 별로였어. 음침한 게, 전혀 이본 같지가 않았다고.”

“허.”

돌아온 대꾸에 나는 코웃음을 터뜨렸다.

‘꿈이 어쩌니 하면서, 쥐 잡듯이 날 잡을 땐 언제고…….’

그래도 단순한 레널드 놈이 데릭만큼 세뇌에 깊게 당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조금은 안도가 되었다.

“……감히 아버지를 납치해? 에카르트를 건드린 이상, 죽음뿐이다.”

혼자 무어라 중얼거리던 레널드는, 별안간 낯빛을 굳히며 내게 물었다.

“……넌 언제부터 알았냐?”

“글쎄.”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어? 그런 거야?”

레널드가 연달아 따져 물었다.

물론 처음엔 나도 몰랐다. 아니 믿지 않은 것에 가까웠다.

선량한 여주가 어떻게 저렇게 무서운 괴물일 수 있단 말인가, 미친 게임.

“……나도 처음부터 안 건 아니야. 몇 번 마주치면서, 거울이나 찻물에 비치지 않길래 알았어.”

나는 적당히 사실을 섞어 얼버무렸다.

그러자 레널드가 와락 얼굴을 찌푸렸다.

“그래서 가출한 거냐? 쟤 무서워서, 대적할 수 있는 마법 봉 찾으려고?”

부끄럽게도 놈이 내 거울 봉을 손가락질했다.

“그건 아니…….”

“너 진짜!”

아니라고 황급히 부정하기도 전에, 말꼬리가 잘렸다.

“어떻게 언질조차 주지 않을 수가 있냐?”

“…….”

“말을 했어야지! 독 처먹고 가출할 시간에 말부터 했어야지!”

레널드가 벌게진 눈으로 나를 노려 보며 다그쳤다.

나는 이해가 안 가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말하면, 뭐가 달라지는데?”

“아오, 뭐가 달라지긴! 말했으면, 같이…… 같이 해결책을 찾았을 거 아니야, 이 둔탱아!”

“…….”

“아무리 걔가 내 친동생이라도 네가 말했으면, 너 혼자만 다 떠안게 만들진 않았을 거다.”

“…….”

“너도 내 형제잖아.”

레널드가 단호하게 말했다.

공작저의 그 누구도 믿지 않았던 내 입장으로선 믿기 어려운 소리였다.

하지만 레널드의 괴로운 표정이, 죄책감 담긴 눈빛이 거짓이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걔가 세뇌를 써서 어쩔 수 없었어. 누구한테 말하면 첫째 오라버니처럼 당할까 봐.”

결국, 나는 조그맣게 진실을 털어 놓았다.

“미친. 그럼 형이 병신같이 군 게 세뇌당해서 그런 거야? 그 미친놈! 뇌에 힘을 줬어야지!”

내 말에 레널드가 놀란 눈으로 가감 없이 데릭을 욕했다.

속이 좀 시원해져서, 나는 조금 웃으며 덧붙였다.

“그리고 줬어, 언질.”

“뭐? 언제?”

“아버지한테, 조심하라고. 아버지가 이제야 알아차리신 것뿐이야.”

내 대답에 레널드의 얼굴이 굳었다.

“아오 씨, 아버진 왜 그런 중요한 소릴 나한테 일언반구도 안 하는 거냐고…….”

그가 퍽 불만스럽다는 듯 중얼거렸다.

아직도 술에 덜 깬 사람처럼 벌건 면상을 보자니, 나는 오히려 공작이 더 안쓰러워졌다.

그때였다.

“레널드! 페넬로페!”

불현듯 익숙한 음성이 우리를 불렀다. 나와 레널드의 고개가 동시에 돌아갔다.

연무장과 이어진 정원 너머 숲에, 흙투성이가 된 인영이 서 있었다.

“내가 돌아왔다!”

레널드가 입을 떡 벌렸다. 그것은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젊은 시절 검으로 한 가닥했던 공작이라지만, 분명 방금 납치됐는데…….

‘이렇게 빨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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