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의 엔딩은 죽음뿐-216화 (216/243)

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216화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레널드였다.

“아버지!”

비척비척 걸어오는 공작을 향해 그가 달려갔다.

나 또한 얼떨떨한 얼굴로 그 뒤를 따랐다.

“아버지,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마물은 어쩌고요? 그 무서운 계집이 순순히 보내주더랍니까?”

레널드는 숨 돌릴 틈도 없이 공작을 몰아붙였다.

“그게…….”

숨을 헐떡이며 공작이 막 입을 열려던 찰나였다.

“이리 와, 공녀.”

싸늘한 음성과 동시에 황태자가 나를 끌어당겨 제 뒤로 숨겼다.

스르렁-. 그리고 아차 할 틈도 없이 검을 뽑아 공작에게 겨눴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저, 전하! 왜 그러세요!”

나는 경악했다. 레널드는 두말할 것도 없었다.

막 귀환한 공작의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

당장이라도 그를 베어 낼 것처럼 검을 높이 치켜든 황태자는, 이내 비스듬히 칼날을 기울였다.

그리고.

“공작이 맞군.”

무언가를 확인한 듯한 칼리스토가 이내 깔끔하게 칼을 내렸다.

“……무슨 짓입니까, 전하. 아무리 황태자 전하시라지만, 매우 불쾌합니다만.”

공작이 분노를 삭이며 황태자에게 물었다.

“물이나 거울에 안 비친다며? 혹시 레일라가 아닌지 확인한 것뿐이니 너무 화내지 말게, 공작.”

방금 전 극악스러운 무례를 저지른 것이 무색하게, 황태자가 뻔뻔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였다.

그 말을 들으니 그가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 납득이 갔다.

찰나, 그가 게임 설정처럼 순간 피에 눈이라도 돌았나 싶었다.

‘무결한 황제 된다며, 이 미친놈아!’

다행히 공작도 대강 납득했는지,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 애…… 아니, 레일라는 마주치지도 못했습니다. 아마 제가 마물의 뱃속에서 사라진 것도 모를 겁니다.”

“어떻게 돌아온 거지?”

황태자가 그제야 본론을 물었다.

공작은 대답 대신 내게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주섬주섬 겉옷 안쪽에서 무언가를 꺼내어 내게 건넸다.

“네 선견지명이 옳았구나, 페넬로페.”

“이건…….”

공작의 손바닥 위에 올려진 것을 알아보고 눈을 크게 떴다.

탄 것처럼 새까맣게 변색된 얇고 동그란 모양.

그것은 내가 사냥 대회 전, 공작에게 선물한 애뮬릿이었다.

“마물의 위산이 몸에 닿는 순간 발동되더구나. 눈을 뜨니, 저택 부지의 숲속이었다.”

공작이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러나 귀에 잘 와 닿지 않았다.

그것보단…….

“이걸…… 여태 가지고 계셨어요?”

“그럼, 누가 준 선물인데.”

공작이 당연하다는 듯 대꾸했다.

그와 동시에, 내 얼굴이 이상하게 일그러지는 게 느껴졌다.

그 이후로 까맣게 잊고 있었다.

늘 암살에 시달리는 황태자와는 달리, 공작은 딱히 위험에 처할 일도 없었으니까.

‘버리거나 어디 처박아 뒀을 줄 알았는데…….’

그런 내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네게서 받은 이후로 한시도 몸에서 뗀 적 없었는데, 그러길 아주 잘했다.”

다 쓴 애뮬릿을 바라보는 공작의 얼굴에 흡족한 미소가 한가득 떠올랐다.

그 모습을 보니, 이상하게도 목이 메었다.

“뭐야. 그때는 어떤 주문이 새겨졌는지 말 안 해 주더니, 텔레포트였었나? 나보다 좋은 거였군.”

황태자가 옆에서 불만스럽다는 투로 지껄였다.

그를 무시한 채, 나는 천천히 공작에게 다가가 말했다.

“……어디 다친 덴 없으세요?”

“난 괜찮다. 그보다 너야말로 다친 덴 없느냐? 코피를 흘리던데. 지혈은 했고?”

본인은 마물에게 삼켜지기까지 했으면서.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살피기 바쁜 공작을 보니, 형용할 수 없는 감정들이 치밀어 올랐다.

나는 바보처럼 고개만 주억거리다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죄송해요.”

뜬금없는 사죄에 공작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무엇이 죄송해.”

“그냥…… 말없이 집 나간 것도 그렇고…… 들으셨는진 모르겠지만, 이본에게 죽여도 상관없다고 말한 것이요.”

다시 만나면, 다른 건 몰라도 이건 꼭 말해 주고 싶었다.

말해야 했다.

나는 용기를 내어 더듬더듬 그것을 토해 냈다.

“진심은, 진심은 아니었어요, 아버지.”

마물의 뱃속에서 공작이 혹시 내 말을 듣고 체념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이 집안 인간들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고 생각했으면서도.

“……진심이 아니었어요.”

그런데도 멀쩡한 공작을 보니, 눈물이 날 만큼 안도가 되었다.

참으로 우스운 일이지 않은가.

친딸을 잃었다는 것에 충격을 받았을 공작에게 인정을 바라는 내 꼴이.

나는 차마 그를 마주하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런데, 그때였다.

툭. 머리 위로 무언가 얹어졌다.

“고개 들거라, 페넬로페.”

내 머리 위에 손을 얹은 공작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에카르트는 그 어떤 경우라도 고개 숙이지 않는다. 넌 가문의 일원으로서 위급 상황에서도 당황하지 않고 훌륭하게 대처했지.”

흙투성이가 된 지저분한 모습임에도, 공작은 대귀족의 위엄을 풍겼다.

“잘했다.”

그 말과 함께 공작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종종 ‘잘했다’는 칭찬은 했지만, 신체 접촉은 처음이었다.

“네게 이것을 받은 이후 마주치는 모든 이들에게 보여 주며 자랑했었다. 이제 그치들에게 네 선견지명을 알릴 차례군.”

“네? 뭐, 뭐라고요?”

그때까지만 해도, 내 평판은 최악을 달리고 있었다.

공작이 두 아들놈도 모자라 남들에게까지 그런 짓을 했다는 것에, 나는 경악했다.

내 반응에 공작이 웃었다.

“에카르트 공작은 사고뭉치 딸내미 싸고도는 팔불출이란 소문이 나는 것은 금방이더구나.”

방금 전까진 가문의 수장다운 묵직하기만 했던 음성에 점점 온기가 담겼다.

“멋모르는 치들이 뭐라 떠들어대든 신경 쓴 적 없다. 어린애가 뭘 안다고, 사고 좀 칠 수도 있지. 내가 좀 더 노력해서 네 허물을 감싸는 아비가 되면 되는 거 아니냐.”

“…….”

“무슨 짓을 하든, 나는 네가 한 번도 자랑스럽지 않은 적이 없다, 우리 딸.”

“흐, 흐으.”

눈시울이 급격히 뜨거워졌다.

나는 더 참지 못하고 왈칵 무언가를 터뜨렸다.

나는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런 나를 공작이 조심스럽게 안아 주었다.

장내에 고요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눈치가 아예 죽어 버린 것은 아닌지, 이 순간엔 두 파멸의 주둥아리들도 조용했다.

명확하게 명명할 수 없는 각종 감정들이 전신을 내리쳤다.

가엾은 페넬로페의 비명, 소리 없는 내 아우성은 그렇게 천천히 사그라들었다.

시간이 흐르고, 천천히 이성이 돌아왔다.

나는 공작에게 안겨 있는 상황이 너무나도 민망해지기 시작했다.

“이, 이제 괜찮…….”

정신을 추스르자마자 황급히 몸을 물릴 때였다.

“전하! 전하!”

마침맞게 누군가 다급하게 황태자를 외쳤다.

고개를 돌리자, 멀리서 그의 친위대 중 한 명이 헐레벌떡 달려오고 있었다.

“긴급 상황입니다!”

“무슨 일이지?”

“크로니아 반란군들이 이틀 전 새벽, 황궁을 기습하여 태양궁을 점령했다고 합니다.”

“뭐라! 그게 왜 지금에서야 전달된 거지?”

새파랗게 질린 기사의 전언에 황태자가 번뜩 눈을 치켜떴다.

그러나 기겁할 만한 보고는 그게 끝이 아니었다.

“그, 그게…… 놈들이 가장 먼저 태양궁을 암습하여…… 화, 황제 폐하께서 인질로 잡혀 계신 것으로 추정됩니다.”

“허!”

황태자가 날카롭게 헛웃음을 터뜨렸다.

제국의 황제가 기거하는 궁이 가장 먼저 함락되었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근위대와 황궁에 남은 마법사 놈들은 그 시간에 쳐자빠져서 자고 있었나? 집 지키는 개만도 못한 것들 같으니라고.”

제 잘못도 아닌데 기사가 면목 없다는 듯 고개를 조아렸다.

길 잃은 분노임을 알아차린 칼리스토는 곧바로 냉정하게 상황 파악을 시작했다.

“그 쓸모없는 놈들은 됐고, 황궁의 방어 결계는. 그것까지 뚫을 수는 없었을 텐데.”

“반란군들과 내통해 결계를 파훼한 세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역모를 꾸민 자들이 있다는 건가?”

“기습 전, 엘렌 후작의 세력이 급히 황비 궁에 입궁한 것으로 확인…….”

“됐다. 더 들을 것도 없군.”

보고를 듣던 황태자가 신경질적으로 손을 휘저었다.

엘렌 후작은 황비의 외척이었다.

‘뭐야. 그럼 2황자파가 반란군들이랑 손잡고 역모를?’

다급하게 돌아가는 상황에 곰곰이 인과를 떠올리고 있을 때였다.

“제기랄.”

나와 같이 곰곰이 생각에 잠겼던 황태자가 불현듯 욕설을 내뱉었다.

“그때 그 델만 놈들의 기습은 눈속임이었군. 어쩐지 마물을 가지고 있는 것치곤 공격이 영 신통치 않다 했더니…… 이걸 위해 발을 묶으려 했던 건가.”

그의 말에 불쑥 뇌리를 스쳐 지나가는 장면이 있었다.

- 왕자님!

- 생각보다 놈들의 전력이 강합니다! 이대로라면 마물들을 모조리 잃을 수도 있습니다! 그만 원래 작전대로 진행하시는 게…….

이클리스에게 납치당할 무렵, 당황한 델만 군인이 외친 말이었다.

그렇다면 결국, 지금의 사태는 레일라인 이본의 명령하에 벌어진 거란 소리였다.

‘제국을 손에 쥐여 주겠다는 둥, 헛소리를 할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그 미친놈이 기어이 일을 터뜨려 버렸다.

‘이클리스, 반란군, 엘렌 후작, 역모.’

천천히 생각을 정리하던 나는 문득 소름이 돋았다.

이본이 대체 어디까지 손을 뻗어 놓은 건지 알 수 없어 무서웠다.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