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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엔딩은 죽음뿐-217화 (217/243)

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217화

“북방에도 알렸나?”

“포터 대위님께서 군사들을 이끌고 급히 수도로 회군 중이라 합니다.”

그사이, 상황 보고가 끝이 났다.

칼리스토는 골이 아프다는 듯 험악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세드릭이 휘하에 있는 군사들을 이끌고 오더라도, 이미 반란군이 황궁에 진을 친 상태였다.

견고한 방어 결계까지 갖춰진 공성전이 쉬울 리 없었다.

그때였다.

“에카르트에서 병력을 지원하겠습니다, 전하.”

공작이 불쑥 결연한 얼굴로 폭탄선언을 했다.

“아버지.”

나와 레널드는 깜짝 놀라 그를 돌아보았다.

황태자가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물었다.

“……진심인가?”

“나라가 곤궁에 처했는데, 가만히 앉아 있을 수만은 없지요.”

“정말 의외로군. 전쟁할 땐 최소한의 병력도 지원하지 않던 그대가…….”

공작의 대답에 황태자가 정말로 의외라는 듯이 중얼거렸다.

이번 정복 전쟁에 아예 참여조차 하지 않았던 에카르트이니 그럴 만도 했다.

황태자가 의구심 섞인 눈으로 다시 물었다.

“지금 공작의 발언, 날 지지한다는 것으로 봐도 되나?”

“물론, 그건 아닙니다.”

그러나 그의 물음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단호한 부정이 돌아왔다.

“에카르트에서도 엘렌 후작에게 진 빚이 있어서 말입니다.”

“빚?”

“그 작자가 사냥 대회에서 감히 제 딸을 모함해 놓고…… 쥐새끼처럼 쏙 빠져나갔지 않습니까.”

“아.”

“황비 때문에 코앞에서 그놈을 놓쳤던 걸 생각하면……!”

공작이 두 주먹을 꽉 쥔 채 부들부들 떨었다.

황태자가 알 만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그대가 가장 앞서서 후작을 파문하려 했었지. 실패하여 국고만 불렸지만 말이야.”

“전하께서 적극적으로 나서 주신 덕분에 그래도 그놈의 영토를 절반이나 빼앗을 수 있었습니다. 뒤늦은 인사이지만, 감사했습니다.”

사냥 대회 이후 그런 뒷얘기가 있었는지 전혀 몰랐던 나는, 그저 휘둥그레진 얼굴로 둘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나도 그 빚을 잊지 않았다. 그 쥐새끼를 잡고 나서 하고자 하는 일이 참 많은데…… 모처럼 반대하지 않을 가문이 있어 다행이군.”

“반대라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에카르트는 무조건 동참하겠습니다.”

“그럼 잘 부탁하지, 공작.”

황태자가 손을 내밀자, 공작이 덥석 그 손을 잡고 흔들었다.

순식간에 두 사람의 동맹이 이뤄졌다.

대충 공작과 대화를 마무리한 황태자는 곧바로 내게로 다가와 말했다.

“마법사와 호위를 남겨 둘 테니 여기 있어. 그대의 아비와 황궁을 정리한 후에 데리러 올 테니까.”

나는 곧장 고개를 저었다.

“저도 같이 가요. 이본도 황궁으로 갔을 거예요.”

“안 돼.”

“왜요? 저 강해요. 물약도 마셨잖아요.”

나는 반대하는 황태자를 이해할 수 없었다.

나만큼 범위 넓고 공격력이 강한 마법사는 없었다. 비록 주문을 외울 땐 미치도록 수치스럽지만…….

고대 마법으로 한 방에 정리할 수 있는 일 아닌가.

“그대가 약하단 뜻이 아니야.”

억울하다는 내 표정에 황태자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대의 무식한 마법이 얼마나 강한지는 내가 가장 잘 알지.”

“무식……?”

“그렇지만 반란군들이 날뛰는 이상 황궁은 전쟁터나 다름없을 거다. 게다가 2황자파 놈들이 숨겨 둔 병력이 어느 정도인지도 몰라.”

“…….”

“그 상황에서 레일라가 쉽게 잡혀 줄 리 없잖나. 그대를 노린 함정이라면 어떻게 할 거지?”

냉정하게 상황을 파악한 황태자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확실히 나는 강력한 고대 마법만 믿고 의욕만 앞선 경향이 있었다.

“개싸움 도중에 그대를 지키는 데 한계가 있어. 그러니 찌끄래기들이 다 정리됐을 때, 그대는 안전하게 대가리만 치라고. 응?”

시무룩해진 내 얼굴에 황태자가 위로하듯이 말했다.

전법에는 완전히 문외한이었지만, 그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하지만.

“하지만…… 이본이 잡고 있는 인질들은요? 제겐 중요한 하녀랑 어린아이들이에요.”

인질은 공작뿐이 아니었다.

영악하게도, 이본은 내가 차마 죽든 말든 신경 끄지 않을 범위를 잘 알고 있었다.

“반란군을 모두 진압하는 사이에, 인질들을 모조리 죽이기라도 하면…….”

“레일라의 요구대로 움직인다고 인질들을 모두 살려 준다는 보장은 없어, 공녀.”

황태자는 이번에도 단호하게 내 망설임을 잘라 냈다.

그를 바라보는 내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이 느껴졌다.

칼리스토가 한숨을 쉬며 나를 끌어안았다.

“공작과 상의해서 인질 구출 작전부터 세울 테니까, 그런 얼굴 하지 마.”

머리맡에 나를 달래는 말이 쏟아졌다. 단단한 그의 품처럼, 안심되는 음성이었다.

칼리스토는 한 번도 뱉은 말을 어긴 적이 없었다.

그는 언행이 좀 상스럽긴 해도, 훌륭한 지휘관이었다.

그러니, 인질도 구출하고 반란군도 금방 진압할 것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불안하지?’

알 수 없는 위화감이 발목을 잠식했다.

나는 그의 품에 가만히 안긴 채 붉은 기운이 싹 트고 있는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쯧, 벌써 동이 터 오르고 있군.”

같은 것을 보고 있었는지, 문득 칼리스토가 혀를 찼다.

이본과 마물을 상대하며 밤을 꼬박 지새운 것이다.

“그대는 걱정이 너무 많아. 눈 좀 붙여.”

커다랗고 따뜻한 손바닥이 눈 위로 내려앉았다.

곤두서 있던 신경 사이로 거짓말처럼 깊은 피로가 몰려들었다.

“일어나면, 모든 게 다 해결되어 있을 테니까.”

나는 온기를 찾아 그의 품을 조금 더 파고들었다.

그의 말처럼, 눈을 떴을 때 모든 게 다 끝나 있었으면 좋겠다.

* * *

칼리스토는 급히 공작저를 떠났다. 호위들과 황궁 마법사 한 명을 남겨 둔 채.

오랜만에 내 방으로 돌아와 푹신한 침대에 벌러덩 드러누웠음에도,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무언가 놓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자꾸만 머릿속을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불쑥 주머니 속에 손을 집어넣어 안에 있는 것을 꺼냈다.

이본에게서 빼앗은 거울 조각. 아직은 내 손 안에 고이 있었다.

‘뷘터는 잘 가지고 있겠지?’

수도로 돌아오면 그를 찾아갈 생각이었는데, 망할 이본이 갑자기 정체를 드러내서 그럴 틈도 없었다.

나는 빛이 바랜 허름한 조각을 멍하니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이건 원래 고대 마법사들이 만든 ‘진실의 거울’의 일부였다.

하지만 진실의 거울은 내게 진실을 보여 준 이후 바로 무너져 내려 가루가 되었다.

그런데 손에 든 것은 여전히 멀쩡했다. 이본이 가지고 있는 나머지 조각들도 멀쩡할 거란 소리다.

‘그런데, 이본이 이걸로 뭘 했더라?’

나는 손에 든 조각을 이리저리 돌려 보았다.

그리고 황당해서 제대로 읽어 보지도 않았던 ‘히든 스토리’를 곰곰이 떠올렸다.

「강인한 생명력을 마음껏 갈취한 그녀는, 거울 조각을 이용하여 형제들의 봉인을 풀고 복수를 완성한다.」

그땐 너무 당황스러워서 깊게 생각하지 않은 문제였다.

확실히 레일라들을 다시 깨우면 큰일이었다.

‘이본 같은 미친 괴물들이 몇 명이나 더 늘어난다는 거잖아.’

나는 갑자기 심각해져서 누운 몸을 일으켜 앉았다.

뭔가 놓치고 있다는 느낌은 괜한 위화감이 아니었다.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다.

“봉인을 못 풀게 막아야 해.”

나는 들고 있던 거울 조각을 힘껏 쥐었다.

“그런데, 그럼 나머지 조각은 어디에 있는 거지?”

곧바로 히든 스토리가 떠올랐다.

「레일라들은 후일을 도모하기 위해 조각의 일부를 황금룡의 무덤에 숨겼다.」

“공작저로 올 게 아니라 바로 황궁으로 갔어야 했는데.”

그럼 이본이 황궁에 도착하기 전에 먼저 숨긴 조각들을 찾았을 수도 있지 않은가.

아쉽다는 생각이 들 무렵.

“아.”

그와 동시에 번뜩 뇌리를 스쳐 지나가는 장면이 있었다.

나는 천천히 입을 벌렸다.

“그럼, 그때 동굴에서 본 시체가…….”

사냥 대회 때, 황태자와 함께 암살자에게 쫓기다 조난당한 동굴에서 본 마법진.

칼리스토는 뒤늦게 그 유골이 고대 레일라로 확인됐다고 말했다.

‘설마…… 그럼 그게 조각 옮겨 놓은 거였어?’

대체, 이 미친 게임은 돌발 퀘스트조차 허투루 나온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때 무언가를 알아챘더라면 이본을 미리 막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등골을 타고 오싹 소름이 돋았다.

“그럼…… 이제 남은 조각은 정말 뷘터가 가지고 있는 거랑, 내 것밖에 없잖아.”

그간 너무 안일했다.

세뇌만 못 하게 하면 될 줄 알았는데, 더 큰 복병이 남아 있었다.

이미 돌발 퀘스트를 통해 주어졌던 한 번의 기회는 놓쳤고, 이본이 황궁을 점령했으니 이제 믿을 것은 이것뿐이었다.

“일단 뷘터에게 가 봐야겠어.”

나는 침대에서 벌떡 내려왔다.

마음이 급해졌다. 내게도 조각을 빼앗으려고 온갖 비열한 짓을 다 하던 그 괴물이 뷘터라고 가만히 뒀을 리 없을 테니.

거울 봉을 단단히 쥔 채 나는 다급히 방문을 열었다.

“공녀님, 무슨 일이십니까?”

문을 열자마자, 황태자가 붙여 둔 호위 다섯 명이 복도를 에워싸고 있는 것이 보였다.

어디서 본 기시감에 말문이 막혔다.

‘귀신같은 놈.’

알겠다고 했지만, 분명 내가 가만히 기다리고 있지만은 않을 거란 걸 알았을 것이다.

나는 칼리스토의 철저함에 혀를 내둘렀다.

“……물약이 좀 이상해서 그런데, 나랑 같이 온 황궁 마법사를 불러 줘.”

결국 난 그렇게 말하고 다시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모시는 주인 놈처럼 호락호락해 보이지 않는 기사들을 따돌릴 엄두조차 나지 않았기에.

얼마 후 노크 소리와 함께 황궁 마법사가 찾아왔다.

“화, 황태자비 전하, 찾으셨다고…….”

그는 소름끼치는 호칭과 함께 공손히 인사했다.

늪지대에서도 함께한 이인지라 이제는 제법 낯이 익었다.

“이봐, 이름이 뭐지?”

“포, 폴입니다, 전하.”

“그래, 폴. 이제 이동 마법 쓸 수 있지?”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 그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 이동 마법이요? 단거리는 할 수 있습니다만…….”

“나랑 같이 갈 때가 있어. 물론 전하껜 비밀이야.”

“예?! 하, 하지만 전하께서 비 전하를 아무 데도 가시지 못하게 꼭 지키라고 명하신지라…….”

역시 내 예상이 맞았다.

“괜찮아. 내가 가자고 했으니, 그대에서 피해 갈 일은 없을 거야. 멀지 않은 곳이니까 그대는 잠깐 마법만 빌려주는 거라 생각해.”

내 단호한 말에 폴은 전혀 괜찮지 않은 표정으로 울먹였다.

“그래도…… 전하께서 아시면 경을 칠 것 같은데요…….”

“내가 책임진다니까?”

“저, 저는 못 하겠습니다! 죄송해요!”

폴은 절대로 말을 듣지 않겠다는 듯 마구 도리질을 쳤다.

상냥하게 회유하려 했는데, 이젠 별수 없었다.

“그 경, 지금 치고 싶어?”

들고 있던 거울 봉을 그에게 겨누며 음산하게 읊조리자, 폴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빨리 주문 외워.”

순순히 주문을 외우는 그를 보며 나는 만족스럽게 생각했다.

‘역시 협박이 최고야.’

그리고 얼마 후, 마법사와 함께 도착한 곳은 흰 토끼 상단이 아니라 무너져 내린 폐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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