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218화
동이 막 터 오른 이름 아침, 폴을 끌고 온 골목은 무척이나 적막했다.
“비 전하, 여, 여기가 맞습니까?”
“응, 잘 왔네.”
나는 멀쩡한 상단 건물의 모습에 안도했다.
뷘터에게 조각 하나를 빼돌린 것을 아직 들키지 않은 것 같아서.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했어. 난 볼 일이 있으니까 그대는 그만 돌아가 보도록 해.”
“예에?! 어, 어찌 저 혼자……! 기, 기다리겠습니다!”
“뭐, 그러든가.”
그럼 나야 다행이었다.
수치스럽게 뷘터에게 데려다 달라고 부탁하지 않아도 되니.
흰 토끼 문양이 그려진 낡은 문을 두드리기 위해 막 계단 한 칸을 올랐을 때였다.
“그, 그런데 비 전하…… 건물이 좀 이상한데요?”
폴이 소심하게 나를 붙들었다.
“뭐가?”
“마나가 폭발하기라고 한 것처럼 이 건물에서 강력한 마력이 느껴지는데…… 아, 안 느껴지십니까?”
“그래? 그러고 보니 뭐가 느껴지는 것 같기도.”
물론 아무것도 안 느껴졌다.
하지만 석연치 않은 그의 말을 나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마법사가 운영하는 상단이니까 마력이 느껴지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
남은 계단을 오른 나는 이내 문을 ‘똑똑’ 두드렸다.
“나야. 안에 있나?”
나는 잠시간의 틈을 두고 한 번 더 문을 두드렸다.
“나 돌아왔어. 급히 할 말이 있으니까 빨리 문 열…….”
끼이익…….
그 순간이었다. 음산한 소리를 내며 문이 힘없이 열렸다.
그리고 그 틈새로 보이는 안은, 마지막으로 본 기억과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뭐야.”
폭탄이라도 터진 것처럼 사무실 안이 온통 쑥대밭이었다.
무너져 내린 천장과 기둥, 벽들.
더는 건물이라 볼 수 없을 만큼 시커멓게 타들어 간 잔해들만 남은 터는 꼭 폐가나 다름없어 보였다.
‘잘못 온 건가?’
순간적으로 멍해진 나는 주춤 물러서서, 계단을 한 칸 내려갔다.
그러나 밖에서 보는 건물은 똑같았다.
“대체 이게 무슨…….”
얼떨떨한 얼굴로 연신 건물 외벽과 문 안쪽을 번갈아 바라보던 때였다.
“차, 착시 마법의 일종인 것 같습니다.”
뒤에 있던 폴이 더듬더듬 아는 체를 했다.
“착시 마법?”
“예, 예.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멀쩡해 보이도록요.”
그의 말에 불길한 예감이 섬뜩하게 목 끝을 잠식했다.
‘설마, 이본이 벌써 여길 다녀간 건가?’
나는 다급하게 다시 문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뒤에서 폴이 나를 불렀지만 개의치 않았다.
밖에서 보는 것과 극명하게 차이 나는 내부를 보자니 덜컥, 가슴이 내려앉았다.
“이봐!”
나는 무너져 내린 잔해를 겅중겅중 뛰어다니며 뷘터를 찾았다.
강한 마법사인 그가 이토록 허무하 게 당할 리 없었다.
그러나 바꿔 말하면, 마법으로 운영되던 상단이 하루아침에 이렇게 폭삭 주저앉을 리도 없었다.
보통 일이 아니고서야.
‘그러고 보니…… 이본은 에밀리와 아이들을 어떻게 인질로 잡은 거지?’
불현듯 정신이 없어서 놓치고 있던 위화감 하나가 뇌리를 파고들었다.
분명 뷘터만이 아는 안전가옥에 대피시킨 걸로 알고 있는데…….
“이봐! 후작님! 후작님, 어디 계세요!”
상단주를 부르던 호칭이 점점 무거워졌다.
“여긴 아, 아무도 없는 듯합니다!”
정신없이 잔해들 사이를 뛰어다니며 뷘터를 찾는 나를 보다 못한 폴이 소리죽여 외쳤다.
마법을 썼는지, 그의 손에 작은 빛덩이가 매달린 지팡이가 들려 있었다.
“……시체도?”
나는 거칠게 헐떡이며 그에게 물었다.
내 말에 다시 지팡이를 한 번 휘두른 그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없는 듯한데요.”
“하아…….”
그제야 안도의 한숨이 내쉬어졌다.
뷘터 놈이 기어이 조각을 빼앗겼다면 좀 빡치긴 하겠지만, 그렇다고 이본에게 당해서 시체로 발견되길 원하진 않았다.
‘이제 어디 가서 뷘터를 찾지? 베르단디 후작저라도 가 봐야 하나?’
막막한 눈으로 무너져 내린 사무실 안을 다시 한번 둘러보며 고민할 때였다.
“그런데 비 전하, 이곳의 마기가 심상치가 않습니다.”
폴이 소심한 목소리로 읍소했다.
“너무 위험해 보이는데, 이만 돌아가시는 게 어떨지…….”
마법사들이 느끼는 마력이나 마기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뷘터가 없으니 허탕이었다.
“그래. 그만 돌아가는 게…….”
고개를 끄덕이며 막 폴의 뒤를 따라나서려던 찰나였다.
지이이이잉-.
문득 들고 온 거울 봉이 손안에서 무섭게 진동했다.
“무슨…….”
무심코 시선을 들어 올리자, 봉의 상단에 있는 화려한 손거울이 흰빛을 쏟아내며 무언가를 비추고 있었다.
무너진 내벽의 잔해 위였다.
거울에서 쏟아진 빛이 허공에 길쭉한 직사각형을 그렸다.
“저건…….”
한눈에 봐도 ‘문’ 모양이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그곳이 뷘터가 벽 뒤에 숨겨 둔 비밀 통로가 있던 자리임을 알아차렸다.
마치 이 안으로 들어오라는 듯 완전히 그려진 문틀에서 흰빛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어서 나오지 않고 뭐 하십니까?”
이미 문밖으로 빠져나간 폴은 나오지 않는 내게 물었다.
“그댄 공작저로 먼저 돌아가도록 해. 난 여기 좀 더 있어야겠어.”
“예에? 여기 볼 게 더 뭐가 있다고 그러십니까…….”
짧게 명령하자, 그가 해괴한 표정으로 내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의 눈에는 이렇게 눈이 부시도록 빛이 쏟아지는 ‘문’이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잠깐 확인만 하고 금방 돌아갈게.”
폴의 얼굴이 단번에 창백해졌다.
“제발, 비 전하……. 황태자 전하께서 아시기라고 하면 저는 엉덩이에 꼬리가 달린 험한 꼴로 살해당할 겁니다…….”
무슨 소린지는 모르겠지만, 거의 울기 직전인 마법사를 위해 나는 선뜻 방법을 제시했다.
“그럼 내게 추적 마법이라도 걸어.”
황태자 놈이 가진 복제 지도에서 착안한 것이었다.
“그럼 적어도 날 쫓아오기 전까지 전하가 그대를 죽일 일은 없을 테니까.”
“저, 정말이십니까?”
“응. 시간 없으니까 빨리 새겨.”
“소, 손등이 조금 따끔하실 겁니다.”
다행히 내가 제시한 방법이 괜찮았는지, 폴은 허겁지겁 고개를 끄덕이며 지팡이를 휘둘렀다.
잠시 후, 그의 말처럼 화끈한 감각과 함께 손등 위에 황금색의 작은 마법진 문양이 새겨졌다.
“끝났어? 이제 그만 가 봐.”
“제발 전하께서 아시기 전에 돌아와 주세요…….”
폴은 마지막까지 훌쩍이며 사정하다가 이동 마법으로 돌아갔다.
나는 그가 완전히 사라진 것을 확인한 후, 뒤로 돌았다.
여전히 허공에 생긴 문이 환한 빛을 뿜어내며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들고 있던 거울 봉의 상단을 흘깃 곁눈질했다.
아까부터 빙글빙글 맴돌던 흰 글씨를 망연히 바라보다가, 이내 한숨처럼 조용히 읊조렸다.
“……삐라띠오, 파씨 또르 에스삐호.”
미친 주문 같으니라고.
폴을 보내서 다행이란 생각과 동시에 눈앞이 하얘졌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높다란 계단 위에 우뚝 서 있었다.
멍한 눈을 끔뻑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낯설지 않은 곳이었다. 거대한 기둥이 세워진 광활한 공간.
“어…….”
계단 아래 바닥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해골바가지들이었다.
‘고대 레일라의 무덤.’
번뜩 장소에 대한 기억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바로 얼마 전 ‘진실의 거울’을 찾아 칼리스토와 함께 왔었으니까.
‘비밀 공간 들어가는 줄 알았더니, 갑자기 왜 여기 온 거야.’
혼란스러운 눈으로 적막한 공간을 둘러볼 무렵이었다.
문득 저 멀리 눈에 띄는 것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이 커다란 곳의 벽 한 면을 차지할 만큼 거대한 틀.
그곳에서 알 수 없는 빛이 간헐적으로 번쩍거렸다.
틀림없이 진실의 거울이었다.
“뭐지? 그때 분명 부서졌는데…….”
혼잣말이 절로 새어 나왔다.
내게 수치스러운 봉 하나를 준 후 부서지다 못해 가루가 된 거울이 어떻게 다시 멀쩡해진 건가.
지이이잉, 지이이잉-.
그때 들고 있던 거울 봉이 또다시 진동했다. 빛이 나는 진실의 거울에 공명이라도 하듯이.
나는 그것에 이끌리듯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쩔그럭, 빠드득-. 유골들이 발에 채이고 짓밟히는 것도 개의치 않은 채 얼마나 걸었을까.
부쩍 가까워진 거울 앞에, 문득 이상한 것이 보였다.
유골 대신 바닥을 메운 채 붉게 일렁이는 무언가.
한 걸음, 한 걸음,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그것은 점점 더 선명해졌다.
붉은빛이라 생각했던 것의 정체를 알게 된 나는 우뚝 걸음을 멈췄다.
그것은 붉게 타오르는 거대한 마법진이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 끈 떨어진 인형처럼 힘없이 쓰러져 있는 누군가.
타닥, 타닥- 불꽃 튀는 소리가 나지막이 울려 퍼졌다.
나는 눈을 의심했다.
별 모양으로 솟아오른 불길.
그 아래 사지가 속박된 채 무력하게 타들어 가고 있는 이는 다름 아닌.
“……뷘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