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219화
내 부름에 남자는 천천히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레이디.”
익숙한 음성이 나를 불렀다.
격한 움직임이라도 있었는지, 토끼 가면이 반쯤 벗겨져 그의 맨 얼굴이 얼핏 드러났다.
“그대…… 아니, 후작님. 이게 대체…….”
나는 놀란 채 버벅이다가, 이내 거울 앞으로 뛰어갔다.
“후작님!”
왜 뷘터는 뜬금없이 진실의 거울 앞에서 타들어 가고 있는 건지.
그런 것들을 떠올릴 겨를이 없었다.
한달음에 마법진까지 도달한 나는 입고 있는 로브의 소매로 뷘터의 위를 마구 내리쳤다.
물이 없으니, 그의 몸을 가르고 있는 불길을 꺼트리기 위해선 이 방법밖에 없었다.
퍽, 퍽-!
“윽, 으윽! 여, 영애, 잠시만!”
로브로 몸뚱이를 마구 내리치자, 그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신음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불길은 꺼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조금만 참아요! 일단 불부터 끄고요!”
“아니, 윽! 잠시만! 저 환잡니다! 영애 때문에 다친 곳이……!”
그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나는 그제야 그를 내리치던 몸짓을 멈추었다.
난데없는 구타로 인해 안 그래도 덜렁거리던 토끼 가면이 완전히 벗겨졌다.
드러난 그의 이마가 온통 피로 물들어 있었다.
눈이 절로 휘둥그레졌다.
“……다치셨어요?”
“조금.”
“이 불 때문에 그런 거…….”
“이 마법진 때문이 아닙니다. 이본 영애, 아니…….”
그가 아랫입술을 지그시 사리물며 정정했다.
“레일라를 상대하다가 그런 겁니다.”
불길한 예감이 적중했다. 그 악귀가 기어이 내게 오기 전, 뷘터를 찾아갔던 것이다.
“조각은, 빼앗겼군요.”
“……죄송합니다.”
내 말에 뷘터의 낯빛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라온이 세뇌당한 상태였습니다.”
“라온이요? 대체 언제…….”
“아마도, 솔레일에서였겠지요.”
그가 씁쓸한 어투로 중얼거렸다.
“저는 결국…… 그 무엇도 지키지 못했군요.”
뷘터의 얼굴 위로 짙은 패색과 선연한 고통이 스쳐 지나갔다.
못 본 새 고생이 많았는지, 그의 얼굴이 눈에 띄게 초췌했다.
‘라온이 세뇌당했다’는 말로, 조각을 빼앗긴 것과 아이들이 인질이 된 이유가 한 번에 이해됐다.
그에게 화가 나는 것과는 별개로 그의 심정은 이해가 갔다.
공작이 지렁이에게 삼켜졌을 때 내가 느꼈던 무력함과 까마득한 절망.
그것을 그는 더더욱 처절하게 느꼈을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게 다 그의 실책이었으니까.
“일단…… 이 불은 어떻게 끄는데요.”
이미 엎질러진 물, 잘잘못을 따지기에 상황이 너무 좋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그의 몸 위로 ‘타닥, 타닥’ 타오르는 불길을 응시했다.
이렇게 불이 생생한데 아직도 살아 있는 게 신기했다. 마법사는 원래 명줄이 질긴 걸까.
“안 뜨거워요?”
“영애는 뜨거우십니까?”
그러고 보니, 놈을 구한답시고 나 또한 겁도 없이 타오르는 마법진 한 가운데에 뛰어든 상태였다.
나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법진이 그려지지 않은 곳만 골라 밟았다 해도, 불길을 바로 옆에 두고 이토록이나 멀쩡할 리 없었다.
“……안 뜨겁네.”
“저도 뜨겁진 않습니다. 아직은요.”
멍하니 중얼거리자, 뷘터가 덤덤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래도 돌아가야 하니까, 뭐 물 뿌리는 주문이라도 알려 줘요.”
“소용없을 겁니다.”
“왜요?”
“여긴 현실이 아니라, 일어나지 않은 미래이자 과거 속이니까요.”
나는 알 듯 모를 듯한 그의 말에 미간을 좁혔다.
“그게 무슨…….”
“이본을 마주쳤습니까?”
되묻는 말을 끊고 뷘터가 화제를 전환했다.
나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바탕 붙고 오는 길이에요.”
“조각을…… 빼앗겼습니까?”
검푸른 그의 동공이 일순 흔들렸다.
나는 대답 대신, 주머니에서 조각을 꺼내 보여 줬다. 그보다 확실한 안심을 줄 수 없을 테니.
그러나 빛터는 예상처럼 안도하긴커녕, 불길로 결박된 팔을 힘겹게 뻗어 조각을 쥔 내 팔을 와락 붙들었다.
“이본이 절대로 유물을 완성시키게 두어선 안 됩니다. 고대 레일라들이 진실의 거울의 일부를 미리 떼 놓은 것은 후일, 봉인을 풀기 위한 대비였습니다. 지금 이본이 하려는 짓이지요.”
이미 진실의 거울이 보여 준 ‘히든 루트’를 통해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뷘터 또한 알고 있어 다행이었다. 나는 다급히 물었다.
“어떻게 막죠? 방법을 알려 주세요.”
“이본이 이미 황궁으로 갔다면, 막을 방법은…….”
뷘터는 말하다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그러더니 얼마 후, 힘겹게 황당한 말을 내뱉었다.
“막을 방법은 없습니다.”
“네……?”
“이것을 가지고, 숨으십시오.”
이어진 말은 더욱 기가 막혔다.
“지금 저보고…… 도망치라는 말씀이세요?”
“필요하다면.”
잘못 들은 게 아닐까 싶었으나, 그는 단호하게 답했다.
‘얘가 불에 타들어 가기 직전이라 미쳤나?’
나는 생소한 눈으로 뷘터를 보다가 말했다.
“차라리 저보고 이본을 죽이라고 하세요. 싸우다 다치더라도 후작님 탓하지 않을 테니까요.”
“황금룡의 송곳니로 몸을 완전하게 만든 이상 마법으로 죽일 수 없습니다.”
“뭐라고요!”
나는 눈을 부릅떴다. 처음 듣는 소리였다.
“그걸 왜 이제 말해!”
나도 모르게 반말로 닦달하자, 뷘터의 얼굴이 떨떠름해졌다.
“저도 안 지 얼마 안 된지라…….”
“아까 그냥 죽여 버렸어야 했는데!”
내 험악한 말에 뷘터가 누운 채로 몸을 움찔거렸다. 그러나 눈에 와 닿지 않았다.
공작이 거대 지렁이에게 잡혀 가든 말든, 그냥 있는 대로 마법을 쏴 젖혀야 했다.
한 끗 차이로 쉽게 죽일 기회가 멀어지자, 환장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연신 한탄하던 나는, 간신히 이성을 되찾고 물었다.
“몸을 완전하게 만들면…… 그럼 어떻게 되는데요?”
“진실의 거울이 있더라도 더는 봉인할 수 없을 만큼 강해지겠지요. 게다가 이 마지막 조각까지 손에 쥐어서 봉인된 레일라들까지 부활시킨다면.”
“…….”
“그러면 영애 혼자서는 상대할 수 없을 겁니다. 그러니…… 조각을 가지고 안전한 곳에 숨으십시오.”
다시 이야기가 도피로 귀결되었다.
나는 고작 도망가란 소리나 듣고자 뷘터를 찾아온 게 아니었다.
“그럼 아이들은요.”
삭막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당신은 그 애들 때문에 조각까지 내줬으면서, 저보곤 죽든 말든 외면하라고요?”
“그 아이들은…….”
아니나 다를까, 역린을 건드리자 뷘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럴 거면서, 마음에도 없는 소리는 왜 자꾸 하냐며 따지고 들려던 찰나.
“그 애들을 사지로 몬 것은 접니다. 영애는 아무런 상관도, 잘못도 없습니다.”
그가 지껄였다.
“레일라들이 부활한다면, 그 아이들은 아마 그들의 먹이로 쓰일 겁니다. 어리지만 어쨌든 마법사들이니까.”
“…….”
“그 전에 평온을 맞이하는 것이 아이들에게는 더…….”
“하. 네가 이렇게 개새낀 줄은 미처 몰랐네.”
차가운 조소가 입 밖을 비집고 튀어나왔다.
“영애.”
다소 험악한 내 말에 뷘터가 눈을 크게 떴다.
나는 서늘하게 그를 응시하며 고요하게 뇌까렸다.
“……그렇게 조각 가지고 살아남으면.”
“…….”
“이본이 언제 나타날까, 조각은 어디에 숨겨야 할까, 저 사람 세뇌당한 건 아닐까.”
이곳으로 끌려들어 와서 지겹도록 해 온 일이 아닌가.
이제야, 이제야 끝이 보이는데.
이 빌어먹을 게임을 끝낼 방법을 알아냈는데.
“나더러 평생 벌벌 떨면서 살라고?”
나는 이를 악물었다.
“차라리 네가 준 독을 마셨으면 마셨지, 난 그렇게 못 해. 뷘터 베르단디.”
‘괜히 시간 낭비만 했어. 폴을 따라 돌아가서 차라리 어떻게 이본을 죽일지 고민이나 더 할걸.’
조금씩 허물어지는 그의 표정을 잠시 내려다보던 나는, 이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꼴을 보아하니 여기서 벗어나긴 요원해 보이네.”
“…….”
“넌 너 알아서 해. 레일라가 수십이 부활하든, 수백이 부활하든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알 수 없는 불길이 놈의 몸을 태우든, 살라 먹든 더는 알 바 아니었다.
나는 찬바람을 일으키며 마법진의 정중앙에서 몸을 돌렸다.
막 한 발짝 떼려던 그 순간이었다.
“레일라에게 조각을 빼앗기기 직전, 금기된 마법을 행했습니다.”
건조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시간을 건드려서 미래를 엿보려 했지요. 레일라를 막을 방법을 찾기 위해서…….”
“…….”
“하지만 제가 본 것은, 미래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과거이자 미래, 이미 일어난 일이자 앞으로 일어날지도 모를 일이었지요.”
무시한 채 걸음을 옮기려던 발이 우뚝 멈췄다.
어쩐지, 사지가 불길에 결박된 심각한 상황에서도 퍽 덤덤했던 얼굴이 좀 이상했다.
마치 이렇게 될 줄 알았던 사람처럼.
나는 천천히 뷘터를 향해 다시 몸을 돌렸다.
“다…… 알았어요?”
내 물음에 그가 장난스럽게 얼굴을 찌푸렸다.
“실은 여기 오기 직전에, 금기된 마법을 사용한 대가가 과연 무엇일지 참 두려웠습니다.”
“…….”
“다 부질없는 짓이었지요. 과거의 저는 아예 시간을 돌려 버리는 엄청난 짓까지 벌였는데 말입니다.”
허공에 향해 있던 군청색 눈동자가 스르륵 움직여 내게로 향했다.
“영애의 말이 맞습니다. 시간을 건드린 대가로 전 이 마법진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실은 단 한 번도 벗어난 적이 없지요.”
“그럼 그 마법진이…….”
나는 그를 에워싼 마법진의 정체를 알아차리자마자 입을 다물었다.
세상을 점령한 이본에게서 간신히 도망쳐, ‘진실의 거울’ 앞에 선 그는.
생명을 바쳐 시간을 돌렸다.
마법진에 휩싸인 채 산 채로 타들어 가던 그의 환영이 눈앞을 스쳤다.
“당신에게 더는 희생을 강요하고 싶지 않았는데…… 왜 그렇게 사람이 착해 빠진 겁니까.”
“…….”
“당신을 죽게 만든 사람들이 다 뭐라고.”
왜 그가 아이들까지 저버리며 내게 도망가라 했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과거를 모두 알게 된 뷘터는 나를 바라보며 우는 듯이 웃었다.
“……착각하지 마세요.”
그러나 그는 이것까진 모르는 듯했다.
나는 더 이상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 지긋지긋한 것들을 끝내기 위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모든 건 다 저 자신을 위해 움직이는 거니까.”
“……그렇습니까.”
다소 냉정한 말에도 그는 의외로 수긍했다.
과거를 향한 동정과 번민은 잠시였다.
아득했던 그의 눈동자가 찬찬히 현실로 돌아왔다.
“제가 일전에 드린 장미꽃, 아직 가지고 계십니까?”
불쑥 그가 뜬금없는 것을 물었다. 나는 조각과 함께 가지고 있던 그것 또한 꺼내어 보여 주었다.
꽃잎이 모두 진 채 시든 앙상한 줄기는, 꼭 막대기 같았다.
버릴 수도 있었지만, 어쩐지 조각을 숨기듯이 다닥다닥 감싸고 있던 뿌리가 잊히지 않아서 함께 가지고 다니곤 했다.
장미꽃을 본 그의 얼굴이 사뭇 달라졌다.
“그럼…… 이제부터 제 말 잘 들으십시오, 영애.”
검푸른 빛이 넘실거리는 그것이 나를 똑바로 직시했다.
“이곳에 오기 전 상단 꼴을 봐서 아시겠지만, 조각을 빼앗기기 직전에 폭발을 일으켰습니다.”
“…….”
“조각을 없애지는 못했지만…… 미세한 균열이 생겼습니다.”
“…….”
“그녀는 유물을 품에서 놓지 않을 겁니다. 다른 이에게 빼앗기면 부활시킨 레일라들을 통솔할 수 없을 테니까요. 그러니까…….”
그는 차분한 목소리로 내게 이 상황을 끝낼 방법을 일러주었다.
그의 말이 끝난 후, 지진일 듯 시선이 흔들리는 것은 내 차례가 되었다.
“만약…… 제가 실패하면요?”
나는 자신 없는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다.
“제가 조각도 빼앗기고, 이본의 손에 죽임당하면…… 그럼 그다음은 어떻게 되는데요?”
“걱정 마십시오, 영애.”
그는 나를 안심시키듯 다정한 음성으로 말했다.
“다시 시간을 돌리기 위해 제가 여기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나는 그의 사지를 가로지른 불길들을 보며 끔찍한 가정을 했다.
“다시 시간을 돌린 후에 제가, 영원히 돌아오지 않으면요?”
“그럼 영원히 반복하겠지요.”
말문이 막힌 내게, 그가 빙긋 웃으며 덧붙였다.
“당신을 아프게 한 사람들한테 벌은 주는 것이라 생각하십시오.”
그때였다. 지이이이잉- 거울 봉이 진동했다.
그와 동시에 상단에 달린 손거울에서 흰빛이 쏟아졌다.
“거울이 준 시간이 다 됐습니다. 어서 가십시오.”
뷘터는 다급히 말했다. 나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새로 생긴 문으로 다가갔다.
문 안으로 들어가기 직전, 나는 멈칫 뒤를 돌아보았다.
“성공하면, 후작님도 벗어날 수 있는 거예요?”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노력할게요.”
“너무 무리하지는 마십시오.”
상투적인 인사치레가 오갔다.
마침내 나는 문 안에 들어섰다.
미친 것 같은 주문을 외우자, 다시금 눈앞이 하얗게 점멸했다.
그래서 뷘터의 마지막 중얼거림은 미처 듣지 못했다.
홀로 남은 그만의 공간에 보라색 장미꽃잎이 하늘하늘 떨어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