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의 엔딩은 죽음뿐-220화 (220/243)

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220화

눈을 뜨니, 고대 레일라의 무덤은 거짓말처럼 사라져 있었다.

부서진 상단 내부를 확인한 나는 조금 허탈해졌다.

이본이 이토록이나 무시무시한 최종 보스인 것도 모자라, 그녀를 대적할 사람이 정말로 나라는 게 실감이 나서.

“그래도 아끼던 공간인데…….”

이곳을 제 손으로 폭파시켜야 했던 뷘터는 무슨 심정이었을까.

‘아오, 그러니까 내가 가지고 있겠다니까.’

이본에게 무력하게 당한 붓터에게 불쑥 분노가 치솟다가도, 타오르는 불길에 결박당한 꼴이 떠오르자 화가 푸시시 식었다.

내가 조각을 두 개 다 가지고 있더라도 크게 달라질 일은 없었을 것이다.

이본의 말대로 내게 유의미한 인질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자그마한 균열조차 낼 새 없이 둘 다 빼앗겼더라면 정말로 답도 없었으리라.

“후…….”

나는 몰려오는 막막함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붓터가 타오르는 마법진에 묶인 것은 그가 자초한 일이었다.

과거, 이본을 사랑하여 레일라를 돕는 데 일조한 그는, 세계가 멸망 하기 직전 자신의 죄를 뉘우치며 시간을 돌렸다.

그리고 기억을 잃은 채 회귀한 지금.

또다시 금기를 행해 모든 것을 알게 된 그는 제 발로 과거의 시간 속으로 향했다.

내가 이본을 죽이는 데 실패하고, 레일라가 세계를 집어삼키게 되면 다시 시간을 돌리기 위해서.

-영원히 반복하겠지요.

덤덤하게 되뇌던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어차피 내 목숨을 위해서라도, 어떻게든 이본을 저지하고 이 빌어먹을 게임의 엔딩을 볼 생각이었지만.

만일 실패했을 때 일어날 일들을 알게 되니 착잡해졌다.

나는 무거워지는 상념들을 애써 털어 내며 입구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돌아가서 황태자에게 내가 들은 것을 알리고 방안을 찾는 게 시급했기에.

끼이익-.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와 골목을 따라 걸었다.

대로로 나가서 마차를 잡아 타 공작저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거리는 한산하기 그지없었다.

‘마차 잡으려면 꽤 기다려야겠는데…….’

드문드문 돌아다니는 사람 몇 명을 제외하고 텅 비어 있는 거리를 보며 나는 한숨을 삼켰다.

황궁이 반란군과 무시무시한 괴물에게 점령당한 것에 비해 퍽 평화로운 광경이었다.

얼마쯤 골목 어귀에 우두커니 서서 빈 마차를 기다렸을까.

멀리서 마차 한 대가 거리로 천천히 들어섰다.

반색하며 마차를 불러 세우려던 나는 가까워진 마차의 모습을 보고 실망했다.

여러 마리의 말들과 커다랗고 고급진 본체. 삯 마차가 아닌, 귀족들이 타고 다니는 종류였다.

‘하녀가 아침 가져오기 전에는 돌아가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더 빠르게 공작저로 돌아갈 수 있을지 시름에 잠기던 때였다.

그대로 나를 지나칠 줄 알았던 마차가 스르륵 내 앞에 멈춰 서는 게 아닌가.

‘뭐지?’

나는 흠칫 물러서며 들고 있던 거울 봉부터 등 뒤로 숨겼다.

누가 봐도 마법사 같은 꼴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호화스러운 마차 문을 열고 내려선 사람을 본 나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주인님.”

얼마 전 내가 후려친 이마가 아직도 벌겋게 흉진, 이클리스였다.

“너, 네가 여긴 어떻게…….”

반사적으로 묻던 나는 곧 입을 다물었다.

내가 오기 전, 이미 붓터를 족쳤던 이본이었으니 안 봐도 뻔했다.

“타세요.”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던 놈이 천천히 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 말을 듣고 순순히 마차 위에 오를 리 없었다.

나는 다른 마물이 있는지 마차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행히 대로변 한가운데에 기괴한 마물이 나타나는 일은 없었다.

대신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무장한 이들이 하나둘 튀어나와 마차를 감쌌다.

도망을 방지하고자 하는 움직임에 나는 봉을 꽉 움켜쥐었다.

“그때 후련 맞은 걸론 부족했니?”

놈을 노려보며 묻자, 잿빛을 담은 눈매가 일순 움찔거렸다.

“……그럴 리가요.”

“…….”

“아팠어요, 많이. 상처가 곪아서 심하게 앓았어요.”

퍽 애처로운 답이 돌아왔다.

그의 말처럼 이마에 난 상처는 처음 생겼을 때에 비해 조금도 호전된 것 같지 않았다.

‘머리를 그렇게 후려 맞았으면, 정신 좀 차릴 때도 됐지 않나?’

이클리스는 그때와 달라진 게 조금도 없어 보였다.

마음이 심란해졌다. 나는 한숨 쉬듯 읊조렸다.

“그런데 왜 또 미친개처럼 굴어.”

“당신한테 미쳤으니까.”

즉답하는 놈의 모습에 눈앞이 아연해졌다.

내 잘못된 선택으로 인해 비틀려 버린 관계는 조금도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내가 마차에 탈 생각이 조금도 없어 보이자, 이클리스가 말했다.

“주인님의 하녀와 아이들은 제가 데리고 있어요.”

무미건조한 음성이었지만, 협박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기가 막혀서 날카로운 웃음을 터뜨렸다.

“날 배신하고 이본을 섬기겠노라 포고라도 하는 거니?”

“배신이 아니라 보호지요.”

놈이 내 말을 정정했다.

“이본이 제가 아닌 마물이나 군대를 보냈더라면, 이미 죽은 목숨들이었을 텐데요.”

분하지만, 맞는 말이었다. 이본이라면 충분히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클리스를 덥석 믿을 수 없었다.

“널 뭘 믿고.”

“…….”

“레일라가 그간 마법사들만 골라 죽여 온 것을 내가 모를 것 같아? 이미 한번 고국인들까지 팔아먹은 네 말을 어떻게 신뢰하겠어.”

가시 돋친 어투에 이클리스의 표정이 허물어졌다.

“……거래 조건이에요.”

“거래?”

“거울 조각을 가지고 돌아오면, 당신과 주변인들은 건드리지 않기로.”

“…….”

“죽이면…… 슬퍼하실 거잖아요. 주인님은 상냥하시니까…….”

찰나, 울 것처럼 잔뜩 일그러진 얼굴이 보였다.

놀란 것도 잠시, 방금 본 것은 착각이라 말하듯 놈은 곧장 무표정한 얼굴로 지껄였다.

“믿지 않으셔도 상관없어요. 어차피 죽든 말든, 전 당신만 데리고 가면 되니까.”

내게 못 박힌 잿빛 눈동자가 형형히 번뜩였다.

그 진득한 시선에서 무슨 일이 있어도 나를 끌고 가겠다는 집념이 엿보였다.

나는 잠시 마법으로 모두 조지고 도망칠까 고민했다.

하지만 체력 제약이 있는 고대 마법은 무한정 쓸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아직 이본과 본격적으로 부딪히기도 전에 힘을 빼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었다.

“그거 주고 마차에 오르세요.”

봉을 꽉 쥔 채 갈등하는 나를 기민하게 알아차렸는지, 놈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하기야, 납치하는 마당에 무기를 들고 가게 할 리 없지.’

나는 놈을 노려보다가, 이내 별수 없이 거울 봉을 건넸다.

놈은 내게서 받은 그것을 옆에 다가온 복면에게 집어 던지듯 건넸다.

노골적으로 나를 바라보는 눈빛 아래, 나는 내 발로 마차 위에 올라탈 수밖에 없었다.

뒤따라 올라탄 이클리스가 맞은편에 앉자, 곧장 마차가 출발했다.

이제 믿을 것은 폴이 새겨 준 추적 마법뿐이었다.

나는 이클리스가 보지 못하도록 소매를 끌어내려 손등을 덮었다.

‘이런 걸 예상하고 걸어 달라고 한 건 전혀 아니었는데…….’

제발 빨리 돌아와 달라며 애원하던 청년의 안쓰러운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를 닦달하며 나를 찾을 황금 머리도.

‘없어진 걸 알면 분명 난리 치겠지.’

칼리스토는 내 안위에 무척이나 예민했다.

입에서 불을 뿜으며 나를 찾아 날뛸 그를 떠올리니 순식간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때였다.

“……곧 수도에 큰 파란이 불 거예요.”

이클리스가 말을 건넸다.

나는 휙휙 스쳐 지나가는 창밖에 두었던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그는 나를 빤히 바라보며, 입술을 연신 달싹거렸다. 무언가 대화를 하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처럼.

문득 생소한 기분이 들었다.

그 언젠가, 호감도 수치가 놈의 머리 위에 떠 있던 시절.

이렇게 단둘이 마차를 타고 외출할 때면, 과묵한 놈에게서 대답을 끌어 내기 위해 갖은 용을 쓰던 것은 언제나 나였는데.

어쩐지, 지금은 위치가 완전히 뒤바뀐 것 같았다.

“그때까지 안전한 곳에 계세요. 그러면 인질들은 무사할 겁니다.”

더럽게도 말주변 없는 놈이 기어이 할 말을 찾아 내게 건넸다.

“네 곁은 안전해?”

“네.”

정말로 궁금해서 물은 것인데, 달리 받아들인 건지 놈의 낯이 굳었다.

“……제일 먼저 죽을 놈들의 곁보단 안전하겠죠.”

“……뭐? 그게 무슨.”

“말씀드렸잖아요. 당신을 힘들고 슬프게 만든 놈들, 다 죽여 버릴 거라고.”

“너…….”

“본격적으로 전투가 시작되면, 델만군은 가장 먼저 공작저부터 칠 계획이에요.”

다짐처럼 내뱉는 놈의 말에, 일순 사고가 멈췄다.

그와 동시에, 일전에 소각장에서 그가 했던 말들이 또렷이 떠올랐다.

- ……주인님을 이렇게 만든 사람들에게, 복수하는 거요.

정신 나간 사람처럼 줄줄 사람들의 이름을 외우던 이클리스.

“마크 앨버트 같은 병신들은 이미 해치웠어요.”

이어지는 그 말에 나는 경악했다.

세뇌당해서 횡설수설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것들이, 허풍이 아니었다.

“이제, 공작과 그 아들 새끼들 같은 주요 인물들만 남았어요. 그 저택 구석구석, 쥐새끼 하나까지 깨끗하게 비워서 드릴 테니까…….”

“…….”

“이제 그만, 용서해 주시면 안 돼요?”

놈은 엉망진창이 된 얼굴로 내게 일그러진 애정을 갈구했다.

아득한 현기증이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너, 정말…….”

나는 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한참을 버벅였다.

놈은 정말로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듯했다. 내가 그것을 원하고 있다고.

물론 지금껏 나는 엑스트라들이 어떻게 되든, 알 바 아니라 여겼다.

‘가짜 공녀’라 무시하며 조롱하던 것들이 벌을 받길 바라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이 꼭 죽음 같은 과격한 방법으로 연결되진 않았다.

“그 사람들이…… 죽으면 슬퍼할 내 주변인들에 속한다는 생각은 안 해 봤니?”

“그 인간들이 어떻게 주인님의 주변인이에요.”

내 물음에 이클리스가 날카롭게 반응했다.

“벌써 다 잊으셨어요? 그놈들이 주인님께 주었던 수모와 수치들을?”

“그건 네가 상관할 바가 아니지. 복수를 해도 내가 하고, 용서를 해도 내가 해.”

“제가 당신의 하나뿐인 기사인데 어떻게 상관을 안 해요.”

벽을 두고 말하는 게 바로 이런 걸까.

되풀이되는 이클리스와의 대화에 조금씩 지쳐 갔다.

나는 그의 말을 부정하는 대신, 물끄러미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거즈조차 붙이지 않아, 고운 이마를 흉하게 장식한 찢어진 상처.

예전 같았으면 미안하고 안쓰러운 마음에 뭐든 해 주고 싶었을 것이다.

“너는, 왜…… 내가 널 안쓰럽게 여길 틈조차 주질 않아.”

의외의 답변이었는지 이클리스의 눈이 천천히 커졌다.

이런 얼굴을 보아도 이젠 놀라울 만큼 아무런 감정도 들지 않았다.

“나를 위한다고? 나를 명목으로, 널 괴롭힌 공작저 사람들과 네 나라를 멸망시킨 제국을 향한 네 복수를 하는 게 아니라?”

“……주인님.”

“네가 날 사랑한다는 이유로 내가 언제까지 네 폭력을 받아야 해.”

마차 안에 차분한 내 목소리가 고요히 울려 퍼졌다.

“폭력……?”

찬물이라도 뒤집어쓴 것처럼 이클리스의 얼굴이 멍했다.

“그래, 폭력.”

이클리스는 내가 원하지도 않은 복수와 마음과 용서를 끊임없이 강요했다.

이게 폭력이 아니면 대체 무엇일까.

단호한 내 답변에 그가 아득 이를 악물었다.

“그렇게 말씀하셔도…… 소용없어요.”

잠시 혼이 나갔던 눈동자에 이채가 돌았다.

“어차피 무슨 짓을 하든 당신은 날 용서하지 않을 테니까. 그냥 제 마음대로 할래요.”

너는 언제나 네 멋대로 행동했다고 받아칠 새도 없었다.

“내려요.”

마차가 멈췄다. 아차 할 틈도 없이 놈이 벌떡 일어나 문을 열고 내려섰다.

무언의 압박에 떠밀리듯 내려선 나는, 펼쳐진 광경에 놀랐다.

이클리스가 나를 납치해 데리고 온 곳은, 다름 아닌 황궁이었다.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