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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엔딩은 죽음뿐-221화 (221/243)

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221화

마차는 처음 보는 아름다운 궁 앞에 멈춰 섰다.

사냥 대회 이후로 올 일이 없어서 황궁 지리는 거의 알지 못했다.

기껏해야 황태자 궁과 서고를 오가는 길을 아는 정도.

게다가 황궁 부지는 공작저의 몇 배에 달했다.

‘어차피 쉽게 도망칠 수도 없건만…….’

이클리스 놈은 제 수하들을 동원하여 나를 샅샅이 둘러싼 채 궁 안으로 움직였다.

반란군이 황궁을 점령했다는 것이 거짓은 아닌지 낯선 궁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어디 지하 같은 데로 끌고 가서 가둬 둘 줄 알았는데, 긴 복도를 걸어 도달한 곳은 넓고 화려한 방이었다.

“주머니에 있는 것들도 모두 꺼내서 주세요.”

방 한가운데에 있는 테이블에 도달한 그가 내게 몸을 돌리며 말했다.

고풍스러운 궁 안에 우뚝 서 있는 놈의 모습이 퍽 이질적이게 느껴졌다.

나는 생소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다 이내 주머니에 손을 넣어 조각을 꺼냈다. 그리고 그것을 테이블 위에 올려놨다.

‘생각보다 이르게 진행됐네.’

게다가 인질을 가지고 협박하는 이본에게 억지로 빼앗기는 험한 꼴을 겪지 않아도 되었으니, 이걸 기뻐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순순히 조각을 내놓았음에도, 놈은 나를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뭐.”

나는 삐딱하게 대꾸했다. 놈이 입을 열었다.

“제가 직접 주머니를 뒤지길 원하세요?”

“조각 줬으면 됐잖아.”

기어이 주머니를 모두 털어 내라는 놈에게 나는 반쯤 오기를 부렸다.

그러자 놈이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당신 몸에 손대기 시작하면 주머니만 뒤질 자신 없어요.”

“미친 새끼.”

나는 욕설을 내뱉으며, 거칠게 주머니에 손을 쑤셔 넣었다.

딸려 나온 것들은, 4개 남은 물약과 앙상하게 시든 장미꽃 하나가 전부였다.

쾅! 그것들을 테이블 위에 던지듯 내려놓았다.

“이게 끝이야.”

또 직접 뒤지느니 개소리를 할까 싶어, 나는 아예 로브의 주머니까지 뒤집어서 내보였다.

“이건…….”

그것들을 가져가서 찬찬히 살펴보던 놈의 시선이 문득 시든 장미꽃에서 멈췄다.

무엇인지 묻는 듯한 눈초리에 나는 덜컹이는 가슴을 내색 않고 말했다.

“이본의 손에 죽은 마법사가 남긴 유품이야.”

“유품…… 이요?”

“그래. 네가 인질로 잡고 있는 고아들의 보호자였어. 봉사 활동을 알선하는 선량한 이였지.”

“…….”

“네게 끌려 온 덕분에 슬픔을 느낄 새조차 없게 되었구나.”

마법진에 묶여 있을 뿐, 아직 멀쩡히 살아 있는 사람을 한순간에 죽은 사람으로 만들어 버렸다.

‘미안하다.’

미약한 죄책감에 뷘터에게 속으로 사과한 나는, 애써 무덤덤한 척 말을 이었다.

“앞으로 네가 공작저를 도륙 낼 동안 나는 몇 번 더 여기 갇힌 채 오늘 같은 참담함을 느끼겠지.”

“…….”

“이제 만족하니?”

이게 과연 먹힐까.

나는 이클리스를 흘끔거리며 숨을 죽였다.

- 이 장미꽃은 제 무의식의 반영으로 피었기 때문에, 제 마력의 결 정체나 다름없습니다.

- 위급 시에 당신에게 도움이 되길 바라며 주었던 것인데…….

몸이 완전해진 레일라를 해치우기 위해선, 조각을 돌려주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조각을 이본에게 돌려준다는 것은, 결국 내가 위험에 처하게 될지도 모른단 소리였다.

- 위급 시에 딱 한 번, 방어 마법이 발동될 겁니다. 그런데 시동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결과적으로 그가 옳았다. 나는 정말로 이클리스에게 거울 봉을 빼앗겼으니까.

칼이 없어졌으니, 탈출을 위해선 방패라도 사수해야 했다.

이클리스는 우두커니 선 채 무언가를 가늠하듯 하염없이 시든 장미꽃을 응시했다.

마차에서, 내 주변인을 건들지 않을 거라는 말이 떠올라 충동적으로 던진 말이었다.

솔직히 큰 기대는 없었다.

단단히 세뇌당해서 돌아 버린 놈이, 그만큼 감성적일 리 없으…….

“쉬세요. 얼굴이 창백해요.”

그러나 내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이클리스는 조각을 제외한 나머지는 아무것도 건드리지 않은 채 등을 돌렸다.

장미꽃은 물론이고, 마법 물약조차.

문을 향해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보자, 기분이 이상해졌다.

마치 세뇌당하기 전, 수줍게 볼을 붉힐 줄도 아는 그를 보고 놀랐을 때처럼.

“……이클리스.”

나도 모르게 입을 벌려 그를 불렀다. 부르고 나서 곧바로 후회했다.

그가 내심 못 들었으면 했지만, 문고리로 향하던 움직임이 우뚝 멈췄다.

나는 망설이다 힘겹게 입을 열었다.

“너…… 이본한테 세뇌당하고 있어.”

“…….”

“내가 도와줄 수 있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그러니까, 그만둬.”

지금이라도 이클리스가 제정신을 차린다면, 일이 훨씬 수월해진다.

인질들도 구하고, 반란군과의 전투 때문에 죽거나 다치는 이도 없다.

힘을 합쳐 최종 보스인 이본을 제거하면, 뷘터가 또다시 시간을 돌려서 이 미친 게임이 반복되는 일 또한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이 얼마나 깔끔하고 아름다운 엔딩이란 말인가.

“……그만두면.”

그러나 그건 나 혼자만의 생각인 듯했다.

다시 내게로 몸을 돌린 이클리스의 얼굴은 석상처럼 굳어져 있었다.

“이제 와서 그만두면 뭐가 남는데요.”

따져 묻는 듯 놈의 말투에 잔뜩 날이 서 있었다.

“적어도, 내가 널 증오하다 못해 죽이려 들진 않겠지.”

“이건 죽이려 한 게 아니에요?”

내 대답에 놈이 손가락으로 제 이마를 툭툭 건드렸다.

“그때 마법 썼으면 너, 지금 이 자리에 없었어.”

그렇게 말하다 보니까, 불쑥 억울함이 치솟았다.

‘저게 살려 준 은혜도 모르고.’

맹그로브 줄기에 묶여 있는 동안 충분히 죽일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가 이본에게 휘둘리게 된 것에 대한 일말의 책임과 동정 때문이었다.

그것은 그를 설득하는 지금에도 이어졌다.

“이젠 너도 알잖아. 설령 네가 반란에 성공해서 황태자를 죽이고 제국을 손에 넣더라도, 내가 널 사랑할 일은 없다는 걸.”

“그러니까, 왜!”

그때였다. 물끄러미 날 바라보기만 하던 놈이 별안간 큰 소리로 외쳤다.

“왜 전 안 되는데요.”

“그건.”

“곁에 있으려고, 한 주먹거리도 안 되는 놈들이 시비 거는 것도 다 참고 악착같이 기사단에 붙어 있었잖아요.”

“……이클리스.”

“당신에게 걸맞은 기사가 되려고, 밤낮없이 검을 휘두르고 또 휘둘렀어요. 손에 피가 나지 않는 날이 없었어.”

“…….”

“그렇게 해도 당신이 너무 멀어서, 좀처럼 닿을 수가 없어서! 그래서 매국노까지 돼 가면서 노예 신분에서 벗어났잖아!”

나는 격정을 쏟아내는 이클리스를 놀란 눈으로 바라보기만 했다.

그간 그의 새로운 일면을 모두 보았다고 생각했지만, 착각이었다.

“그런데 왜 넌 날 밀어내기만 하는 데, 왜-!”

회갈빛 눈동자에서 굵직한 물방울 들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그는 손에 사탕을 쥐고도 어찌할 줄 모르는 어린아이처럼 울었다.

나는 망연히 그를 응시했다.

그가 말하는 그 시절엔, 그의 감정이 얼마나 깊은지 돌아볼 여유도 없었다.

하루하루 살아남기 급급했고, 그의 배신으로 치를 떨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끝난 지금은.

“내가…… 네가 아닌, 다른 사람을 사랑하니까.”

이유를 말하자면, 하나뿐이었다.

내 대답에, 이클리스는 헐떡이며 소리쳤다.

“예전처럼 거짓말이라도 해 봐요. 너밖에 없다고, 황태자 따위 죽든 말든 네가 가장 소중하다고!”

“…….”

“혹시 알아? 그 말에 깜빡 속아서 이 짓거리 다 때려치우고 기꺼이 당신 손에 죽을지도 모르잖아.”

“널 죽이고 싶지 않아.”

진심이었다. 나는 그만 이 지긋지긋한 모든 것을 끝내고, 앞으로 나아가고 싶었다.

그리고 이클리스 또한 그랬으면 했다. 분노와 좌절, 실연의 상처에 얽매여만 있기에, 그는 너무 젊고 어린 나이였다.

“그러니까…… 그만 날 용서해.”

예전처럼 눈물을 닦아 줄 수는 없었다. 나는 그래서, 그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타악-!

싸한 통증이 느껴졌다. 차갑게 내쳐진 손이 보였다.

“당신이 그러니까 내가 이 지경에 이른 거예요.”

“…….”

“나완 달리, 황태자에겐 조금도 꾸며 내질 않으니까…….”

더듬더듬 시선을 들자, 그는 증오스럽다는 듯 나를 보며 한 자, 한 자 짓씹듯 뇌까렸다.

“사랑 따윈 필요 없어. 껍데기라도 내가 가질 거야.”

“…….”

“어차피 네가 날 이용한다는 걸 안 순간부터, 네게 사랑받는 것 따윈 기대도 안 했으니까.”

그 말을 끝으로 놈은 벌컥 문을 열고 방 안을 빠져나갔다.

쾅-! 거칠게 문 닫히는 굉음을 끝으로, 나는 황량한 방에 홀로 남겨졌다.

* * *

나는 그대로 이름 모를 궁전 안에 감금됐다.

탈출로도 탐색할 겸 창문 밖을 바라보니,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된 갑옷 입은 군인들이 궁 밖을 감싸고 있었다.

‘망할 새끼. 아주 빽빽하게도 깔아 놨네.’

밥 때가 되니 이클리스도, 황궁 시녀도 아닌, 군인이 점심과 저녁을 가지고 왔다.

입맛이 없어서 먹는 둥 마는 둥 한 채, 나는 침대에 드러누웠다.

당장 기절해도 놀라지 않을 만큼 몸이 고단했다.

그러나 마법 물약의 효과가 좋은 건지, 아니면 막막한 상황 때문인지 도통 잠이 오지 않았다.

나는 연신 몸을 뒤척이다가, 한 손을 들어 바라보았다.

아침에 폴이 걸어 준 추적 마법은 다행히 그대로 있었다.

‘많이 걱정하고 있겠지.’

말도 없이 사라졌으니, 얼마나 화가 났을까. 뒤늦게 칼리스토에 대한 미안함이 몰려왔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렇게 된 이상 여기서 이본과 끝장을 봐야 했다.

‘부디 구하러 올 생각 말고 황궁 탈환에만 신경 썼으면 좋겠는데…….’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눈꺼풀이 천천히 무거워졌다.

낯선 곳에서 자기 싫었지만, 밀려오는 피로를 물리칠 수 없었다.

잠깐 눈만 붙일 요량으로 눈을 감았다.

쿠웅, 쿵-!

불현듯 묵직한 소음에 나는 화들짝 놀라 눈을 떴다.

시야가 어두컴컴했다. 잠깐 눈을 감았다고 생각했는데, 시간 가는지도 모르고 깜빡 잠이 든 것이었다.

나는 놀란 가슴을 추스르며 주섬주섬 일어나 앉았다.

방금 들은 소리는 모두 꿈인 것처럼 방 안은 적막했다.

‘……뭐지? 잘못 들었나?’

그때였다. 쿵, 쾅, 쿠웅-!

착각이 아니라는 듯 또다시 둔중한 소음이 울려 퍼졌다.

나는 눈을 부릅뜬 채 어두운 방 안을 샅샅이 훑어보았다.

쿵, 쿠웅-!

소리가 한층 더 크고 가까워졌다. 덕분에 쉽게 근원지를 찾아낼 수 있었다.

중앙에 있는 벽난로에서 나는 소리였다.

“무, 무슨…….”

이본이 마물이라도 보낸 것일까.

나는 살며시 일어나 무기가 될 만한 것을 찾았다.

침대 옆 탁상 위에 놓여 있던 촛대가 손에 닿았다.

그것을 꽉 쥐고, 긴장한 눈으로 벽난로를 응시할 무렵이었다.

쾅, 콰앙-!

불현듯 벽난로 속에서 재 가루와 함께 누군가 구르듯이 쏟아져 나왔다.

“으윽, 제기랄.”

검은 인영이 재 가루 섞인 기침과 함께 걸쭉한 욕설을 토해 냈다.

퍽 익숙한 음성이었다.

촛대를 휘두르기 위해 위로 힘껏 쳐들었던 손이 스르륵 내려갔다.

“전하……?”

얼떨떨한 내 목소리에 기침하던 칼리스토가 고개를 쳐들었다.

“잘 있었나, 공녀?”

“전하가 왜…….”

거기서 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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