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222화
고작 한나절 못 본 것뿐인데.
재투성이가 된 그 얼굴을 보니 오랜만에 다시 만난 사람처럼 울컥, 반가움이 치솟았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예요? 전투는요?”
“시간 없어. 일단 가면서 얘기하지.”
그가 재촉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인 후 벗어 놓았던 로브를 허겁지겁 주워 입었다.
‘이렇게 오자마자 나갈 줄은 몰랐는데…….’
탈출은 그의 군대와 반란군의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된 후에야 이뤄질 줄 알았다.
혼란한 틈을 타 거울 봉을 찾고 이본을 치러 갈 생각이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답 없는 계획이었다.
“이리로 들어가, 공녀.”
물약과 장미꽃까지 단단히 챙기고 다시 황태자에게로 돌아갔다.
그러자 그가 자신이 빠져나왔던 벽난로를 가리켰다.
“바짝 엎드려야 할 거야.”
“여, 여기로요……?”
나는 좀 떨떠름한 얼굴로 비좁은 통로를 바라보았다.
당장 쥐떼가 우르르 쏟아져도 이상할 게 없을 만큼 어둡고 음산했다.
물론 칼리스토가 그곳에서 기어 나왔으니, 탈출로가 거기뿐이라는 걸 알았지만 말 그대로 머리만 알았다.
“왜, 가기 싫나? 내가 기어 오면서 다 쓸어서 깨끗해. 간간이 쥐새끼랑 지네들도 죽였으니까 걱정 말라고.”
“아니 뭐…… 그런 건 아니고요.”
선뜻 갈 엄두를 못 내는 나를 보고, 칼리스토가 콧잔등을 찌푸리며 짓궂게 말했다.
가기 싫어서 까탈을 부린 건 아니었지만, 놀랍게도 그 말에 안심이 되었다.
‘지네라니, 지네라니!’
나는 진저리쳐지는 몸을 간신히 억누르며 몸을 엎드려 그 안으로 기어 들어갔다.
얼마 안 가, 완전한 어둠이 ‘훅’ 하고 찾아왔다. 칼리스토가 통로의 문을 닫은 탓이었다.
다행히 숨 막히는 포복 자세는 오래가지 않았다.
얼마 후 기어가야만 했던 통로가 점점 넓어지더니 어느 순간 널따란 공간이 나왔다.
“이쪽으로 와, 공녀.”
황태자는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들며 숨 돌릴 틈도 없이 나를 이끌었다.
그가 꺼낸 것으로 인해 어두컴컴했던 주변이 밝아졌다.
야광석이었다. 나는 그제야 주변을 둘러보고 꽤 놀랐다.
수십 개의 갈림길이 복잡하게 뒤얽혀 있는, 미로 같은 곳이었다.
칼리스토는 거침없이 그중 한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뒤를 따르며 나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
“전하, 여기 어디예요?”
“황족들만 아는 비밀 통로야.”
“아.”
어쩐지 비장했던 아침나절의 납치와는 달리, 허무한 탈출이었다.
“멍청한 놈들. 황궁 안에 비밀 통로가 있는 것은 당연한 거 아닌가? 뭐, 덕분에 나야 수월하게 그대를 찾을 수 있었지만 말이야.”
그런 내 심정을 아는지, 황태자가 적나라하게 납치범을 욕했다.
한때 그가 말한 ‘멍청한 놈’의 주인이었던 나는, 괜히 머쓱해져서 화제를 돌렸다.
“황족들만 아는 거면…… 2황자도 알겠네요?”
“걱정 마. 그 새끼는 여기 모를걸.”
그는 모퉁이를 돌며 심드렁하게 답했다.
“여긴 황후궁이거든. 후처의 자식은 발 한 번도 못 들이민 곳이니 알 리 없지.”
“화…… 황후궁이요?”
내가 갇혀 있던 곳의 정체를 알게 된 나는 입을 떡 벌렸다.
어쩐지 감금해 두는 곳치곤 과하게 호화스럽다 했다.
‘미친놈!’
이클리스 놈이 아무런 의미 없이 황후궁에 나를 가뒀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황태자의 눈치를 보았다.
“비밀 통로 중에서도 갈림길이 가장 많은 곳이야. 어마마마가 돌아가신 후로는 나도 처음 온 거라 한참 헤맸어.”
다행히 황태자는 내가 왜 황후궁에 갇혔는지 크게 생각하지 않는 눈치였다.
“그대야말로 어떻게 된 일이야? 사라졌다는 보고를 받고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그는 오히려 정황을 묻는 내 말에 떠올랐다는 듯 눈을 부라렸다.
“회의장에 있다가 공작저까지 미친 놈처럼 뛰어갔어. 얌전히 있으랬더니, 더럽게도 말 안 듣는 망아지 같으니라고.”
“……죄송해요.”
저지른 잘못이 있기에 나는 순순히 잘못을 시인했다.
“빈수에게 갔다가…….”
반사적으로 빈수라 부르려던 나는, 이내 칼리스토 또한 모든 것을 알고 있음을 상기하고 정정했다.
“아니, 베르단디 후작님을 찾아갔다가 그때 늪지대에서 본 델만 왕자에게 납치됐어요.”
“황태자를 능멸하는 것도 유분수지, 아주 잘도 속여 먹었더군.”
“…….”
상황을 축약해 설명하던 나는 그의 말에 뜨끔해서 입을 다물었다.
그는 이어서 혼잣말처럼 말했다.
“그런데 그 빌어먹을 델만 놈은 왜 자꾸 성가시게 구는 거지?”
이번엔 이클리스에 대한 이야기였다. 아직까지 칼리스토는 나와 이클리스 사이에 엮인 지저분한 치정까진 알지 못했다.
“그때 늪지대에서 죽여 버렸어야 했는데…….”
그의 음산한 중얼거림에 괜히 바람 피우다 걸린 사람처럼 가슴이 벌렁거렸다.
“아, 아무튼 와 주셔서 감사해요, 전하.”
나는 이번에도 서둘러 화제 전환하는 것을 택했다.
칼리스토가 그런 나를 흘겨보며 불퉁하게 읊조렸다.
“추적 마법 없었으면, 그 마법사 항문 파열로 죽었어. 다행인 줄 알아.”
“으…… 왜 하필 항문 파열이에요?”
“쓸모없는 지팡이 그런 데라도 써야지. 뭐 그런 게 있어. 깊이 알려 들지 마, 다쳐.”
굳이 그런 말 안 해도 깊이 알고 싶은 생각 따위 조금도 없었다.
칼리스토는 대답 없는 나를 곁눈질하다, 우뚝 걸음을 멈추고 물었다.
“그런데 그대, 마법 봉은 어디 있어?”
“……뺏겼어요.”
나는 민망해서 작은 소리로 답했다.
“이런.”
그가 눈살을 찌푸리며 침음을 내뱉었다.
“이리로 와.”
그러더니 갑자기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어리둥절했지만, 길을 잘못 들었나 싶어 나는 바로 그를 뒤따랐다.
“인질들은요?”
“태양궁에 있는 것 같아. 오기 전에 감옥을 대충 돌아보고 왔는데, 없었다.”
“그럼 어서 가요.”
물론 태양궁으로 가자는 뜻이었다.
“……공녀.”
그가 무거운 음성으로 나를 부르며 다시금 걸음을 멈췄다.
“12시가 되는 정각에, 가장 방어 결계가 약한 서문을 뚫고 급습할 예정이야.”
갑작스러운 작전 얘기에 나는 의아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 전에 여길 빠져나가야 해.”
“서둘러야겠네요.”
그의 말에 나는 마음이 다급해졌다.
‘그 아수라장 속에서 이본을 상대할 수 있을까.’
솔직히 자신 없었다.
하지만 맨몸으로 돌진하려 했던 무계획보단 나았다.
적어도 칼질에 능한 칼리스토가 함께할 테니까.
“어서 가요. 아이들 먼저…….”
“아직 말 다 안 끝났어.”
그 순간, 황급히 걸음을 옮기려던 나를 황태자가 다시 멈춰 세웠다.
“그댈 밖까지 데려다준 후 다시 돌아와서 최대한 인질들을 구출하려 노력할 거야.”
“네? 그게 무슨…….”
“하지만 레일라나 엘렌 후작 같은 2황자파의 중축들이 있을 테니까 장담할 수는 없어.”
나는 잠시 이해가 안 가서 멍한 얼굴로 그의 말을 되뇌었다.
그러니까, 그는 지금 모든 상황에서 나를 제외하고 있었다.
“……전하,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저 조각도 빼앗겼어요.”
자진해서 준 거나 다름없었지만, 지금 와서 그 이야기를 한다 한들 칼리스토가 귀담아 들을 것 같지 않았다.
“지금 태양궁으로 가야 해요.”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안 돼.”
“왜요?”
“마법도 쓸 수 없는데 뭘 할 수 있다고.”
나는 그제야 눈치챌 수 있었다.
거울 봉을 빼앗겼다는 내 말을 듣고 곧장 발걸음을 돌린 황태자.
나와 함께 빠르게 인질을 구출하려던 그의 계획이 방금 수정되었다는 것을.
‘거울 봉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못 한다는 거야 뭐야.’
그의 말을 곱씹을수록 화가 치밀었다.
“제 쓸모가 언제부터 거울 봉의 유무로 결정됐는지 모르겠는데요.”
“비약하지 말고 내 말 들어, 공녀.”
싸늘하게 쏘아붙이는 내 어투에 황태자가 한숨을 내쉬며 내 어깨를 붙들었다.
“황제는 생사도 모르는 상태고, 2황자파 놈들이 그간 숨겨 둔 병력이 예상을 훨씬 웃돌아.”
“…….”
“병사들을 급히 끌어모았지만, 솔직히 승산이 크지 않다. 반란군 사이엔 마물도 섞여 있을 테니까. 어쩌면.”
“…….”
“어쩌면 황궁과 수도를 포기하고 달아나야 할지도 몰라.”
나는 그의 입에서 쏟아져 나온 말에 충격을 받았다.
“포기…… 요?”
그가 그런 말을 입에 담았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그래.”
하지만 황태자는 그런 내게 한 번 더 못을 박았다.
“아무것도 아니야. 내겐 황궁이나 이름 모를 애새끼들보단 그대의 안위가 더 중요하니까.”
“……전하.”
나는 숨이 막힌 사람처럼 힘겹게 그를 불렀다.
아무것도 아닐 리 없었다.
칼리스토가 얼마나 황제가 되고 싶어 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수도로, 황궁으로 돌아오기 위해 전쟁터를 구르며 악착같이 살아남은 그였다.
그런데 이젠 나를 위해 포기라는 단어를 쉽사리 입에 담았다.
정작 나는 엔딩도, 인질도, 그 어느 것도 포기하지 못한 채 속으로만 그의 안전을 빌 뿐이었는데…….
알 수 없는 감정에 속이 울렁거렸다. 나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황궁으로 가 이본을 만나기만 하면 금방 해결될 거라 여겼는데, 상황은 생각보다 훨씬 더 복잡하게 돌아갔다.
“본격적으로 전투가 시작되면 발이 빠른 자들을 보내서 그대의 마법 봉을 찾지. 레일라를 죽이는 거고 뭐고, 그때 가서 해.”
칼리스토가 그런 나를 달래듯이 말했다.
하지만 그때 가면 모든 게 늦을 것이다.
이본이 아이들을 제물 삼아 레일라를 모두 부활시킬 테니까.
‘그의 말처럼 정말 이 상황을 회피하고 보는 것만이 답인 걸까.’
나는 한참을 망설이다, 이내 마음을 굳게 먹고 입을 열었다.
“……마법, 아예 못 쓰는 상태는 아니에요.”
“뭐?”
“방어 마법은 쓸 수 있어요.”
비록 일회성이긴 하지만. 알면 난리 칠 칼리스토가 무서워 그 말은 굳이 하지 않기로 했다.
“전하의 말처럼 당장 이본을 죽이지 못하더라도…… 아이들은, 아이들은 구할 수 있잖아요.”
“…….”
“어려도 마법사들이라, 풀어 주기만 하면 제 몸 하나는 마법으로 텔레포트 할 수 있을 거예요.”
라온이 이동 마법을 능숙히 쓰는 것을 이미 본 상태였다.
풀어 줄 수만 있다면, 어쩌면 생각보다 수월하게 구해 낼 수 있지 않을까.
나는 희박한 가능성에 기대를 걸고 칼리스토를 설득했다.
“우리 둘이 시간을 벌고 있으면, 전하의 군대가 승리해서 태양궁까지 쳐들어올지도 모르잖아요.”
“공녀.”
“시도라도…… 아니, 상황이라도 보고 가게 해 주세요.”
붓터는 이본을 죽일 방법을 일러주면서, 끝끝내 내게 아이들을 잘 부탁한다는 말 같은 건 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무런 시도조차 안 하고 포기하는 건 너무 비겁하지 않은가.
“제 눈으로 보고 정말 안 되겠다 싶으면, 그때 가선 전하께서 하라는 대로 따를게요.”
굳세게 말하는 나를, 칼리스토는 착잡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나는 그가 결국 내 말대로 해 주리라는 것을 알았다.
얼마 안 가 나지막한 한숨 소리가 들렸다.
“그대에겐 너무 물러서 탈이라니까.”
“…….”
“겉으로만 보고 구할 상황 안 되면, 짐짝처럼 둘러메서라도 끌고 갈 거야. 이리 와.”
그가 나를 이끌고 다시 방향을 틀었다.
우리는 침묵 속에서 빠르게 비밀 통로를 가로 질렀다.
아이들, 그리고 이본이 있는 태양궁을 향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