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223화
* * *
“여신이시여!”
널따란 대전.
가장 높고 빛나는 자리에 앉은 이본은 무료한 눈으로 제 앞에 머리를 조아리는 인간들을 바라보았다.
제국인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을 지키듯 대전 안을 둘러싼 것은 다름 아닌, 제국이 일으킨 정복 전쟁에서 패배한 나라 사람들이었다.
세계 곳곳의 인간들이 이렇게 한자리에 모일 수 있다니,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그때, 늙은 귀족 하나가 고급스러운 천에 감싼 무언가를 그녀의 앞에 바쳤다.
천을 풀자 눈을 부릅뜬 채 절명한 시체의 머리, 그리고 황제가 늘 들고 다니는 보주가 드러났다.
“황제의 목입니다, 여신이시여.”
엘렌 후작이 읍소했다.
이본은 그 야비한 얼굴 너머 엎드린 인간들을 쭉 둘러보았다.
2황자란 놈부터 시작해서, 황비와 제국을 좌지우지한다는 고위 귀족들까지.
‘레일라의 힘’을 갖게 해 준다는 우습지도 않은 말에 속아 넘어간 인간들은 시키지도 않은 황제의 목까지 썰어다 바쳤다.
‘참 쉽구나.’
달칵-.
이본은 제 무릎 위에 놓여 있던 상자를 살짝 열어 안을 보았다.
14개의 조각이 보였다.
그러나 이제 마지막 조각마저 제 손 안에 들어올 예정이었다.
그녀의 행동을 본 엘렌 후작이 탐욕스럽게 눈을 빛냈다.
“여신님, 그럼 의식을 지금 시작하는 것인지요……?”
“아직 때가 안 되었어요.”
이본은 싱긋 웃으며 답했다.
“아, 때. 그렇군요.”
늙은이는 실망과 흥분이 뒤섞인 표정으로 물러났다.
과거, 그녀는 이 자리에 오르기까지 무수히 많은 노력을 했다.
‘그땐 왜 이런 멍청한 놈들을 이용할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고대 마법사들에게 봉인당하기 직전, 미래를 예지한 형제들이 미리 황궁 깊숙이 숨겨 둔 여러 개의 진실의 거울 조각.
이것이 모두 있어야지만 레일라들의 봉인을 풀 수 있었다.
하지만 빼앗은 타인의 몸은 완전하지 못했다. ‘진짜 이본’의 영혼이 아직 살아 있었기 때문이다.
불완전한 몸으로는 힘을 사용하는 데 제약이 있었다.
하여 그녀는 흩어진 조각들을 찾고, 몸을 완전히 빼앗기 위해 직접 황궁에 입성했다.
의심 많은 마법사를 속이고, 공작저를 점령하고, 방해물이었던 계집을 죽이고, 황태자비가 되어 황궁에 입성하기까지.
지난한 날들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황금룡의 송곳니로 몸을 완전하게 빼앗는 데 성공했다.
그녀는 곧장 조각들을 하나로 완성시켜 봉인을 풀었다.
탁-.
이본은 상자를 닫고 고개를 들었다. 그와 동시에 말간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히익!”
왜소한 어깨가 펄떡이더니, 이내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다.
세뇌 때문에 친구들을 사지로 몬 사자 가면이었다.
널브러져 있는 친구들과는 달리 혼자만 결박되어 있지 않은 아이는 구석에 선 채 하염없이 울었다.
그 우는 소리가 썩 듣기 좋았다.
‘그러고 보니, 과거에는 저 자리에 뷘터 베르단디가 있었지…….’
제 손으로 동료 마법사들과 아끼던 아이들을 레일라의 제물로 바친 그는 결국 미쳐 버렸다.
감쪽같이 사라진 그로 인해 이번엔 그 재밌는 꼴을 볼 수 없었다.
아쉬움에 이본은 입맛을 다셨다.
“이본.”
그때였다. 광활한 대전을 가르고 누군가 빠르게 걸어왔다.
“어서 와. 기다렸어.”
이본이 다가온 그를 반갑게 맞이했다.
과거, 제국 멸망의 순간 그녀의 옆에 있던 황태자 대신 이번에 택한 사내였다.
이클리스는 묵묵히 그녀에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잠시 커졌던 이본의 푸른 눈이 이내 반달로 활짝 휘어졌다.
“역시, 네가 해낼 줄 알았어.”
이로써 15개의 조각이 모두 모였다.
이본은 방긋 웃으며 이클리스에게서 건네받은 마지막 조각을 상자 안에 넣었다.
그러다 문득 무언가가 눈에 띄었다.
“그건…….”
“눈독 들이지 마.”
이클리스는 흠칫 들고 있던 것을 제 뒤로 숨겼다.
페넬로페의 마법 봉이었다.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가, 모든 일이 끝나고 나면 돌려줄 예정이었다.
“조각이 있는데 내가 왜 페넬로페의 것에 눈독을 들이겠어?”
이클리스의 그런 행동에 이본이 샐쭉 미소 지었다.
그러나 경계 어린 시선은 풀리지 않았다.
“약속 지켜, 이본.”
“난 페넬로페와는 달리 네게 약속한 건 모두 지켰어, 이클리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금룡이 화려하게 휘감고 있는 고귀한 황금 의자가 드러났다.
“앉아. 이제 여긴 네 자리야.”
“그거 말고.”
“그럼?”
“인질들.”
이클리스가 몸을 돌리며 대전 한쪽에 결박된 채 무릎 꿇려져 있는 아이들 쪽을 턱짓했다.
“건드리지 않겠다는 뜻이 뭔지 알고 있겠지? 살아 있는 건 물론, 단 한 명도 털끝 하나 상해선 안 돼.”
“페넬로페에게 미움받을까 봐 애를 쓰는구나?”
“대답해. 지금이라도 다 엎고 황태자에게 투항할 수도 있어.”
“물론이야.”
이클리스의 싸늘한 경고에 이본은 활짝 웃으며 확답했다.
과거라면, 마법사들이 꼭 필요했을 것이다.
그들이 가진 마력이 가득한 생명력은 레일라들에겐 풍족한 먹잇감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정말로 필요 없는걸.”
이본은 아득한 허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마법사들을 제물로 바쳐 부활시킨 레일라들은 오만하고 자기중심적이었다.
대적할 고대 마법사들마저 사라진 세상에서, 레일라들은 닥치는 대로 인간들을 죽이며 원래의 힘을 되찾았다.
그러고 나자 그들은 점점 이본의 자리를 위협하기 시작했다.
그들을 통제할 수 있는 하나뿐인 수단인 진실의 거울 조각을 빼앗아 우두머리가 되려는 이들이 속출했다.
처음 회귀했음을 알았을 때, 그녀는 절망했다.
‘그토록 힘겹게 도달했는데, 드디어 세상을 지배할 수 있었는데, 왜! 왜 코앞에서……!’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마냥 절망할 만한 일이 아니었다.
황금룡의 송곳니를 가진 자는 일생에서 단 한 번만 그것을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런데 과거에 완전해진 몸과 힘은 회귀한 후에도 그대로였다.
그렇다면 완전해진 몸으로 송곳니를 또 한 번 사용할 수 있다는 소리가 아닌가.
‘이건 기회야.’
왜 인생은 신뢰와 배신의 무한한 반복인 것일까.
가족과 형제를 죽인 것에 대한 복수심, 그런 건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희미해졌다.
일련의 일을 겪은 그녀는 마침내 깨달았다.
자신이 원하는 세상은 레일라들이 지배하는 세상이 아니라-.
“그래, 다 필요 없어.”
그녀가 지배하는 세상이라는 것을.
이본이 허공을 노려보며 다짐처럼 되뇌었다.
“왕자님!”
그때, 누군가 거칠게 알현실의 문을 열고 뛰어 들어왔다.
“큰일 났습니다! 제국군들이 황궁의 서쪽 문을 뚫고 들어오는 중입니다! 태양궁으로 곧장 진군하려는 듯합니다!”
병사의 말에 이클리스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그의 입에서 다급히 튀어나온 것은 방어에 관련한 물음이 아니었다.
“공녀님은?”
“예?”
“황후궁에 둔 에카르트 공녀님은 어찌 되었느냐고!”
“그, 그게, 아직 황후궁을 확인하지 못했…….”
“제기랄!”
이클리스는 병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거칠게 몸을 돌려 달렸다.
그러다 퍼뜩 인질들 앞에서 급정거했다.
그가 들고 있던 마법 봉을 델만 군 한 명에게 떠넘기며 짓씹듯이 말했다.
“너, 목숨 걸고 인질과 이 봉을 지켜. 누구한테도 빼앗기면 안 된다. 설령 에카르트 공녀일지라도. 알았어?”
“예, 예! 알겠습니다!”
기절한 척 대화를 엿듣고 있던 에밀리의 눈이 반짝 떠졌다.
이본을 영 믿을 수 없던 이클리스는 제 수하 4명을 인질들 주변에 세워 놓았다.
그리고 태양궁 안에 있는 나머지 군사들을 끌고 궁을 빠르게 빠져나갔다.
한바탕 소란이 휩쓸고 지나간 후, 무장한 군사들로 꽉 차 있던 대전 안이 텅 비었다.
돌아가는 상황에 눈알을 뒤룩뒤룩 굴리고 있던 엘렌 후작이 한 번 더 이본에게 다가갔다.
“여, 여신님, 기습이라니요. 그렇다면 레일라가 되는 의식은 대체 언제쯤…….”
덩그러니 서 있던 이본이 고개를 돌려 텅 빈 황좌를 바라보았다.
황금 의자의 등받이에는 특이한 모양새의 홈이 파져 있었다.
송곳니가 들어 있는 황제의 옥새를 넣고 돌리면 의자가 밀려나고 비밀스러운 공간이 드러난다.
과거, 홈의 쓰임새를 찾다 엉겁결에 알아낸, 몇 천 년 제국 역사의 비밀이었다.
이본이 홈에서 눈을 떼고 몸을 숙였다.
시체 옆에 있는 황제의 보주를 들어 올리며, 그녀가 환히 웃었다.
“이제 파티가 시작됐어요, 여러분.”
* * *
“미친년, 파티 시작은 얼어 죽을.”
커다란 기둥 뒤에 있는 비밀 통로 안.
대전 안을 엿보던 중, 나도 모르게 그녀가 일으킨 ‘연가시 파티’가 떠올라 진저리를 쳤다.
황태자가 그런 나를 보고 재밌다는 표정을 지었다.
“일이 생각보다 쉽게 풀리는데, 공녀.”
나는 그의 말에 눈을 크게 뜨고 뒤돌아보았다.
“쉽다뇨? 사람들이 아직 이렇게 많은데요.”
물론 이클리스 놈이 군사들을 대부분 데리고 나가 병력은 얼마 안 될지 모르나, 엘렌 후작과 2황자를 포함한 귀족 10여 명.
여전히 많은 수였다.
“저런 노인네들쯤이야 한 주먹거리도 안 되지. 사실상 저 델만군 4명만 상대하면 되겠군.”
“2황자는요. 그래도 칼은 쓸 줄 알 거 아니에요.”
“그 새낀 X밥이야.”
그의 상스럽고 단호한 대답에 놀랍게도 마음이 안정되었다.
“자, 이거 받아.”
그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건넸다.
“이건…….”
황금색의 화려한 단검. 일전에 그의 생일 연회에서, 자신의 목을 치라고 그가 건넸던 것이었다.
“내가 먼저 나가서 저 4마리부터 해치울 테니까, 그대는 시간 두고 나와서 이걸로 인질들을 풀어 줘.”
밧줄에 꽁꽁 묶여 있던 아이들을 떠올리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마법 봉 주워서 저 레일라를 조지는 거야. 어때, 내 계획이.”
“허점투성인데 이상하게 완벽하게 들려요.”
정말이었다. 그가 말하는 계획은 어찌 보면 무모하기 그지없는 모험이었다.
이본이나 엘렌 후작으로 인해 일어날지 모를 돌발 상황들을 아예 배제한 것이나 다름없었기에.
그런데도 확신 어린 목소리에 마음이 놓였다.
생각해 보면, 칼리스토는 한 번도 자신이 말한 것을 지키지 않은 적이 없었다. 믿을 수 있었다.
“……고마워요, 같이 와 줘서.”
나는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가 없었더라면, 이 상황을 혼자서 도저히 헤쳐 나갈 수 없었으리라.
내 말에 그가 기쁜 사람처럼 씩 웃었다.
“하나, 둘, 셋 하면 튀어 나갈 거야.”
“저도 준비할게요.”
나는 결연한 얼굴로 황태자가 준 단검을 단단히 잡았다.
그러자 그가 비밀 통로의 문고리를 잡고 말했다.
“하나, 둘.”
쪽-.
‘셋’ 대신 입술 위에 물컹한 감촉이 닿았다 떨어졌다.
깜짝 놀라 굳은 내게, 그가 속삭였다.
“하여튼. 누구 애인인지 예뻐 죽겠다니까.”
끼익-.
아차 할 새 없이, 통로 문이 열리고 칼리스토가 대전으로 뛰어나갔다.
바야흐로 그의 칼춤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