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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엔딩은 죽음뿐-224화 (224/243)

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224화

“으아악!”

긴 다리로 대전을 성큼성큼 가로지른 황태자는 가장 가까이 서 있던 한 명을 거침없이 베었다.

나는 기습 뽀뽀에 화를 낼 새 없이 날뛰는 칼리스토를 황망히 바라보았다.

“침입자다!”

“바, 방어하라!”

뒤늦게 그의 등장을 알아챈 델만군들이 서둘러 검을 뽑았다.

챙, 채앵-!

“억.”

그러나 합이 세 번 오가기도 전에 또 한 명이 푹 고꾸라졌다.

분수처럼 튀는 피와 함께 처리해야 할 델만군이 눈 깜짝할 새 2명으로 줄었다.

“헉! 화, 황태자!”

“기습, 기습이야!”

2황자와 황비, 엘렌 후작의 낯빛들이 사색이 되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황태자는 나머지 병사들을 재빠르게 상대했다.

“으윽!”

전광석화 같은 그의 칼춤에 두 명이 동시에 허벅지를 베였다.

몸을 뒤로 꺾으며 제게로 휘둘러지는 두 개의 칼을 아슬아슬하게 피한 그는, 몸을 바로 하며 적의 상체를 검으로 주욱 올려쳤다.

그리고 그 반동으로 나머지 한 명의 목에도 검을 꽂았다.

캉, 떨그렁-!

놈이 들고 있던 내 거울 봉이 바닥에 떨어지며 둔탁한 소음을 내었다.

허무하리만치 쉽게 죽어 나자빠진 병사들을 보던 귀족들이 벌벌 떨었다.

“으, 으아악! 죽어라, 황태자-!”

그때였다. 그나마 젊은 편에 속하는 2황자파 귀족 세 명이 칼을 뽑아 들고 비장하게 달려갔다.

“쯧. 가만히 있어도 알아서 곱게 죽여 줄 텐데, 괜히 힘 빼는군.”

칼리스토가 성가시다는 듯 혀를 차며 제게 달려오는 귀족들에 맞서 달려갔다.

‘한 주먹거리도 안 된다’는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가 달려가며 휘두른 칼에 귀족들이 종잇장처럼 한 명, 한 명 썰려 나갔다.

구석에 몰린 황비와 엘렌 후작 앞에 도달하기까진 찰나의 시간이었다.

“잘 있었나, 엘렌 후작? 오랜만입니다, 어머니.”

여유롭게 또 한 명을 베어 넘기고 다가온 황태자가 과장된 인사를 건넸다.

“화, 황태자! 체, 체통도 없이 대전에서 이게 뭐 하는 짓이오!”

드레스에 핏물이 튄 황비가 비명 지르듯 소리쳤다.

“어머니!”

“화, 황비님! 물러나 계십시오!”

2황자와 엘렌 후작이 허옇게 뜬 얼굴로 뜯어말렸다.

칼리스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럼 내 하나뿐인 아우와 어머니는 여기서 뭘 하고 있었습니까?”

“황태자!”

“아, 우리 하늘 같으신 황제 폐하 목을 예쁘게도 잘라 놓고 있었던 거군.”

“그, 그건……!”

그제야 황비의 입이 다물렸다. 그녀의 안색이 시퍼레졌다.

황제 시해, 역모의 현장. 그것들을 황태자에게 고스란히 들켰기 때문이다.

“저, 전하. 이, 일단 진정하시고 제 말을 먼저 들어주시옵소서. 전하께 서도 듣는다면 생각이 바뀌실지도…….”

엘렌 후작이 비굴한 얼굴로 그를 만류했다.

칼리스토는 곤란하다는 얼굴로 제 미간을 두드리며 말했다.

“방금 전까진 기분이 썩 괜찮아서 마지막 가는 말쯤은 들어 주려 했는데 말이야.”

“저, 전하!”

“내가 지금 저걸 보고 기분이 상당히 안 좋아졌어.”

그가 흘긋 황좌 쪽을 눈짓했다. 그 끝에 아무렇게나 나동그라져 있는 황제의 머리가 있었다.

“어, 어차피 네놈에게도 나쁠 것 없는 일이잖느냐! 네놈이 살아 있다면 언젠가 행했을 일을 앞서 처리해 준 것뿐인데 무엇이……!”

“그러니까. 그게 문제라고.”

뻔뻔스럽게 외치는 황비를 바라보던 황태자가 별안간 시뻘건 눈을 번뜩였다.

“내가 평생에 걸쳐 염원하던 것을 지금 네 아비와 자식새끼가 앗아갔잖나.”

“화, 황태자……!”

피부가 따끔거릴 만큼 느껴지는 섬뜩한 살기에 황비가 주춤 물러섰다.

스르렁-. 황태자는 피가 뚝뚝 흐르는 칼을 쳐들고 한 발짝, 한 발짝 그들에게로 다가갔다.

“그러니 별수 없군. 이놈들 사지로 대신할 수밖에.”

그가 이를 드러내고 신이 난 듯 웃었다.

그야말로 게임 속 설정인 ‘철혈의 황태자’처럼.

‘어휴, 난 저 미친놈 적이 아니어서 다행이다.’

나는 광기 어린 칼리스토를 보고 흠칫 몸을 떨었다.

제 말대로 충실히도 날뛰어 준 그 덕분에 인질들의 주변이 텅 비었다.

‘지금이 기회야.’

비밀 통로에 숨어 상황을 엿보던 나는 지금이 적기라는 사실을 알았다.

지체할 틈 없이 곧장 비밀 통로 문을 열고 밖으로 뛰었다.

뛰면서 슬쩍 이본을 곁눈질했다.

그러나 그녀는 말릴 생각도 없는지 나를 빤히 보기만 했다.

‘뭐야. 믿는 구석이라도 있다는 건가?’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물론 조각을 다 모았으니 믿는 구석이야 있겠지만.

아무런 방해물도 없이 수월하게 인질들이 있는 반대편에 도달한 나는 곧바로 행동을 옮겼다.

동물 가면을 쓴 왜소한 아이들 사이에, 탈진해 있는 성인 여자는 단연 눈에 띄었다.

나는 품에서 단검을 뽑아 들고 제일 먼저 에밀리를 묶은 밧줄을 끊었다.

이어서 입을 틀어막은 천을 풀어 주자, 에밀리의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휘둥그레졌다.

“아가씨! 여기, 여긴 어떻게……!”

“에밀리, 시간 없어. 어서 도와.”

재회의 감동을 느낄 새 없이 나는 빠르게 다른 아이의 밧줄을 풀었다.

다행히 눈치가 빠른 내 전담 하녀는 곧바로 나를 도와 움직였다.

그러나 새어 나오는 훌쩍임을 멈추지 못했다.

“안 오실 줄 알았어요…….”

“그러게. 나도 내가 여기까지 올 줄 몰랐는데.”

“아가씨! 너무해요!”

복합적인 뜻에서 한 말인데, 에밀리가 서운하다는 투로 외쳤다.

나는 그녀를 흘끔 돌아보며 비식 웃었다.

“다시 만나서 반갑구나, 에밀리. 너도, 나도 아직 쟤 손에 죽진 않았네.”

내 말에 그녀가 다시 눈물을 글썽거렸다.

“그럼요! 진짜 악당이 죽어야지 우리 같은 선량한 사람들이 왜 죽겠어요!”

선량한 건 아니란 말이 혀끝에 아롱거렸지만 나는 그녀의 감격을 위해 모른 체했다.

에밀리의 도움으로 생각보다 빠르게 아이들을 다 풀어 낼 수 있었다. 총 7명이었다.

“에밀리, 애들 잘 챙기렴.”

“네, 네!”

“너네 다들 어디 다친 곳 없니?”

“네, 네에…….”

낯선 내 모습에 아이들이 쭈뼛거리며 답했다.

사자 가면을 제외한 아이들은 가면을 벗은 내 모습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치만…… 흑, 라온이. 라온이…….”

그때, 다람쥐 가면을 쓴 아이가 훌쩍이며 내 치맛자락을 잡았다.

‘맞아, 라온.’

나는 허겁지겁 아이들을 돌아보았다. 정신 사나운 동물 가면 사이에 사자 가면은 없었다.

‘그러고 보니, 내 거울 봉 어디 갔지?’

델만군 한 명이 칼리스토의 칼침을 맞고 쓰러지면서 떨어뜨리는 것을 분명 보았다.

그런데 아이들의 결박을 풀어 주는 사이 감쪽같이 사라져 있었다.

그 순간이었다.

“라온, 모두 다 죽이고 마법 봉 가지고 내게로 와.”

머리맡에서 나지막한 음성이 울려 퍼졌다.

고개를 들자, 얼마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 우뚝 서 있는 사자 가면이 보였다.

손에 쥔 마법 지팡이를 겨누고, 또 다른 한 손엔 내 거울 봉을 쥔 채.

“이본!”

나는 퍼뜩 이본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녀가 앉아 있던 황금 의자 앞에 생긴 구멍 속으로 쑥 들어가 버렸다.

“뭐야. 어딜 가는……!”

분명 황태자와 비밀 통로 안에서 엿볼 땐 보지 못했던 것이었다.

대체 저런 게 언제 생겼는지 알 수 없어 당황하던 때였다.

“제기랄! 황제의 보주를 가지고 있군. 지하에서 무슨 짓을 저지르려는 모양이야!”

엘렌 후작과 2황자의 목숨을 아직 붙여 놓은 채 무슨 짓을 하던 황태자가 갑자기 쏜살같이 단상 위로 뛰어갔다.

“저, 전하!”

“나 먼저 가서 막고 있을 테니까 애들 보내고 천천히 내려와, 공녀!”

“아니, 이대로 가면 저는 어떡해요!”

‘지팡이 겨누고 있는 애가 여기 있다고!’

그러나 뭐라 외칠 새도 없이 칼리스토는 이본을 따라 구멍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도망가는 이본을 나 대신 쫓아가 주는 걸 기뻐해야 하는지, 슬퍼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다시 고개를 돌리자, 사자 가면 사이로 텅 빈 아이의 눈동자가 보였다.

“……에밀리, 애들이랑 뒤로 천천히 물러서.”

“그냥 달려가서 꽉 쥐어박으면 안 될까요? 쟤 때문에 안전가옥이……!”

“스읍, 그런 소리 말고. 위험하니까, 어서.”

나는 에밀리에게 주의를 주며 내 뒤로 그들을 떠밀었다.

“라온…… 흑흑.”

아이들이 라온을 부르며 훌쩍였다. 그러자 반응하듯 라온이 공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스승님, 스승님이 나 때문에…….”

“라온, 일단 진정하렴.”

나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초점 없는 아이를 얼렀다.

- 라온은 레일라에게 세뇌를 당했습니다. 아마, 그 애를 구하다 죽은 제 모습을 보여 주며 죄책감을 들쑤신 것 같습니다.

아이들은 어른보다 세뇌가 쉬운 편이었다.

그러니 절대로 죄책감을 자극하면 안 된다고 뷘터는 여러 차례 당부했다.

나는 그것을 떠올리며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네 스승은 죽지 않았어. 일이 이렇게 된 것은 네 잘못이 아니야.”

“아니야. 나 때문에 스승님이 폭발해서 죽었는데…… 말을 들어야 해. 그래야 친구들을 살릴 수 있어…….”

“라온! 우리 여기 있어!”

“우리야, 우리! 네 친구!”

라온의 중얼거림을 듣다 못한 아이들이 말릴 틈도 없이 외쳤다.

“……내 친구들은 지금 안전가옥에 있는데? 안전한 곳에 있다고 했는데…….”

“우리 맞아! 네가 우릴 여기 오게 만들었잖아!”

“정신 좀 차려!”

“얘들아, 그만해!”

나는 간신히 아이들을 막았다. 그러나 이미 늦은 후였다.

“아, 아, 아니야! 내가 아니야. 난 안 했어! 잘못했어요! 할게요! 으으, 시키는 대로 할게요!”

라온이 갑자기 양팔로 머리를 붙잡고 미친 듯이 고개를 휘저었다.

“다 죽일게요! 악령들을 다 죽일게요!”

그러다 갑자기 휙 제 마법 지팡이를 쳐올렸다.

그 끝에 흰 빛무리가 모이기 시작하더니, 눈덩이처럼 그 크기가 불어나기 시작했다.

“라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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