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225화
나는 당황했다.
‘어떡하지? 지금이라도 달려가서 거울 봉 빼앗아 올까?’
다행히 붓터가 준 시든 장미꽃을 이클리스에게 빼앗기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사용하면 영영 보험이 사라지는 것이다.
게다가 빼앗은 거울 봉으로 어쩔 수 없이 아이를 공격해야 했다.
그사이, 눈이 뒤집힌 라온이 생성한 빛 덩이가 야구공만 한 크기에서 점점 축구공만 해지고 있었다.
누가 봐도 맞으면 위험해 보였다. 나는 결단 내렸다.
“애들아! 모두 내 뒤편에 서 있어. 내가 방어 마법을……!”
“찌리짜라쭈!”
그때였다. 누군가 마법 주문을 외쳤다.
“으으으!”
그 순간, 전기에 감전된 사람처럼 라온이 덜덜 떨더니 이내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쓰러졌다.
사자 가면 사이로 삐져나온 라온의 머리칼이 파마라도 한 것처럼 꼬불꼬불해진 채 연기를 뿜어 댔다.
“어? 지팡이 다 빼앗겼는데?”
누군가의 외침에 나는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돼지 가면을 쓴 아이 한 명이 코를 훌쩍 들이마시며 내게 들고 있던 지팡이를 내밀었다.
“헤헤! 뺏기기 전에 빤쮸에 숨겼어요.”
자랑하는 듯한 그 해맑은 얼굴에 나는 입을 떡 벌렸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린 나는 주춤주춤 쓰러진 라온에게 다가갔다.
“죽은 건…… 아니지?”
“기절 마법이에요.”
그 말에 한시름 놓았다.
“잘했어.”
머리를 쓰다듬으며 칭찬하자, 돼지 가면이 코를 훌쩍 들이마셨다.
“스승님이 마물용이라고 서로에게 절대 쓰지 말랬는데…….”
다른 아이가 떨떠름한 목소리로 덧붙였지만 애써 외면했다.
나는 라온의 손에서 거울 봉을 빼냈다.
반나절 만에 다시 조우한 빌어먹을 거울 봉의 모습에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에밀리가 쓰러진 라온을 둘러댔다. 나는 황태자를 쫓아가기 위해 서둘러 말했다.
“이제 어서 안전한 곳으로 떠나렴. 되도록 황궁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이동 마법 할 줄 알지?”
돼지 가면을 바라보며 묻자, 아이가 붕붕 지팡이를 흔들었다.
“아가씨, 정말 괜찮겠어요? 같이 가요, 네?”
에밀리의 걱정 어린 음성에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안 돼.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어.”
내 단호한 거절에 에밀리가 훌쩍였다.
“우리 아가씨에게도…… 드디어 봄이 찾아온 거 맞죠?”
황태자 때문이냔 물음이었지만, 나는 그저 웃을 뿐 답하지 않았다.
“어서 가. 아이들 잘 부탁해, 에밀리.”
“우리 그럼 갈게요! 구해 주셔서 감사해요, 귀족 아줌마!”
이윽고 흰 마법진에 휩싸인 아이들이 명랑한 목소리로 인사했다.
어떻게 알았는지 알 수 없어 눈이 휘둥그레진 내게, 돼지 가면이 마지막으로 소리쳤다.
“우린 말투랑 목소리 다 기억하는걸요!”
라온과 똑같은 대답이었다.
나는 희미해지는 아이들의 잔상을 보며, 구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감상을 끝맺기 전에 단호하게 뒤로 돌았다.
거울 봉을 쥔 손에 ‘꾸욱’ 힘이 들어갔다.
대단한 목적 때문에 이본을 상대하려는 게 아닌데, 참 이상하게도 가슴이 울렁거렸다.
‘모든 게 다 잘될 거야.’
구멍 앞에 선 나는 주문처럼 여러 번 되뇌었다.
이제 아이들도 구했으니, 이본을 해치우고 이 빌어먹을 세상을 구할 때였다.
전과 미묘하게 달라진 마음으로 마침내 구멍 너머, 끝없이 펼쳐진 계단에 첫발을 들이밀던 그 순간이었다.
탁, 타닥, 타다닥-.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누구지?’
나는 바짝 긴장한 채 어둠 너머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것이 무색하게도 계단을 타오르는 것은 땀을 뻘뻘 흘리는 칼리스토였다.
“전하? 왜 벌써…….”
태양궁의 지하가 얼마나 깊은진 알 수 없지만, 그가 안으로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간이었다.
‘벌써 이본을 죽이고 돌아왔을 리는 없는데…….’
내 의아함을 방증하듯, 때마침 밖으로 튀어나온 황태자가 내 손목을 휙 잡아챘다.
“뛰어, 공녀!”
“네……?”
“어서!”
나는 어리둥절한 채 그에게 반쯤 끌려갔다.
그 순간이었다.
쿠구구구구구궁-.
갑자기 땅이, 아니, 궁 전체가 미친 듯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무, 무슨 일……!”
“더 빨리!”
무슨 일이냐고 채 묻기도 전에 황태자가 재촉했다.
허겁지겁 달려서 막 광활한 대전 한가운데 도달했을 즈음이었다.
쿠와아아앙-!
천지가 개벽하는 소리와 함께 별안간 뒤편에서 어마어마한 돌풍이 불어닥쳤다.
달리던 우리는 그 여파에 휩쓸려 하릴없이 휘청거렸다.
이쯤 되니 도저히 뒤를 돌아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는 마구 휘날리는 머리칼을 쓸어 내며 고개를 돌렸다.
자욱하게 일어난 연기 사이로, 처참하게 무너져 내린 황궁 바닥이 보였다.
높은 곳에 있던 황좌는 물론이고, 그 앞에 있던 구멍도 근처에 있던 시체들도 보이지 않을 만큼 널따란 범위였다.
“이게 무슨…….”
“크워어어어어-!”
그 순간, 끔찍한 짐승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고막이 터질 것 같은 소음에 나는 반사적으로 두 손을 들어 귀를 막았다.
쿵, 쿠웅, 쿠우웅-.
다시 진동이 시작됨과 동시에, 무너진 바닥 끄트머리에 ‘터억-’ 하고 거대한 무언가가 올라왔다.
발톱이 내 얼굴보다 커 보이는 엄청난 크기의 발 두 개였다.
끼이익, 끼이익, 턱-.
몇 번 미끄러지듯 하던 그것이 얼마 안 가 바닥을 움켜쥐었다.
곧이어 어마어마한 광풍이 몰아쳤다. 시린 눈이 절로 감겼다.
펄럭, 펄럭-.
날개 푸닥거리는 소리와 함께 다시 눈을 떴을 때, 머리 위로 거대한 그늘이 져 있었다.
“저게…… 저게 뭐야?”
무너진 잔해 사이에 떠오른 것은 난생처음 보는 생명체였다.
태양궁의 천장을 모조리 가릴 만큼 커다란 날개.
찬란한 황금빛과 누가 오염시키듯 군데군데가 거뭇거뭇한 비늘이 뒤섞여 있는 몸.
칼리스토를 연상케 하는 핏빛 눈, 기다란 수염이 달린 코에서 쉬익쉬익 콧김이 쏟아져 나왔다.
“빌어먹을, 용이야.”
칼리스토가 뒤늦게 내 혼잣말에 답을 주었다.
나는 반쯤 혼이 나간 채 그를 돌아보았다.
“용……?”
“그래, 일전에 말한 적 있잖아. 황금룡이 황궁 아래 잠들어 있다고.”
“하, 하지만 그건 분명 건국 설화라고…….”
“나도 좀 전에 알았어. 태양궁 밑에 저런 게 있었는지.”
그는 상황과 맞지 않게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짓고 덧붙였다.
“영혼이 사라진 빈 몸뚱이를 무언가로 채웠나 보군. 그대가 어디 있는지 물었던 황금룡의 송곳니야.”
그의 손가락을 따라 고개를 돌린 나는 그제야 용의 가슴 한가운데 꽂힌 반짝이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그리고 마침맞게 용의 머리 위에서 주르륵 미끄러지듯 내려서는 작은 인영을 발견했다.
어느새 하나의 거울처럼 완성된 조각을 품에 안고 있는, 이본이었다.
‘……이 미친 게임아.’
나는 찰나 미친 듯이 진실의 거울 안에서의 기억을 되새겼다.
[황금룡의 송곳니를 찾아 완전한 불사가 된 이본.
강인한 생명력을 마음껏 갈취한 그녀는, 거울 조각을 이용하여 형제들의 봉인을 풀고 복수를 완성한다.]
‘레일라를 부활시킨다고만 했지, 용 나온다고는 안 했잖아요!’
갑자기 튀어나온 용의 모습에 실감도 나지 않고, 어이도 없어서 연신 헛웃음을 터뜨리던 찰나였다.
“크워어어억-!”
짐승이 또 한 번 끔찍한 소리로 울었다.
그때, 내 눈에 이상한 것이 보였다. 황금빛 비늘 사이에 박혀 있던 검은색 비늘들이 점차 영역을 넓히는 것이 아닌가.
‘괴로워하고 있어.’
용이 처절하게 몸부림치며 울부짖었다.
이지가 사라진 시뻘건 눈을 보자, 불현듯 섬뜩한 예감이 전신을 타고 올랐다.
‘영면에 든 용을 어떻게 깨운 거지? 설마…… 레일라들의 영혼을 용 속에……?’
이 말도 안 되는 추측이 사실이라고 말하는 듯, 이본이 들고 있는 거울이 불길한 푸른빛을 내뿜고 있었다.
그때, 황태자가 다급히 나를 잡아당겼다.
“공녀! 시간 없어, 우선 피하고 보자고!”
“자, 잠깐만요! 저 거울만 부수면, 저것만 어떻게 하면 될 것 같아요!”
“아니야, 별로 좋지 않은 생각인 것 같아! 지금은 먼저 여길 나가는 게 좋을 것 같은……!”
칼리스토가 문득 말을 하다 말고 눈을 부릅떴다.
후우우우웅-.
그와 동시에 방금 전에는 눈을 뜰 수 없는 광풍이었다면, 이번에는 뜨거운 열기가 섞인 바람이 미약하게 불어왔다.
‘설마요.’
나는 현실을 부정하며 삐걱이는 목을 돌렸다.
용의 입에서 벌건 불꽃이 일렁이고 있었다.
그 말로만 듣던, 영화로만 보던 드래곤 브레스. 그것이 폭발하듯 뿜어져 나오는 순간.
“아아아아악-!”
나와 황태자는 동시에 비명을 지르며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