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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엔딩은 죽음뿐-226화 (226/243)

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226화

괴수의 입에서 터져 나온 불바다는 황궁 전체를 불 싸지르며 엄청난 속도로 다가왔다.

등 뒤로 피부가 타들어 갈 듯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당연하게도 달리는 것으론 브레스의 사정권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물! 물! 얼음 마법 같은 거!’

나는 다급하게 들고 있던 거울 봉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상단에 어떤 마법 주문이 떠올랐더라도, 외치기엔 이미 늦은 시점이었다.

등 뒤까지 바짝 따라붙은 거대한 불길이 아가리를 쩍 벌리고 우리를 집어 삼키기 직전.

“페넬로페!”

칼리스토가 나를 거칠게 끌어당겼다. 딱딱한 갑옷에 코가 부딪히는 것과 동시에.

화르르르륵- 화마가 우리를 덮쳤다.

나는 눈을 꾹 감은 채 무아지경으로 비명 질렀다.

그런데 이상했다. 곧바로 느껴져야 할 뜨거움이나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망토로 나를 최대한 감싼 채 조금 전의 나처럼 눈을 꽉 감고 있는 칼리스토가 보였다.

콰르르르르-!

그런 그의 뒤로, 두 갈래로 쩍 갈라진 채 우리의 양옆을 퍼져 나가고 있는 불길이 보였다.

마치 모세의 기적이라도 된 것처럼.

‘어떻게 된 일이지? 왜 불길이 두 갈래로…….’

혼란스럽게 주변을 둘러보던 내 눈에, 문득 무언가가 공중에서 빛을 내며 둥둥 떠 있는 게 보였다.

‘저게 대체 언제……!’

그것은 내 주머니에 고이 들어 있던 뷘터의 시든 장미꽃이었다.

그제야 떠올랐다.

- 위급 시에 딱 한 번, 방어 마법이 발동될 겁니다. 시동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 당신의 비명.

내 가출 직후, 혹시 몰라 뷘터가 나를 위해 안배해 두었다는 방어 마법.

내가 미처 생각지도 못한 사이, 그것이 내 비명을 듣고 착실히 발동된 것이다.

끊임없이 뿜어져 나오는 불길에 맞서 꼿꼿이 떠 있는 앙상한 꽃줄기를 바라보자니 기분이 이상했다.

내 손에 닿자마자 화려하게 피었다가 곧바로 보라색 꽃잎을 흩뿌리며 시든 꽃.

의심 많은 뷘터의 사랑은, 방식 또한 참으로 그다웠다.

“전하, 눈 좀 떠 보세요.”

나는 여전히 숨 막히게 나를 끌어안고 있는 황태자를 일깨웠다.

그러자 그의 눈꺼풀이 움찔거리더니 새빨간 눈동자를 드러냈다.

“뭐야, 벌써 저승에서 다시 만난 건가?”

“아쉽게도 아직 안 죽었습니다.”

내 말에 황태자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홍해 바다처럼 쫙 갈라진 불길이 발치에서 넘실거렸지만 뜨거움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어떻게 된 일이지?”

“저기.”

어리둥절한 그의 물음에 나는 공중에 떠 있는 꽃을 가리켰다.

퍼부어지다시피 하는 불 폭탄에 맞 서기에 참으로 가녀려 보였지만, 장미꽃으로부터 뿜어져 나온 투명한 막이 우리를 완벽히 보호했다.

“아까 말했던 방어 마법이 이거였군.”

“……빈수가 준 방어 마법 아티팩트예요.”

망설이며 답하자 칼리스토가 잔뜩 인상을 썼다.

“쯧, 목걸이도 받더니…… 내 선물 들은 매번 필요 없다고 내팽개쳤으면서 그놈한테선 이것저것 많이도 받아 챙겼어, 응?”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삐딱한 그의 음성과 함께, 마침내 불길이 사그라들었다.

미친 용이 불을 뿜어 대는 것을 멈춘 것이다.

그와 동시에 허공에 떠 있던 장미꽃이 ‘파스스’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한바탕 폭풍이 휘몰아친 황궁 안은 시커멓게 타들어 간 채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다.

“크르르, 크워어어어-!”

불을 뿜어 대고도 힘이 남아도는 건지, 용은 거대한 몸체를 마구 뒤흔들며 날뛰었다.

어느새 검은 오염들은 찬란한 황금빛 비늘들을 집어삼킬 듯 군데군데 넓게 퍼져 있었다.

쿠르르르릉, 콰앙-!

날뛰는 용의 앞발에 맞은 기둥이 나무젓가락처럼 뚝 부러지면서 천장 한쪽이 우르르 무너져 내렸다.

나는 그 아수라장 사이에서 정신없이 이본을 찾았다.

“이본!”

그 순간 저 멀리, 새까만 배경 속에서 분홍빛이 휙 스쳐 지나갔다.

이본은 푸른빛이 새어 나오는 거울을 든 채 무너진 벽 틈새를 재빠르게 빠져나가고 있었다.

“저게 어딜 도망가? 데키나……!”

나는 곧바로 거울 봉을 쳐들고 이본을 뒤쫓으려 했다.

“공녀!”

그러나 덥석 나를 붙잡는 힘에 의해 멈춰 세워졌다.

“위험해. 저 미친 용 대가리 때문에 궁이 완전히 무너지겠어!”

“크워어어어억-!”

그때였다. 엎드린 채로 날뛰던 용이 갑자기 두 날개를 쫙 펼쳤다.

이윽고 광풍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으윽!”

속절없이 휘청거리는 나를 칼리스토가 붙잡는 사이, 엄청난 굉음과 함께 용이 천장을 뚫고 날아가 버렸다.

간신히 버티고 있던 건물이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미친……!”

“일단 여기서 빠져나가자고!”

나는 황태자와 허겁지겁 달렸다.

다행히 아직 멀쩡한 태양궁의 문을 열고 밖으로 튕기듯 빠져나옴과 동시에, 등 뒤로 기둥이 쓰러지며 입구를 막았다.

정말로 간발의 차인지라, 간담이 절로 서늘해졌다.

“허억, 헉…….”

황태자와 나는 창백한 낯으로 서로를 마주 보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얼마나 긴장했는지 그에게 잡힌 손이 땀으로 흥건했다.

“……그대와 함께 있으면 참 별별 경험을 다 하는 것 같아. 그렇지 않나?”

문득 칼리스토가 헛웃음을 터뜨리며 나와 맞잡은 손을 흔들었다.

놀리는 어투에 나는 입술을 쭉 내밀며 불퉁하게 물었다.

“그래서, 싫으세요?”

“그럴 리가 있나. 삶이 참 재밌어졌다는 소리야.”

그가 능청스럽게 대꾸했다.

그제야 천천히 호흡이 진정되면서, 밖의 상황이 눈에 담겼다.

챙, 카앙-!

태양궁 아래, 드넓은 황제의 정원에서는 제국군과 반란군 사이의 피 터지는 전투가 한창이었다.

후우우욱-.

문득 그 위를 시커먼 그림자가 휩쓸고 지나갔다.

전투 중인 병사들마저 순간 휘두르던 칼을 멈칫할 만큼 거대한 크기였다.

키에에에에엑-! 창공을 날아다니며 광룡이 포효했다.

언제 다시 내려올지 때를 재는 듯한 그 불길한 모습에, 나는 다급히 궁 주변을 살폈다.

“이본은 어디…….”

“저기 있군.”

어두컴컴한 사위 속에서도 칼리스토는 능히 분홍 머리를 찾았다.

이본은 칼과 창이 오가는 살벌한 전쟁터 한가운데를 차분히 걸어가고 있었다.

태양궁에서 좀 떨어진 곳에 있는 첨탑 쪽이었다.

“어서 가요!”

나와 칼리스토는 곧바로 계단을 내려섰다.

“조심해, 공녀.”

“죽어라, 황태자!”

그는 한 손으론 나를 꼭 붙잡은 채, 그를 알아보고 달려드는 반란군 몇 명을 손쉽게 쳐내며 길을 뚫었다.

그를 알아본 건 비단 반란군뿐만이 아니었다.

“전하? 아직 살아 계셨군요! 전하를, 황태자 전하를 보필하라!”

칼을 휘두르며 싸우던 기사 하나가 반색하며 다가오던 그 순간이었다.

“크헉!”

바로 앞에 당도한 기사가 불현듯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그리고 그 뒤에.

“……주인님.”

피가 뚝뚝 흐르는 검을 쥔 남자가 나타났다.

“뭐야, 저놈은.”

우리 앞을 우뚝 막아선 남자로 인해 황태자가 우뚝 걸음을 멈췄다.

“……이클리스.”

놈은 칼을 쥔 손으로 뺨에 튄 핏물을 묵묵히 닦은 후 나를 응시했다.

마치 노예 경매장에서 처음 만났을 때처럼 텅 빈 눈빛.

밀랍 인형 같은 무기질적인 표정으로 그가 입을 열었다.

“황후궁까지 미친놈처럼 뛰어갔어요.”

“…….”

“기습 때문에 위험에 처할까 염려되어, 주인님을 궁 밖으로 내보내려고 했는데…….”

“…….”

“위험하니까 황후궁에 안전하게 있어 달라는 말을 듣는 게…… 아니, 제 말을 믿는 게, 그렇게 힘드세요?”

어둡게 침잠해 있는 놈의 눈동자가 진득하게 나를 훑어 내려가다, 어딘가에 고정되었다.

황태자와 맞잡고 있는 손이었다.

“……가만히 계셨으면 제가 다 알아서 이본도 죽이고 공작저든 제국이든 갖다 바친다잖아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던 이클리스의 무표정했던 얼굴이, 조금씩 조금씩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왜 또 그 새끼 손을 잡아요.”

“저놈 저거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칼리스토가 짜증스럽게 뇌까렸다.

“전하.”

당장이라도 이클리스를 베어 넘기기 위해 움칠거리는 그의 앞을 막아서며, 나는 거울 봉을 겨눴다.

“네가 내 손을 쳐 내면서 우리 이야긴 다 끝난 걸로 알았는데.”

“……주인님.”

“마지막 기회야. 비켜, 너랑 이러고 있을 시간 같은 거 없으니까.”

내 서늘한 말에 회갈빛 눈동자가 미약하게 흔들렸다.

“그놈이랑은 있고요?”

놈이 물기 어린 소리로 물었다.

크워어어어억-! 그와 동시에 머리 위로 휙 그림자가 스쳐 지나갔다.

꼭 나를 찾기라도 하듯, 용이 유유히 하늘을 맴돌며 울부짖었다.

‘안 되겠다.’

이클리스를 상대할 시간 따위 없었다.

어느새 절반 가까이 검게 변해 있는 몸체를 불안한 눈으로 올려다보던 나는 기습적으로 외쳤다.

“썬더 피룸!”

콰앙-! 번쩍,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내려쳤다.

번개 한 방 맞고 죽진 않을 것이다. 일전에 레일라 신도들을 상대로 썼을 때도 한 방으론 기절만 할 뿐 죽지 않았기에.

‘제발 기절이나 하고 있어, 이 자식아!’

차마 번개 맞은 이클리스를 돌아볼 자신이 없어, 황급히 칼리스토를 이끌었다.

“가요, 전하!”

그러나 나는 미처 생각지 못했다.

“……말했잖아, 페넬로페.”

게임 속 남주는 번개를 직방으로 맞고도 멀쩡한 먼치킨이라는 것을.

이클리스는 몸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기괴한 모습으로 읊조렸다.

“저 새낄 죽이고 네 껍데기라도 가질 거라고.”

이윽고 놈이 칼을 쳐든 채 튀어 오르듯 달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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