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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엔딩은 죽음뿐-227화 (227/243)

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227화

눈 깜짝할 새 다가온 섬뜩한 얼굴에 숨을 들이마신 순간.

“물러서 있어, 공녀!”

챙-!

칼리스토가 엄청난 반응 속도로 놈의 칼을 받았다.

내게로 달려온다고 생각했지만, 이클리스의 목표는 황태자였던 것이다.

“전하!”

나는 기겁한 채 황태자를 불렀다.

챙, 챙, 카앙-!

그러나 대답할 틈도 없이 이클리스의 검이 몰아쳤다.

“제기랄, 인기 많은 애인 덕분에 별별 놈을 다 상대하는군!”

선공을 내준 탓에 방어하기 바쁜 황태자가 짓씹듯이 소리쳤다.

“신경 쓰지 말고 레일라에게 가, 공녀! 이 새끼 처리하고 뒤따라 갈 테니까!”

“아, 알았어요!”

나는 망설였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그 수밖에 없었다.

쉴 새 없이 칼을 맞부딪히는 두 사람을 피해 막 걸음을 옮길 무렵이었다.

“페넬로페!”

불쑥 누군가 나를 불렀다. 휙 시선을 돌리자, 정원 끄트머리에서 반란군을 상대하고 있는 공작이 보였다.

“야! 괜찮냐?”

그 옆엔 레널드도 있었다.

“아, 아버지?”

막 적을 베어 넘긴 공작이 서둘러 내게로 달려오기 위해 몸을 돌렸을 때였다.

“크워어어어억!”

공작과 레널드의 뒤로 돌연 광풍과 함께 거대한 몸체가 날아 닥쳤다.

용이었다. 또다시 브레스를 내뿜으려는 듯 용의 주둥이에 불꽃이 넘실넘실 차오르고 있었다.

“아버지!”

나는 날카롭게 숨을 들이마셨다.

드래곤 브레스의 위력이 얼마나 강한지 방금 전 겪고 왔다.

‘여길 그냥 다 쓸어버리려는 거야. 빌어먹을, 이본!’

다급히 거울 봉을 올려다보았지만, 익숙한 공격 마법 주문뿐.

뷘터가 준 장미꽃을 써 버린 지금 저 불 폭탄을 막을 방법이 없었다.

휘이이이이잉-.

그 와중에도 빌어먹을 용은 착실히 원기옥을 모았다.

열기 섞인 바람이 황제의 정원 위로 몰아치기 시작했다.

‘이게 먹힐까?’

나는 막막한 눈으로 거울 봉을 올려다보다가, 이내 입을 벌렸다.

먹히든 안 먹히든, 살려면 일단 질러 봐야 했기에.

“디 하르크-!”

우두두두두-. 내 외침과 동시에 땅이 진동했다.

황궁의 화려한 정원에 피어 있던 수천 송이의 꽃들이 창공을 향해 무섭도록 자라나기 시작했다.

장미 넝쿨이었다.

빨간색, 분홍색, 검은색, 주황색, 보라색, 갖가지 색의 꽃줄기들은, 허공에 떠 있던 용을 맹렬히 휘감았다.

뿌드득, 뿌드득.

거대한 용의 몸이 수천 개의 꽃송이에 휩싸였다.

“크워어어…… 어?”

불을 뿜기 위해 반쯤 벌어졌던 주둥이마저 텁 닫혔다.

장미 넝쿨이 입마개처럼 주둥이를 둘둘 휘감았기 때문이다.

넘실넘실 밖으로 새어나오던 불길이 사라졌다.

“하아…….”

나는 안도하며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프레셔.”

콰앙!

이윽고 꽃 뭉치 같은 용의 몸이 땅 위에 처박혔다.

“계속들 싸우세요.”

나는 얼어붙어 있는 주변을 바라보며 어색하게 말했다.

“우와아아아!”

내 말을 기점으로 멈췄던 싸움이 다시 재개됐다.

기분 탓인지 제국군들의 사기가 퍽 오른 것 같았다.

“크르르륵, 크르르르…….”

몸을 휘감은 넝쿨을 끊기 위해 용이 끊임없이 몸부림쳤다.

지이이이잉- 거울 봉이 덜덜 진동했다.

용을 억제하느라 끊임없이 마법을 쓰는 모양인지, 명치에서 뜨끈한 고통이 샘솟았다.

“으윽.”

천불 같은 뜨거움에 나는 작게 신음했다.

“페넬로페! 조금만 기다리거라! 마법사들이 용을 결박한 마법진을 준비 중이다!”

다시 재개된 싸움 때문에 공작이 정신없이 칼을 휘두르며 내게 절박하게 소리쳤다.

모처럼 안도되는 소리였다. 하지만 용의 힘이 너무 세서 오래 버틸 수 없었다.

‘그런데 칼리스토는?’

나는 식은땀을 뚝뚝 흘리며 잠시 잊고 있던 황태자를 찾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그는 아직 살아 있었다.

여전히 이클리스와 검을 맞부딪히며.

챙, 채앵-!

그 짧은 사이 수많은 합이 오간 건지, 그들의 얼굴과 몸에 자잘한 생채기가 나 있었다.

쉽게 황태자에게 질 줄 알았던 이클리스는 의외로 비등비등한 실력으로 능히 맞서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놀란 것은 놈의 실력뿐만이 아니었다.

그가 쥐고 있는 검.

화려한 황태자의 것과는 달리 별다른 장식 없이 투박한 모양새의 그것은, 내가 그에게 선물해 준 고대 마검이었다.

‘미친놈아, 제발 작작 해…….’

나는 끊임없이 마법을 쓰느라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진저리를 쳤다.

그때였다. 두 사람의 칼이 다시 한 번 거세게 맞부딪히는 순간.

날카로운 쇳소리와 함께 칼리스토의 검이 부러졌다.

이클리스의 검이 곧장 날아들었다. 칼리스토가 남아 있는 부분으로 힘겹게 그것을 막았다.

맞부딪힌 칼날이 무섭게 울었다. 그러나 한눈에 봐도 칼리스토가 밀렸다.

이클리스는 정말로 죽일 듯이 살기를 내뿜었다.

점점 뒤로 무너지는 황태자의 상체에 덜컥 가슴이 내려앉았다.

그때, 칼리스토가 꺾다시피 뒤로 몸을 훅 물렸다. 그러더니 이마로 이클리스의 얼굴을 퍽 들이박는 게 아닌가.

“으읏!”

일순 휘청이는 놈의 목으로 칼리스토가 남은 칼날을 쑤셔 넣었다.

같은 편이지만 정말 야비하기 그지 없는 수법에 입을 떡 벌리고 있는 것도 잠시.

채앵-! 황태자의 일격은 실패했다.

곧바로 정신을 차린 이클리스가 거세게 칼을 쳐냈기에.

충격을 막아 낼 날이 반쪽밖에 남지 않은 검은 버티지 못하고 산산조각이 나 버렸다.

“전하!”

칼리스토가 손잡이만 남은 제 검을 보고 낭패 어린 표정을 지었다.

적이 무기를 잃자 이클리스는 거칠 것이 없었다.

놈은 박치기가 각성제라도 된 양, 그야말로 미친 듯이 칼을 휘둘렀다.

칼리스토는 칼집을 빼들고 그것을 막으며 아슬아슬하게 피했다.

그러나 칼집으로는 모든 공격을 완전히 방어할 수 없었다. 기어이 그의 몸에 한 줄기 피가 솟아올랐다.

“칼리스토!”

그가 휘청거리자, 나는 마법에 집중하는 것도 잊고 그에게 달려가기 위해 몸을 들썩였다.

이클리스는 빈틈을 놓치지 않았다.

놈의 검이 하늘 높이 쳐들렸다. 칼리스토의 가슴에 수직으로 내리꽂히는 그 영원 같은 찰나.

“프리즌 숀!”

나는 망설임 없이 주문을 외쳤다.

쐐액- 어디선가 나타난 날카로운 얼음 조각 세 개가 바람을 가르며 날아갔다.

이클리스는 제게로 날아오는 살기를 기민하게 알아차리고 검의 궤도를 바꾸어 막았다.

채앵-! 두 개의 얼음 조각이 두 동강 났다. 그러나.

“으윽!”

마지막 하나는 막지 못했다. 그의 가슴에 내가 쏜 얼음 조각이 꽂힘과 동시에.

“커흑!”

내 입에서 질척한 핏물이 터져 나왔다.

마법을 이미 쓰고 있는 동시에 다른 마법까지 써서 그런 걸까.

눈앞이 뱅글뱅글 돌았다. 내장이 휘저어지듯 속이 마구 뒤흔들렸다.

‘아파…….’

명치가, 배가, 온몸이 아팠다. 나는 비틀거리며 몸을 웅크렸다.

머리끝까지 차오른 열 때문에 귀가 멍멍했다. 그 탓일까.

나는 용을 결박하고 있던 마법이 풀린 것도.

“공녀! 피해!”

그리고 광포해진 용이 네발로 기며 내게로 곧장 내달려 오는 것도 알지 못했다.

그저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더듬더듬 주머니를 뒤적여 물약병을 꺼내는 것이 내 한계였다.

벌벌 떨리는 손으로 뚜껑을 열어 물약을 막 들이켰을 때였다.

호흡이 점점 편안해지면서, 거세게 진동하던 맥박도 차차 안정되었다.

끼이이익…….

그와 동시에 기이한 소음이 귓가를 울렸다. 그 소리에 빙글빙글 맴돌던 시야마저 돌아왔다.

그리고 나는 코앞에 쩍 벌어져 있는 괴물의 아가리와, 내 앞을 가로막고 있는 누군가의 익숙한 등을 보았다.

“크르르르르.”

더운 열기가 뿜어져 나오는 거대한 주둥이가 움찔거렸다.

끼이이익…….

그러자 조금 전 울려 퍼졌던 기이한 소리가 또다시 들렸다.

그것은 용의 주둥이 사이에 박아 넣은 칼이 우는 소리였다.

“……이클리스.”

나는 멍하니 눈을 깜빡이며, 입을 달싹였다.

내가 날린 얼음 조각은 괴수의 발에 가려져 더는 보이지 않았다.

투두두둑-. 이클리스의 발밑에 시뻘건 핏물이 흘러내려 고였다.

용의 발톱에 가슴을 꿰뚫린 채, 칼로 간신히 주둥이를 막고 있는 처참한 모습으로, 이클리스가 내게 고개를 돌려 물었다.

“……주인님, 괜찮으세요?”

“이클리스. 너, 너…… 왜…….”

“컥…….”

내 물음과 동시에 그의 입에서 왈칵 핏물이 흘러 나왔다.

나는 이 상황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바보처럼 그렇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언제나 그의 앞에서 그랬듯.

“왜, 왜…….”

왜 널 죽이려 한 나를 지키느냐고.

말하지 않아도 내 말을 모두 이해한 것처럼, 놈이 희미하게 웃었다.

“……당신은 내게 폭력이라 했지만.”

“…….”

“나는 사랑이었어.”

그가 작게 웅얼거렸다.

끼이이익……. 용의 주둥이에 꽂아 넣은 그의 칼이 어느새 부러질 듯 휘었다.

“네가 내게 이 검을 주었을 때부터, 윽.”

또 한 번 이클리스의 입에서 뿜어지는 피에 나는 경기하듯 소리쳤다.

“말하지, 말하지 마. 마, 말하지 마.”

“꽃같이 웃으며, 내가 널 지킬 하나뿐인 기사라고 속삭였던 그 모든 순간들이.”

“…….”

“처음부터 제가 갖고 싶었던 건, 작위도, 탈출도 아닌…….”

“…….”

“당신이었던 거 같아요.”

이클리스는 공허한 얼굴로 내게서 고개를 돌렸다.

사랑해, 페넬로페.

얼핏 속삭임 같은 것이 스치듯 들렸을 무렵.

카앙, 콰직-!

기어이 내가 준 검이 용의 주둥이 사이에서 부서졌다.

“크워어어어어-!”

나를 놓친 것을 안 광룡이 울부짖으며 다시 한번 발을 휘둘렀다.

발톱에 꿰뚫려 있던 이클리스의 몸이 부웅 허공을 날았다.

“이클리스!”

“공녀!”

그의 옷자락을 잡기 위해 손을 뻗을 때, 누군가 거칠게 나를 안고 뒹굴었다.

콰앙-!

근소한 차이로 용이 내가 있던 곳을 발로 짓밟았다.

먼지가 뿌옇게 피어오르고 땅이 움푹 파였다.

또 한 번 나를 놓친 용이 포효하며 몸을 들었을 때, 그 자리엔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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