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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엔딩은 죽음뿐-228화 (228/243)

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228화

‘왜……?’

나는 용이 짓밟은 자리를 망연자실 바라보았다.

머릿속이 엉망진창이었다.

이클리스가 왜 그런 행동을 한 건지, 그와 같은 편인 줄 알았던 이본은 왜 이걸 두고만 본 건지.

물약으로 체력은 회복됐는데, 머릿속은 여전히 핑핑 돌았다.

‘남주는 안 죽는 거 아닌가? 남주들은 뭘 해도 안 죽었잖아.’

이것이 현실임을 이미 수없이 자각했지만, 나는 이 모든 상황들이 낯설고 생소하게만 느껴졌다.

뒤늦은 두려움이 몰려왔다.

이클리스를 짓밟은 광룡이 커다랗게 포효하며 다시 날아올랐다.

확실한 것은 용과 이본을 죽이기 전까지 이 모든 것은 끝나지 않을 거란 사실이었다.

“데, 데키나…….”

나는 벌벌 떨며 입을 열어, 의무처럼 거울 주변에 뜬 주문을 읊조렸다.

목 밑에서 다시금 화끈함이 치밀어 올랐다.

“레바티…… 웁!”

그때였다. 막 주문을 끝맺던 찰나, 누군가 내 입을 틀어막았다.

“지금 써 봤자 소용없을 것 같으니까 아껴 둬!”

칼리스토였다.

“키에에에엑-!”

“제기랄!”

그는 방향을 꺾어 우리 쪽으로 다시 날아오기 시작하는 용을 보고 거칠게 욕설을 내뱉으며, 나를 번쩍 둘러댔다.

“저, 전하.”

“흔들려도 좀 참아!”

그는 어깨에 짐짝처럼 나를 얹은 채 거침없이 뛰기 시작했다.

누구한테서 빼앗은 건지, 그는 조악한 칼 하나를 쥐고 빽빽한 전쟁터를 가로질렀다.

한 손으로 적을 베고, 넘어진 시체를 짓밟고 뛰던 그는 마침내 첨탑 아래 도착했다.

그대로 나를 내려놓는 바람에 시야가 마구 뒤집혔다.

어지러운 시선 사이로, 용이 지상을 향해 이번에 바위만 한 불덩이들을 쏘아 대는 게 보였다.

“으아아악!”

인간들이 고통에 울부짖고 신음하는 소리가 생생히 울려 퍼졌다.

숨이 거칠어졌다. 그런 내 얼굴을 황태자가 두 손으로 덥석 잡았다.

“나 봐, 공녀. 지금 정신 줄 놓으면 안 돼.”

그가 억지로 내 고개를 들어 올리며 눈을 마주쳤다.

새빨갛게 타오르는 눈동자 안에 허옇게 질린 내 얼굴이, 비쳤다.

“……전하.”

나는 새된 비명을 지르듯 속삭였다.

“저 무서워요.”

내가 실패하고, 너도 허무하게 죽어 버릴까 봐.

그런데 그때였다. 칼리스토에게서 당당한 대답이 돌아왔다.

“나도.”

“……예?”

“나도 무섭다고.”

‘아니, 보통 이럴 땐 용기를 북돋아 주는 말 하지 않나?’

혼몽한 머릿속으로 한 줄기 황당함이 피어올랐다.

“전하도…… 요?”

떨떠름한 목소리로 되묻자, 그가 콧잔등을 찌푸리며 답했다.

“나고 자란 곳 아래에 저딴 게 묻혀 있다는 걸 알았는데, 나라고 왜 안 무섭겠어? 그대 앞이니까 참고 있는 거지 속으론 덜덜 떨고 있다고.”

“정말…… 놀랍네요.”

진심이었다. 내 눈에 보이는 칼리스토는 정말로 이런 일에 이골이 난 사람처럼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기에.

“제가 정말 이본을 상대할 수나 있는 건지 모르겠어요.”

이클리스에게 칼을 맞고도 태산처럼 서 있는 남자를 마주 보자, 나도 모르게 속마음이 튀어나왔다.

“이겨도…… 용이 과연 죽을까요?”

모든 것은 추측일 뿐 확실하지 않았다.

‘만약 거울을 깨뜨리고 이본을 죽이더라도, 용이 죽지 않으면 그땐 어떡하지?’

뷘터는 이런 상황까지 일러주지 않았다. 막막함이 끝도 없이 밀려왔다. 그때였다.

“쓸데없는 생각 말고, 그대가 왜 이 짓거릴 해야 하는지만 생각해.”

황태자가 벌이라도 주듯 잡고 있는 내 양 뺨을 꼬집었다.

“아…….”

“아르키나 제도에서 내게 말해 준 것들이 있잖나. 응?”

그의 말에 거짓말처럼 잊고 있었던 것들이 생생히 떠올랐다.

‘내가 왜 이 짓거리를 하고 있는 걸까.’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서였다. 대학을 마치고 고고학자의 꿈을 이루기 위해.

그리고 돌아가기 전에, 이왕이면 무결한 황제가 되고 싶다던 칼리스토에게 안전한 세상을 만들어 주고 싶었다.

“설령 그대가 모든 것을 실패하더라도 괜찮아. 내가 대신 해결하지 뭐.”

칼리스토는 정말로 이 모든 게 별 거 아니라는 투로 읊조렸다.

나는 울컥해서 반문했다.

“전하가, 전하가 어떻게요…….”

“어떻게든.”

아무런 근거도 없이 자신만만하게 대답하던 그를 볼 때였다.

“크워어어어억-!”

용이 울부짖는 소리가 부쩍 가까워지더니, 첨탑 주변에 검은 그림자가 휙 덮쳤다.

“잘 들어, 공녀. 그대는 거울을 없애면 용도 죽을 거라 했지만, 내가 볼 땐 둘 중 하나야.”

뒤를 흘끔 바라본 칼리스토가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

“거울을 없애거나, 용의 가슴에 박혀 있는 송곳니를 제거하거나.”

“무슨…….”

그의 말에 반사적으로 용을 향해 시선을 옮기던 나는, 번뜩 떠올렸다.

이본이 용의 가슴에 박아 넣어 되살린 것으로 추정되는 ‘황금룡의 송곳니’.

황태자는 그것을 빼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안 돼요, 너무 위험해요!”

나는 황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나 칼리스토가 단호하게 답했다.

“어차피 그대가 레일라를 해치울 때까지 시간을 벌어야 해. 이제 물약 몇 개 안 남았지 않나? 언제까지 용만 상대하고 있을 순 없어.”

“하, 하지만…….”

“어서 올라가. 금방 해치우고 따라갈 테니까.”

“전하.”

칼리스토가 탑의 입구로 내 등을 마구 떠밀었다.

그의 말이 모두 맞는다는 걸 알았지만, 발길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처참한 몰골로 피를 흘리던 이클리스의 잔상이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렸다.

“걱정 마.”

그런 나를 모두 다 안다는 듯 칼리스토가 씩 웃었다.

“나한텐 그대가 준 이게 있잖나.”

그가 툭툭, 제 오른쪽 귓가를 쳤다. 귓불에 달린 빨간 루비가 보였다. 내가 선물한 힐링 마법이 담긴 커프스였다.

그걸 보니, 놀랍게도 마음이 진정됐다.

“저 갈게요.”

나는 결심한 듯 대꾸했다. 저게 있는 한 다치더라도 죽진 않을 것이다.

“몸조심해.”

인사는 간결했다. 그 한 마디를 끝으로, 그는 내게서 휙 몸을 돌려 달려갔다.

마구 쏘아지는 불덩이를 피해 용의 발톱에 매달려 오른 그의 모습을 끝으로 나 또한 뒤로 돌았다.

빌어먹게도, 첨탑은 하필 끝도 없는 계단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나는 헉헉거리며 등산을 시작했다.

뚫린 창 너머로 황태자가 용에 위태롭게 매달린 채 흔들리는 것이 간 간이 보였지만 애써 계단만 바라보고 달렸다.

제 등 위를 타고 오르는 인간을 떨쳐내기 위해 용이 마구 몸을 뒤틀었다.

콰앙, 쿵-!

놈의 거대한 발톱과 꼬리가 아슬아슬하게 첨탑을 스치고, 외벽이 부서지고, 마구 뒤흔들리는 계단 위를 오르고 또 오른 지 얼마나 지났을까.

마침내 끝이 보였다.

감시 초소로 사용된 건지, 첨탑의 꼭대기는 좁고 텅 빈 방 하나뿐이었다.

이본은 뻥 뚫려 있는 창문 위에 비스듬히 앉아 흥미로운 표정으로 밖을 구경하고 있었다.

푸른빛을 뿜는 거울을 소중히 끌어안은 채.

“왔어?”

흘끔 나를 돌아본 그녀가 산뜻한 인사를 건넸다.

남은 개고생하며 여기까지 올라왔는데, 그 유유자적한 모습에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나는 거칠게 헐떡이며 입을 열었다.

“헉, 헉…… 숨바꼭질은 다 끝났니?”

“쥐 몰이를 말하는 거라면 아직 진행 중이지.”

이본이 빙긋 웃으며 창틀 위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용케 죽지 않고 여기까지 왔네, 페넬로페. 난 이전처럼 네가 도망갈 줄 알았는데, 의외야.”

나는 들썩이는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 잠시 숨을 억누르다가, 이내 억누른 음성으로 물었다.

“이클리스는 왜 죽였어?”

이본을 만나면 가장 먼저 묻고 싶었다. 왜 남주를 죽였는지.

그래도 여주이지 않은가.

비록 히든 엔딩에서 세계 멸망을 하게 만들었다더라도, 악역을 죽이고 모두의 사랑을 쟁취한 승리자였지 않은가.

그런데 왜…….

“내가, 이클리스를?”

그러나 내 물음에 이본은 과장되게 놀란 표정을 짓더니, 이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 아니야, 페넬로페. 이클리스는 내가 아니라, 네가 죽인 거지.”

이본이 웃느라 찔끔 새어 나온 눈물까지 닦으며 덧붙였다.

“너 때문에 용의 발톱에 꿰뚫려 죽은 거잖아.”

“용은 네가 조종하고 있잖아. 중간에 멈췄으면 될 일인데, 왜……!”

“그러는 넌?”

불쑥 내 말을 끊고 이본이 되물었다.

“왜 그 애를 사랑해 주지 않아서 부나방처럼 사지로 뛰어들게 만들었어?”

“……뭐?”

“거짓으로라도 좋아한다고 말해 주면, 네가 원하는 대로 해 준다잖아. 그 쉬운 방법을 왜 따르지 않은 거지?”

정말로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는 이본의 모습에 나는 이를 악물었다.

‘이런 식이었구나.’

노멀 모드에서의 그녀의 행동들이 파노라마처럼 떠올랐다.

세뇌와 거짓된 사랑을 속삭이며 남주들을 이용하고, 그들의 행복이 절 정에 이르렀을 때 모두를 다 죽여 버린 것이다.

“난 너와 다르니까.”

답은 쉬웠다. 이클리스를 이용했을지언정, 원인도 목적도 모든 게 이본과는 달랐다.

“끝까지 거짓말로 이용해 먹다 죽여 버릴 생각이 없으니, 끊어 내는 게 당연한 거 아니야?”

“냉정하네.”

이를 악물고 뇌까린 내 말에 이본이 어깨를 으쓱이며 장난처럼 대꾸했다.

“뭐, 그 덕에 재밌는 꼴 잘 구경했지 뭐야.”

“넌 사람들이 죽고 다치는 게 재밌어? 네가 세뇌한 사람들이 네 손에 놀아나다 뒈지는 게 재밌느냐고!”

“그것도 물론 재밌지. 하지만…….”

울컥한 내 외침에, 여자는 입꼬리가 귀에 닿을 듯 찢어져라 웃었다.

“과거엔 허무할 만큼 쉽게 죽어 버렸던 네가, 아직까지 살아남아서 헛된 희망을 품고 버러지처럼 발버둥 치는 게 너무 재밌어 죽을 거 같아.”

“…….”

“곧 죽을 제 주제도 모르고, 다른 인간들 목숨에나 연연하고 있다니. 안타까워라.”

이본은 노랫말처럼 흥얼거렸다.

분명 나를 도발하기 위해서 하는 말임이 분명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점점 머리가 차가워졌다.

“너…… 진짜 역겹다.”

나는 그간 이본의 정체를 알면서도 그녀가 ‘여주’라는 것을 놓지 못했다.

내가 무슨 짓을 하더라도, 노멀 모드의 여주는 어차피 관심과 애정을 받을 테니까.

하지만 그 강박 같은 생각을 놓자, 모든 게 다 쉬워졌다.

“알겠어. 네가 보통 미친년이 아닌 거 알겠으니까…….”

“…….”

“이제 그만 끝내자.”

이제야 비로소 이본이 다시 보였다.

여주가 아닌, 악역으로.

“라크라씨오.”

나는 곧장 주문을 외쳤다.

휘익-! 어디선가 주먹만 한 빛 덩이 여러 개가 나타나 빠르게 이본에게로 쏘아졌다.

장소가 협소하고, 이전에 한 방 먹였던 기억 때문에 택한 마법이었다.

그런데 이본은 그때까지도 그저 나를 바라보며 묘한 미소를 지은 채 서 있을 뿐, 움직임을 취하지 않았다.

“무슨……!”

그 이유는 곧 알 수 있었다.

내가 쏜 빛 덩이들이 모조리 이본이 안고 있는 거울 속으로 빨려 들어간 것이다.

“어쩌지? 이제 그깟 고대 마법으론 날 어쩌진 못하게 됐는데?”

그녀가 고개를 모로 꺾으며 기괴하게 웃었다.

‘뭐야. 왜 마법이…….’

나는 눈을 부릅뜬 채 얼어붙었다.

조각이 완성되면 죽이기 쉽지 않을 것이란 뷘터의 말을 듣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공격이 무용지물일 줄은 전혀 생각지 못했기에.

내가 쏜 고대 마법을 삼킨 이본의 거울은, 깊은 해수면처럼 강렬한 푸른빛을 뿜어내며 일렁였다.

이윽고 눈이 부실 만큼 빛이 정점에 이르렀을 때.

“……디크 프렉훔.”

이본이 음산하게 무언가를 뇌까렸다.

본능적으로 위험하다는 경고음이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불길한 예감에 나는 일단 옆으로 몸부터 날렸다.

“으읏!”

넘어지듯 바닥을 뒹구는 동시에 거울 속에서 푸른 레이저가 터져 나왔다.

지이이잉, 쿠콰아아아앙-!

‘미친…….’

나는 방금 전까지 내 머리가 자리했던 곳을 보고 입을 떡 벌렸다.

레이저가 쏘아진 그 자리의 벽이 뻥 뚫린 채 밖을 내보이고 있었다.

‘개 사기 템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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