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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엔딩은 죽음뿐-229화 (229/243)

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229화

후드득 떨어지는 벽돌 가루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휘익-. 불현듯 앞쪽에서 섬뜩한 예기가 느껴졌다.

나는 반사적으로 거울 봉을 들어 앞을 막았다.

채앵-!

“악!”

날카로운 쇳소리와 함께 저릿한 진동이 손을 타고 느껴졌다.

이본은 어느새 단검을 꺼내들고 득달같이 달려와 내가 방패처럼 든 봉을 내리찍고 있었다.

코앞에 다가와 있는 여자에게서 첨예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아니, 이 비열한 년아! 마법 쓰다가 갑자기 칼을 꺼내?”

기가 막혀서 버럭 소리 지르자, 이본이 미소 지으며 끔찍한 소리를 지껄였다.

“마법으로 한 번에 죽이면 너무 시시하잖아? 기다려. 넌 사지만 예쁘게 자른 채 마지막까지 살려 둘 테니까.”

“으읏, 지랄 마.”

나는 진저리를 치다가 흘끔 가로로 누여진 거울 상단을 곁눈질했다.

“누가 쉽게 당해 준대? 파이어 피숀!”

화르르륵. 나와 이본 사이에 불길이 치솟았다.

“아악!”

이본이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내게서 훌쩍 물러섰다.

사랑스러운 분홍빛 머리칼 한쪽에 시뻘건 불길이 치솟았다.

쉽게 꺼지지 않는 불꽃은 이본의 얼굴 한쪽을 살라 먹었다.

나는 거울 봉을 꼭 쥔 채 긴장한 눈으로 휘청이는 이본을 바라보았다.

“제기랄, 이 쥐새끼 같은 년!”

뜨겁지도 않은지 불이 붙은 얼굴을 감싸 쥔 그녀가 지옥에서 올라온 악귀 같은 모습으로 소리쳤다.

“다흐 티 뭄!”

이본의 몸을 중심으로 검은색의 아지랑이 같은 것들이 구불구불 피어 올랐다.

불투명한 촉수 같은 그것들은 곧장 나를 향해 맹렬히 달려들었다.

아찔함에 눈이 질끈 감겼다.

“으, 프리즈 숀! 프리즈 숀!”

나는 거울 봉을 들어 앞을 막으며 다급히 주문을 외쳤다.

‘쩌저적’하는 소리와 함께 적막이 찾아왔다.

‘막은 건가?’

나는 질끈 감았던 눈을 살며시 떴다.

내게서 거울 봉을 빼앗으려고 했던 듯 세 줄기의 검은 촉수들이 봉을 칭칭 감은 채 얼어붙어 있었다.

그러나 숨 돌릴 틈도 없었다.

“내가 말했지. 이따위 것으론 이제 날 막을 수 없다고!”

“악!”

얼음들 사이로 돌연 날카로운 칼날이 튀어나왔다.

캉-! 얼어붙은 촉수가 부서지고 봉과 단검이 다시 맞부딪혔다.

불이 꺼진 듯, 한쪽 얼굴이 녹아내린 끔찍한 몰골의 여자가 내게 또다시 칼을 휘둘렀다.

“날 죽이면 뭔가 달라질 것 같아? 세상을 구하고, 사람들에게 칭송받고, 과거엔 받지 못한 가족들의 사랑을 받고? 하하하!”

나는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며 봉으로 칼을 막았다.

챙, 채앵-!

대체 저 여린 몸뚱이 어디서 힘이 솟구치는 건지, 이본이 괴물 같은 힘으로 쉴 새 없이 칼을 내리쳤다.

“정신 차려. 넌 안 돼, 왜냐고? 넌 가짜고 진짜 공녀는 나니까!”

“흐읏!”

가까스로 그것을 막아 내며 뒷걸음질 치던 나는, 또다시 기회를 엿봤다.

“파이어…….”

캉-! 그러나 이본의 내리찍는 속도가 더 빨랐다.

들고 있던 봉을 놓칠 만큼 엄청난 충격이 가해졌다. 그리고.

파각-! 불길한 파열음과 함께, 봉의 중간이 부러졌다.

내 손을 떠나 날아가는 거울 봉의 상단부를 보며 나는 숨을 멈췄다.

“무, 무슨…….”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아차릴 틈도 없었다.

다시 내게로 날아오는 칼날에, 남은 봉의 일부를 재빠르게 쳐드는 게 전부일 뿐.

“악!”

캉! 또 한 번의 거센 충격이 손목을 강타했다.

이본이 시커멓게 탄 얼굴을 내게 마구 들이밀며 소름 끼치게 웃었다.

“고대 마법 좀 쓰게 됐다고 뭐가 달라지기라도 할 것 같아?”

“흐, 흐윽.”

내리찍는 힘이 어마어마했다. 얼마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끼이이익- 칼이 봉과 마찰하는 소리에 억눌린 신음이 새어 나왔다.

“가엾은 페넬로페. 제 목숨조차 구하지 못하면서 누굴 죽이겠다고.”

그런 나를 조롱하듯 이본이 깔깔 조소하며 읊조렸다.

나는 등 뒤의 벽과 그녀의 몸에 짓눌린 채 필사적으로 눈을 굴렸다.

부서진 거울 봉의 상단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날아간 그것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이렇게, 이렇게 어처구니없이 죽는다고? 쪽도 제대로 못 쓰고?’

절망이 눈앞에 드리웠다.

‘죽기 싫어. 내가 왜 이 빌어먹을 곳에 끌려와서 죽어야 하는데!’

그때였다. 악착같이 버티던 내 눈에 반짝이는 무언가가 띈 것은.

‘균열!’

이 와중에도 이본이 품에 꼭 안고 있는 거울이었다.

푸른빛이 뿜어져 나오는 그것에 미세한 틈이 보였다.

- 이제부터 제 말 잘 들으십시오, 영애.

그와 동시에 순순히 이클리스에게 조각을 넘겼던 이유가 생생히 되살아났다.

- 조각을 빼앗기기 직전에 폭발을 일으켰습니다. 없애지는 못했지만 조각에 미세한 균열이 생겼습니다.

- 완전해진 레일라의 몸은 마법으로 쉽게 죽일 수 없습니다. 하지만 조각을 완성하고, 봉인을 해제하기 위해 가진 힘의 대부분을 거울에 쏟아 놓을 겁니다.

- 그 상태에서 거울을 깨트리면 레일라는 일시적으로 항거 불능 상태에 빠지게 되고, 바로 그때…….

거울을 깨트리기 위해선, 이본이 거울을 완성시키도록 내버려 둘 수밖에 없었다.

‘기회는 단 한 번뿐.’

나는 찬찬히 동선을 되새겼다.

그러면서도 칼리스토나 할 법한 그런 과격한 행위를 내가 과연 잘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해야 했다.

“야, 너 뭔가 착각하나 본데.”

목에 아슬아슬하게 근접한 칼날에도 개의치 않고 나는 입을 열었다.

잠시라도 이본을 방심하게 만들기 위해서.

“……뭐?”

뜬금없는 내 말에 이본이 의아하다는 듯 나를 응시했다.

“내가 널 죽이려는 이유는, 사랑받고 싶은 게 아니라!”

그 순간, 나는 이를 악물고 마지막 도약을 시도했다.

없는 힘을 끌어모아 봉으로 거세게 이본을 밀쳤다.

“으읏!”

“그냥 네가 싫어서!”

갑작스럽게 퍼덕이는 나로 인해 방심한 이본이 주춤 물러섰다.

거리가 벌어졌다. 기회였다.

“이 게임이 X 같아서 그런 거라고!”

머리를 최대한 뒤로 뺀 나는, 이내 힘껏 이마를 앞으로 돌진시켰다.

퍼억-! 엄청난 충격이 머리를 강타했다.

눈앞에 별이 번쩍였다.

“아악!”

이본이 코를 붙들고 휘청였다. 손 틈새로 줄줄 흐르는 그녀의 피가 춤을 추듯 울렁거렸다.

하지만 계속 해롱거리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나는 거칠게 머리를 털어낸 뒤,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너만 칼 있는 줄 알아?!’

칼리스토가 준 단검.

“흐아아아악!”

나는 그것을 억세게 고쳐 쥔 채, 비명을 지르며 이본의 품으로 달려들었다.

거울 속, 균열이 있는 자리에 ‘콱!’ 칼끝이 내리꽂혔다.

쩍, 쩌저적. 칼끝을 중심으로 거울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으흣!”

그곳을 정확히 내리찍은 후에도 나는 멈추지 않고 힘을 주었다.

기습 박치기를 당한 이본은 미쳐 날뛰는 나에게 속수무책 떠밀렸다.

계단이 있는 방 끄트머리에서, 정반대편 창문이 있는 곳까지.

내게로 마구 밀리던 이본의 몸이 마침내 창틀에 걸려 덜컥 멈췄다.

“아흑!”

“허억, 헉.”

나는 거친 숨을 토해 내며 시선을 내렸다.

금이 가던 거울은 어느새 조각조각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파사삭. 그중 하나가 바닥으로 떨어져 산산조각 났다.

“흐으, 너, 너……”

나와 같이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던 듯, 이본이 눈을 부릅떴다.

“너, 어떻게…… 커헉!”

불현듯 그녀가 발작처럼 몸을 들썩이더니, 왈칵 핏물을 토해 냈다.

뺨에 비릿한 것이 튀었다. 손을 타고 흘러내리는 뜨끈하고 질척한 감촉.

나는 다시 한번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어…….”

내가 꽂은 단검은, 부서진 거울 너머 이본의 왼쪽 가슴에 깊숙이 박혀 들어가 있었다.

“커흑!”

이본의 몸이 또 한 번 피를 뿜었다. 그녀의 몸이 무너지듯 창 너머로 넘어갔다.

“으읏!”

덩달아 나 또한 앞으로 고꾸라질 듯 넘어갈 뻔하다, 가까스로 창틀을 잡고 버텼다.

“왜, 왜……?”

눕듯 뒤로 꺾여 있는 이본이, 떨리는 손으로 칼을 찍어 누르고 있는 내 한쪽 손을 와락 움켜쥐었다.

“……왜지?”

혹시 공격인가 싶어 도로 바짝 긴장하던 게 무색하게, 그녀는 피거품이 끓는 입을 벌려 물었다.

“난 그냥,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랑 같이 살고 싶었을 뿐이야.”

“…….”

“과거엔 모두 다 내가, 내가 가졌어! 공작도 오라버니들도 모두!”

“…….”

“그런데도 결국 실패했어. 그들을 짓밟고 내 손으로 부활시킨 친가족들이 날 죽이려 했거든!”

이본은 목에 핏대를 세운 채 마구 소리 질렀다.

“이번 생에 뭔가 바뀌는 게 있을 줄 알았는데…… 왜 이번엔 네가 모두를 독차지한 거지?”

“…….”

“날 죽이는 방법은 어떻게 알았어? 거울은 어떻게 깨트린 거야? 뷘터 베르단디야? 칼리스토 레굴루스? 누구야, 어? 대답해!”

마지막 발악처럼 두서없이 나오는 대로 지껄이는 그녀를 나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꼭 그녀의 말이 아니더라도, 턱을 타고 줄줄 내리흐르는 피가 내가 성공했음을.

이본의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려 주었다.

“말해, 페넬로페. 대체 무슨 짓을 했기에 다들 네게 그렇게 절절 목매게 된 건지!”

이본은 웃는지 우는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흐느꼈다.

“나도 몰라.”

나는 무미건조하게 답했다.

결국 모두를 죽였으면서, 언젠가부터 이본은 항상 내게 그런 것을 물어봤다.

어떻게 남주들을 휘어잡은 거냐고. 마치 그들의 애정이, 사무치도록 그리워서 미치겠는 사람처럼.

그런데 정말로 나는 알 수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 그들이 날 사랑하기 시작한 건지.

“거짓말 마!”

내 대답이 마음이 들지 않은 건지, 이본은 얼굴을 사납게 구기며 비명처럼 외쳤다.

“왜? 내가 다시 살아 돌아올까 봐 무서워? 흐, 이제 다 끝난 마당에 좀 알려줘 봐, 페넬로페. 응? 왜 그들이 결국 내 세뇌에 먹히지 않았는지! 어?!”

죽어 가는 게 억울한 것처럼 이본은 끊임없이 발버둥 쳤다.

문득 뜨거운 것이 복받쳐 올랐다.

“넌 뭐가 그렇게 억울한데.”

페넬로페는 몇십 번, 몇백 번을 죽고 또 죽었는데.

영혼이 부스러지다 못해, 다른 세계로 튕겨 나가 잘살고 있던 나까지 끌고 오게 만들었으면서.

“그냥 주는 애정 받아 처먹으면서 진짜 공녀로 살았으면 됐잖아! 남주들을 다 가져 놓고 다시 망쳐 놓은 건 너잖아! 난 한 번도 원한 적 없어, 그딴 놈들 애정 따위!”

내 말에 이본의 버둥거림이 우뚝 멈췄다.

조금 멍한 표정을 짓는 그녀를 똑똑히 바라보며, 나 또한 엉망진창인 얼굴로 웃었다.

“그렇지만, 너랑 나랑 한 가지 차이점은 분명한 것 같네.”

나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짓씹듯 내뱉었다.

“이 세상에 신이 있다면, 모두의 사랑을 독차지하고도 제 발로 그걸 걷어찬 너와, 단 한 번도 가진 적 없이 죽어 간 나.”

“…….”

“둘 중 누구에게 기회를 주겠어?”

“아니, 아니야…….”

이본의 얼굴이 충격으로 일그러졌다.

“이번 생은 내게, 내게 기회였다고!”

그녀가 고개를 내저으며 소리 질렀다.

“이게 끝일 거 같아? 난 다시 돌아갈 거야! 다시 시작해서 널! 모두를…… 커헉!”

그녀가 다시 피를 뿜으며 거칠게 몸을 펄떡였다.

나는 천천히 단검을 쥐고 있던 손을 놓았다.

이본이 나를 잡기 위해 허공에 손을 허우적거렸다.

“아, 안 돼, 안……!”

“잘 가, 이본.”

만나서 더러웠고, 다신 보지 말자.

이미 창밖으로 반 이상 밀려난 그녀의 몸은, 손 쓸 틈 없이 뒤로 넘어갔다.

이본은 탑 아래로 무섭도록 추락하기 시작했다.

휘익-.

찢어질 듯 확장된 푸른 동공, 거칠게 흩날리는 분홍빛 머리칼이 까마득해질 때까지 나는 묵묵히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 순간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드디어 망할 괴물을 처치했다는 후련함도, 마지막 퀘스트를 성공했다는 뿌듯함도.

그저.

그저 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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