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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엔딩은 죽음뿐-230화 (230/243)

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230화

이본이 추락한 아득한 탑 아래를 망연히 내려다보다가, 막 뒤로 돌려던 찰나였다.

후욱-!

불현듯 창 너머로 거대한 무언가가 눈 깜짝할 새 추락했다.

그러나 나는 보았다. 찰나, 스쳐 지나간 찬란한 황금빛을.

“흐으!”

나는 다시금 창문에 달라붙었다.

쿠우웅, 쿠워어어-.

육중한 용의 몸뚱이가 탑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칼리스토-!”

떨어질 듯 몸을 밖으로 내밀고 그의 이름을 외치던 나는, 번뜩 정신을 차리고 계단으로 달려갔다.

“안 돼, 안 돼, 제발!”

정신없이 탑 아래로 내려가는 동안 나는 누군가에게 쉴 새 없이 빌었다.

마침내 탑의 입구에 도달해서 튕기듯 빠져나왔을 때, 밖은 어느덧 지옥 같은 밤이 지나고 푸르스름한 여명이 내린 새벽녘이었다.

나는 떨리는 눈을 정처 없이 굴렸다.

얼마 안 가, 탑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거대한 황금빛 덩어리가 처박혀 있는 게 보였다.

황금룡이었다.

“전하!”

나는 그곳으로 마구 달려갔다.

하지만 용이 너무 커서, 대체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칼리스토가 용 아래 깔려 있으면 어떡하지?’

그 생각을 하자, 온몸의 피가 발끝을 타고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전하! 전하, 제 말 들리세요? 전하-!”

나는 단단한 용의 비늘을 두드리며 미친 사람처럼 소리쳤다.

그때였다.

“으읏, 제기랄! 더럽게 무겁군.”

익숙한 음성과 함께 용의 날개 부분이 들썩였다.

나는 그쪽으로 구르듯 달려가, 마구 용의 날개 끄트머리를 끌어당겼다.

“전하! 으윽!”

젖 먹던 힘까지 끌어 올려 그것을 잡아당길 무렵, 칼리스토가 날개 아래에서 비척비척 기어 나왔다.

“잘 있었나, 공녀?”

마침내 몸을 모두 빼고 일어선 그가, 씩 웃으며 인사했다.

“전하!”

그 능글맞은 얼굴에 나는 잡고 있던 용의 날개를 놓고 그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그의 허리를 와락 끌어안았다. 퍽-!

“으윽!”

“깜짝 놀랐잖아요!”

내 돌진에 짧은 신음을 내뱉으며 몇 걸음 밀려나던 칼리스토가, 이내 으스러지듯 나를 마주 껴안았다.

“……성공했어?”

내 머리맡에 얼굴을 묻은 채 몇 번 호흡하던 그가, 속삭이듯 물었다.

나는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기쁜 일인데, 왜인지 목이 메었다.

“제가 죽였어요, 이본. 전하가 준 단검으로 심장을 찍었어요.”

“잘했어.”

숨을 헐떡이며 더듬더듬 내뱉는 나를 달래듯, 칼리스토가 등을 도닥여 주었다.

“내가 말했잖아. 그대는 할 수 있다고.”

“전하는 어디 다친 데 없으세요?”

나는 그제야 그의 가슴에 처박고 있던 고개를 들고, 다급히 그를 살폈다.

내 손에 묻은 것들 때문일까. 문득 코끝에서 비릿한 냄새가 진동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분 탓인지, 칼리스토의 낯빛이 창백했다. 하지만 기우였다. 그는 평소처럼 아무렇지 않게 대꾸했다.

“떨어져서 좀 욱신거리는 거 빼면 괜찮아.”

“다행이에요, 정말…….”

그제야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자, 이거 받아.”

문득 그가 나를 조심스럽게 밀어내며 무언가를 건넸다.

“이건…….”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날카롭고 두툼한 흰색의 물체.

용의 가슴에 박혀 있던 송곳니였다.

“이걸…… 빼낸 거예요?”

“찾았던 거잖아.”

칼리스토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어서 받지 않고 뭐 하냐며 재촉했다.

“……고마워요.”

나는 천천히 그것을 받아 들었다.

게임의 최종 보상을 황태자에게서 받다니 기분이 이상했다.

이건 물론 내게 꼭 필요한 것이었다. 위암에 걸린 내 현실 몸뚱이를 살려야 하니까.

‘이게 과연 먹힐까…….’

겉으로 보기엔 그냥 큰 짐승의 이빨 같기만 했다.

하지만 영면에 든 용까지 살릴 정도니, 더는 효능을 의심할 수도 없는 처지였다.

‘이름만 들었을 땐, 뭐 이딴 보상이 다 있나 했는데…….’

기분이 좀 이상했다. 멍하니 칼리스토가 준 송곳니를 매만지던 순간.

“으윽.”

나지막한 신음과 함께 칼리스토의 몸이 갑자기 무너져 내렸다.

마치, 송곳니를 전해 준 것으로 임무를 마치기라도 한 것처럼.

“저, 전하!”

나는 깜짝 놀라 쓰러지는 그를 받쳤다. 그의 허리를 감고 있던 손을 쳐들고 그의 등을 짚은 순간.

찐득한 무언가가 손에 잔뜩 묻어났다.

나는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려 확인했다.

“흐, 흐으…….”

비릿한 냄새는 내 손에 묻은 이본의 피 때문이 아니었다.

잠깐 짚은 것만으로 내 손이 온통 피범벅이 될 정도로 흥건한 그의 피 때문이었다.

“이, 이게 무슨…… 저, 전하!”

칼리스토의 상체가 고꾸라졌다. 그는 힘없이 내 어깨에 얼굴을 기댔다.

그제야 나는 그의 등에 난 참혹한 상흔을 보았다.

괴수의 발톱이 사납게 할퀴고 간 곳은 갑옷으로도 소용없었다.

깊게 파인 채 쩍 벌어진 네 개의 상흔에서 벌건 물이 생명수처럼 줄줄 새어 나왔다.

무려 날뛰는 광룡을 상대했는데, 무슨 근거로 그가 멀쩡할 거라 믿었을까.

“흐, 흐으.”

나는 얼어붙은 채 숨을 제대로 쉬지 못했다.

벌벌 떨리는 내 몸을 느낀 건지, 칼리스토가 사그라드는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나 괜찮아. 그러니까, 으윽.”

“말하지! 말하지 마세요. 아무 말도 하지 마세요.”

자꾸만 이클리스의 잔상이 눈앞을 뿌옇게 흐렸다.

아니야, 아니야. 황태자는 죽지 않을 거야. 남주니까, 내가 선택한 남주니까…….

나는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리면서 칼리스토를 등이 닿지 않도록 천천히 용의 시체에 기대게 했다.

다시 한번 자세히 본 그의 상처는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참혹했다.

괜찮다고 했지만, 아무리 봐도 그는 정말로 위급해 보였다. 어쩌면 죽어 가고 있거나…….

“어떡, 어떡하지. 어떡…….”

“보지 마.”

바보처럼 혼비백산 중얼거리고만 있을 때, 칼리스토가 설핏 웃으며 지껄였다.

“그댄 이런 거 끔찍하게 싫어하잖아.”

“그딴 소리 할 거면, 그냥 입 다물고 계세요.”

나는 주변을 둘러보며 도와줄 사람을 다급히 찾았다.

그러나 용의 커다란 몸뚱이에 가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막막함에 아랫입술을 꽉 깨물던 그때, 번뜩 내 눈에 닿는 것이 있었다.

그의 귀에 달린 빨간 루비.

‘힐링 커프스!’

무슨 정신으로 그것을 그의 귀에서 빼냈는지 모르겠다.

다시 이성이 돌아왔을 때, 나는 그것을 그의 상처에 가져다 댄 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왜, 왜 이게…….”

피가 너무 많이 나서 그의 상처가 정말로 치료가 되는지 아닌지 좀처럼 알 수 없었다.

나는 아득한 눈으로 바락 소리쳤다.

“누구 없어요! 도와주세요! 황태자 전하가…… 흐으!”

“쉬, 공녀.”

그때 황태자가 나지막이 나를 불렀다.

어느새 그는 내가 돌아 눕힌 보람도 없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전하, 잠깐만요. 저 사람들 좀 데리고 올 테니까, 이거 들고 잠시만…….”

“이제 가야 할 시간이지 않나?”

“네? 무슨…….”

“돌아가고 싶어 했잖아, 집으로.”

뜬금없는 그의 말에 잠시 사고가 멈췄을 때였다.

그의 말이 기폭제라도 된 듯, 그 순간 눈앞이 환해지더니.

〈SYSTERM〉 ~메인 퀘스트 : 하드 모드 히든 루트~

[진짜 악역은 누구?] 퀘스트 성공!

〈SYSTERM〉 보상으로 [히든 엔딩]과 [황금룡의 송곳니]를 얻었습니다.

〈SYSTERM〉 보상을 사용하여 [히든 엔딩]을 확인하시겠습니까?

[수락 / 거절]

오랜만에 마주한 시스템 창은 눈이 부시도록 새하얗게 빛났다.

엔딩이었다. 하필, 지금 이 순간에.

부릅뜬 눈으로 흰 글씨를 읽던 나는, 떨리는 손으로 천천히 [수락]을 눌렀다.

그리고.

「~하드모드 히든 엔딩!~
[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악역을 물리치고 멸망으로부터 세상을 구한 당신이 바로 진정한 주인공!」

〈SYSTEM〉 드디어 엔딩을 본 당신은 원하는 것을 이룰 자격이 충분합니다.

〈SYSTEM〉 [보상]을 가지고 이곳을 떠나시겠습니까?

(단, 이곳을 떠나더라도 [보상]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예. / 아니오.]

“으흐.”

나는 드디어 마주한 엔딩 앞에서 억눌린 울음을 터뜨렸다.

“왜, 왜 하필 지금…….”

“가야 할 시간, 맞지?”

마치 모든 걸 안다는 듯 칼리스토가 물었다.

나는 허공에서 시선을 떼고 그를 돌아보았다.

“……전하.”

“울지 마.”

황태자는 손을 뻗어 천천히 내 뺨을 어루만졌다.

“돌아가면, 여기서 있었던 일 다 잊어.”

“흐으.”

“내가 그대에게 초면에 했던 못돼 처먹은 언행들, 그댈 힘들게 했던 놈들, 싹 다…….”

마치 내가 돌아갈 거란 것을 이미 예견하고 있었다는 투였다.

그의 말에 숨이 막혔다. 내 뺨을 만져 주는 그의 손,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너무 따뜻해서.

가슴이 너무 아팠다.

나는 그의 손에 눈물 젖은 뺨을 비비며 목멘 음성으로 힘겹게 물었다.

“이걸, 이걸 어떻게 잊어요.”

“그렇게 해.”

가지 말고 자기와 살자고 했던 게 아직도 생생한데, 그는 이미 오래전부터 나를 놓아줄 준비를 해 온 것 같았다.

“그댄 아무것도 기억하지 마. 그리고 고고학에만 전념해.”

“그럼, 그럼 전하는요?”

“말했잖아. 그대가 어딜 가든 내가 알아서 쫓아가겠다고.”

나는 그의 말에 왈칵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넌, 넌 왜 이 순간에도. 이 순간에도 내게 져 주는 말만 해.

“그러니까…… 크흑.”

그때, 칼리스토가 퍼드득 몸을 떨었다. 그의 입가를 타고 피가 줄줄 새었다.

“전하!”

나는 거의 경기하듯 그를 불렀다.

“가, 어서.”

칼리스토는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은 손으로 나를 떠밀었다.

“마음 바뀌어서 그대 치맛자락 붙들고 늘어지기 전에, 어서.”

“왜…… 왜 그렇게만 얘기해요. 가지 말라고 했잖아요! 왜…… 왜 이제 붙잡지도 않아요.”

나는 어린아이처럼 흐느끼며 소리쳤다.

그가 당장이라도 죽을까 봐 무서웠다. 무서워 죽을 것 같은데…….

그러나 서럽게 우는 나와는 달리, 그는 희미하게 웃었다.

“원래 더 많이 좋아하는 사람이 지는 거야.”

“전하.”

“사랑해, 페넬로페.”

그가 꺼져 가는 목소리로 내게 사랑을 속삭였다.

“이런 말 하는 것도 우스울 만큼 헤어지는 건 잠시뿐이야. 그대가 어디 있는 내가 지긋지긋하게 쫓아갈 테니까…….”

나는 그의 말에 눈을 세게 문지르며 고개를 들었다.

〈SYSTEM〉 [보상]을 가지고 이곳을 떠나시겠습니까?

(단, 이곳을 떠나더라도 [보상]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예. / 아니오.]

여전히 공중에는 환히 빛나는 시스템 창이 떠 있었다.

나는 선택을 위해 천천히 손을 들었다.

허공에 우뚝 멈춘 내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그 순간, 무수히 많은 상념들이 나를 스쳐 지나갔다.

이곳에 처음 들어와 좌절하던 순간부터,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그 지옥 같던 시간들.

어느 하나 쉬운 게 없었다. 모든 게 무섭고 힘들었다.

처음 미로 정원에서 망할 황태자를 만났을 땐, 정말이지 모든 걸 내팽개치고 싶을 만큼 절망스러웠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내 지옥을 파고들기 시작한 그 때문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도 부정할 수 없었다.

여기서 [예.]를 선택하면, 드디어 이 빌어먹을 게임에서 벗어날 수 있지만…….

‘돌아가서, 돌아가서 정말 모든 걸 잊고 살 수 있을까?’

문득 밑도 끝도 없는 두려움이 전신을 엄습했다.

‘그사이 칼리스토가 죽어 버리면?’

나는 피를 흘리며 나를 바라보는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내겐 다시없을 누군가의 애정을 사무치도록 그리워하고, 이곳의 기억을 악몽 같은 꿈으로 되새기고.

찾아오지 않는 남자를 하염없이 기다리며 정상적인 생활을 이어 갈 수 있을까?

나는 도무지 자신이 없었다.

왜냐하면, 이 지옥 속에서 아주 잠깐이나마 내게 주어졌던 애정이, 관심이, 행복이.

너무 달콤해서, 이제 놓을 수 없을 것 같아서.

‘이제, 이제…… 나도 조금쯤 행복해져도 되지 않나?’

나는 시스템 창을 바라보며 울었다. 회한의 눈물인지, 아쉬움의 눈물인지는 알 수 없었다.

“흐으, 전하.”

나는 굵은 눈물방울을 뚝뚝 흘리며, 칼리스토를 불렀다.

“아니, 칼리스토 레굴루스.”

다시 정정한 호칭에, 루비처럼 그의 예쁜 적안이 서서히 커졌다.

“나도 당신 사랑해. 그러니까…….”

나는 부서질 듯 쥐고 있던 것을 있는 힘껏 위로 치켜들었다.

날카로운 끝이 칼리스토를 향하도록.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한번 잘해 봐요.”

휘익- 그와 동시에, 게임의 최종 보상이 아래로 하강했다.

[황금룡의 송곳니]가 칼리스토의 가슴 위에 박히는 순간,

나는 선택했다.

〈SYSTEM〉 게임이 종료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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