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231화
악역과 광룡이 휩쓸고 지나간 황궁은 그야말로 쑥대밭이었다.
이본의 시체는 용이 뱉었던 불덩이에 탄 채 발견됐다.
거울이 부서지면서, 용의 안에 들어 있던 레일라들의 영혼도 소멸되어 버렸다.
마침내 세상에 평화가 도래했다.
용의 사체를 수습하고, 남은 반란군들과 2황자파를 진압하고, 황궁을 복원하기 위해 연일 밖이 시끄러웠다.
그 속에서 황태자 궁만이 외딴 섬에 갇힌 것처럼 고요하고 적막했다. 에카르트 공작가는 황궁에 할 수 있는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세간에선 중립을 유지하던 공작가가 황태자파로 돌아선 게 아니냐는 말이 돌았다.
더불어 나에 관한 어마어마한 소문도…….
가끔 들러 소식을 전해 주는 세드 릭의 말에 나는 기함하는 대신, 무언가를 물었다.
세드릭은 그때마다 고개를 저었다.
아수라장 속에서, 이클리스의 시신은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
* * *
시간이 흐르고 반란군과 2황자파 소탕도 어느 정도 완료되었을 무렵, 공작이 황태자 궁을 찾아왔다.
황제의 옥새나 다름없는 황금룡의 송곳니를 내게서 수거하여 당분간 보관하기 위해서였다.
“페넬로페.”
오랜만에 보는 공작의 얼굴은 부쩍 늙어 있었다.
“아버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그의 앞에 다가가 앉았다.
악역을 물리치고 세상을 구했지만, 이후의 현실이 곧장 해피엔딩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친딸을 죽였다는 껄끄러운 일이 있어서일까.
우리 사이에 잠시 어색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잘…… 지냈느냐?”
먼저 입을 연 것은 공작이었다.
“네, 아버지는요?”
“나도 물론 잘 있었지.”
“다행이에요.”
“전하께서는…… 여전하시고?”
이어지는 질문엔 조금 전처럼 아무렇지 않게 대답할 수 없었다.
나는 가느다랗게 떨리는 손끝에 주먹을 말아 쥐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황급히 화제를 돌렸다.
“아, 여기요.”
달칵. 한 손에 들고 있던 것을 탁자 위에 올려 두었다.
황금룡의 송곳니를 담아 둔 상자였다.
시국이 시국인지라, 황궁에 둘 수 없었다. 황태자가 부재한 사이 그것을 노리는 자들이 너무 많았기에.
공작은 상자를 흔쾌히 받아 들었다.
“전하와는…… 언제부터 그런 사이였던 게냐.”
문득 상자의 뚜껑을 매만지던 공작이 망설이는 얼굴로 물었다.
“어, 어…….”
그가 바로 떠날 줄 알았던 나는 기습 같은 질문에 무척 당황했다.
내가 가출한 동안 황태자와 함께한 것을 모르는 공작에겐 이 상황이 퍽 황당하기 그지없겠단 생각이 들었다.
“……꽤 됐어요.”
“꽤……?”
공작이 충격받은 얼굴로 내 말을 따라 중얼거렸다.
나는 민망함에 고개를 숙여 시선을 피했다.
“……죄송해요, 미리 말씀드리지 못해서.”
“왜 하필 그런 인성 파탄 난, 아니, 아니다. 내가 실언을 했구나.”
주변을 둘러보며 황급히 말을 정정하는 공작의 모습에 나는 짧게 웃었다.
부정할 수 없는 말이었기 때문에.
공작은 내 표정이 풀린 것을 보고 굳은 얼굴을 풀며 물었다.
“……여기 계속 있을 게냐?”
나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전하께서 깨어나실 때까지는요.”
계속 있을 건 아니란 내 말에 공작이 눈에 띄게 안심했다.
“그 후엔…….”
“그 후엔, 수도를 떠나려고요.”
나는 공작의 말을 막고 먼저 답했다. 다시 공작저로 돌아가진 않겠다는 뜻이었다.
그의 푸른 눈이 일순 커다래졌다.
“떠나다니. 어딜 가려는……!”
내 단호한 얼굴 때문일까. 공작이 다급하게 외치다가, 천천히 입을 다물었다.
“……그래. 네게 다 생각이 있겠지.”
이제는 내가 하려는 행동들을 저지하지 않고 순순히 인정하는 그를 보자니, 문득 가슴이 울렁거렸다.
나는 사실, 그에게 미움받길 두려워했던가.
“……아버지.”
조심스럽게 그를 불렀다.
“괜찮으세요?”
“무엇이?”
“제가…….”
나는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이본을 죽였잖아요.”
내 말을 알아들은 공작의 얼굴이 석상처럼 굳어졌다.
이제 그는 악역이 빼앗은 딸의 몸뚱이마저 볼 수 없었다.
나는 그의 대답을 기다리며 숨을 죽였다.
이제야 조금쯤 친근감이 느껴지는 이들에게 다시 미움받는 것은 좀 두렵긴 했지만, 이곳에 남게 된 이상 감수해야 할 일이었다.
지금까지 겪어 온 것이니 새삼스러울 것 없기도 했고…….
“그 애는…….”
꽤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공작이 입술을 달싹였다.
“그 애도, 편히 쉴 수 있을 테지.”
나는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야기를 들어 공작도 이제 모든 것을 알겠지만, 사람의 심리란 게 그렇지 않은가.
쉽게 레일라와 딸을 분리할 수 있을 거라 생각지 않았다.
“이제 이본도 편히 쉴 수 있겠지.”
그러나 그는 힘겹게 딸의 죽음을 받아들였다.
“고맙구나, 페넬로페.”
공작은 고통스럽게 일그러진 얼굴로 내게 뜻 모를 감사를 건넸다.
그와의 대화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 * *
황금룡의 송곳니로 찍어 살린 후, 황태자는 긴 잠에 빠졌다.
의원과 황궁 마법사의 말로는 광룡의 독기 때문이라 하였다.
황태자의 몸이 해독을 끝내면 알아서 눈을 뜰 거라 했지만, 조금도 귀에 와 닿지 않았다.
공작을 배웅하고 침실로 돌아온 나는, 침대 옆에 가만히 앉아 황태자의 창백한 낯을 바라보았다.
공작과 세드릭을 비롯한 남들 앞에선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매초 매시간 초조함이 나를 좀먹어 갔다.
‘내가 너무 늦은 거면 어떡하지?’
골든타임이라는 게 있지 않은가.
선택지를 앞두고 갈등하느라, 정작 칼리스토를 구명할 때를 이미 놓친 거라면…….
그런 생각이 들 때면 호흡이 턱턱 막히고, 눈앞이 아득해져서 도무지 가만있을 수가 없었다.
나는 벌떡 일어나 침대 곁에 바싹 다가갔다.
그리고 손을 뻗어 그의 코 밑에 가져다 댄 순간이었다.
움찔, 남자의 감긴 눈이 움직였다. 그리고 이내 눈꺼풀이 열리며 새빨간 적안이 드러나더니…….
“……내가 아직도 꿈을 꾸는 건가?”
오랜만에 듣는 그의 목소리는 잔뜩 쉬어 거칠었다.
혼몽한 눈빛으로 나를 살피던 그가, 문득 눈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이것도 꿈이라면 좀 아플 것 같은데.”
숨을 멈추고 있던 나는, 가까스로 입을 벌려 물었다.
“……꿈이었으면 좋겠어요?”
“아니.”
탁- 그 순간, 그가 제 코 밑에 멈춰 있는 내 손을 잡아채 그대로 휙 끌어당겼다.
“그럴 리가 있나.”
아차 할 틈도 없이 세상이 뒤집혔다.
풀썩-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칼리스토의 위로 쓰러져 있었다.
“이, 이게 무슨……!”
“이제야 좀 살 것 같군.”
으스러지듯 나를 끌어안은 그가, 내 머리칼에 얼굴을 묻고 여러 번 심호흡했다.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당황해 발버둥 치는 것도 잠시, 나는 그가 아직 환자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버둥거림을 멈췄다.
그사이, 등허리를 감쌌던 손을 올려 머리칼을 마구 더듬던 그가 이내 얼굴을 찌부러뜨릴 듯 매만졌다.
“아직 다 안 나아서 이러면 안 된다고요. 놔요, 내려가게.”
“괜찮아.”
“괜찮긴 뭐가요!”
“괜찮대도.”
그는 연신 내 얼굴을 쓸고, 냄새를 맡았다.
대체 뭐 하는 건지 알 수 없어 눈살을 잔뜩 찌푸리고 있던 나는 얼마 안 가 그가 왜 그러는지 깨닫고 기운이 빠졌다.
칼리스토는 내가 실제인지 확인하고 있는 것이다.
얼굴을 덧그리는 손이 벌벌 떨리는 게 느껴졌다. 나는 왈칵 메인 목을 잠잠히 내리눌렀다.
“……어떻게 된 거지?”
한참을 그러던 그가 마침내 내 얼굴을 놓아주었다.
나는 그의 몸 위에서 조심조심 내려와 그의 옆에 나란히 누웠다.
그런 내 행동 하나하나에 시선을 떼지 못하던 그가 또다시 혼잣말처럼 읊조렸다.
“분명 눈 뜨기 전에 단단히 대비를 하고 있었는데 말이야.”
“……뭘요?”
“그대가 없는 지옥을 맞이하는 거.”
그의 말에 말문이 턱 막혔다. 칼리스토는 콧잔등을 찌푸리며 이어서 말을 늘어놓았다.
“사실 좀 무서웠어. 눈뜨면 그대가 사라진 후일까 봐.”
“…….”
“그냥 이대로 죽어 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는데…….”
혼잣말 같은 그의 독백에 갑자기 울컥함이 솟구쳤다.
‘이 자식이, 내가 어떻게 살려 놨는데!’
나도 모르게 주먹을 들어 그의 가슴을 ‘퍽’ 내리치며 소리쳤다.
“찾아온다면서요! 왜 말이 바뀝니까?”
“그 말에 속아 넘어가서 기껏 살려 놨더니, 뭐가 어째?”
분기탱천한 내 모습에 그가 황급히 눈꼬리를 내렸다.
“잘못했어. 화내지 마, 공녀.”
순한 강아지 같은 그 모습에 마음이 약해졌다.
‘이렇게 물러 터져서야…….’
나는 한 번 더 때리려고 들었던 주먹을 내리며, 속으로 한탄했다.
내 눈치를 살살 보던 칼리스토는 이내 활짝 웃으며 물었다.
“왜 가지 않았지?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했잖아.”
무슨 답을 듣고 싶어 하는지 뻔히 보이는 은근한 눈빛에, 불쑥 작은 심술이 돋았다.
“그냥, 돈이 좀 아까워서요.”
“뭐? 돈?”
“네, 돈.”
내 말에 벙찐 황태자의 얼굴을 보니 속이 좀 시원해졌다.
틀린 말도 아닌지라, 나는 태연하게 덧붙였다.
“전하가 주신 다이아몬드 광산 덕분에 저 엄청난 부자가 됐거든요. 그 돈 쓰지도 못하고 가려니까 아까워서 죽을 것 같지 뭡니까.”
“허…….”
기가 막힌다는 듯 황태자가 헛웃음을 흘렸다.
“예전부터 생각했지만…… 그대는 사람이 참 속물적이야.”
“그래서, 싫다고요?”
“아니? 부자 애인 둬서 좋다는 뜻이지.”
능청스럽게 말을 바꾸는 그에게 나는 삐죽 눈을 흘겼다.
그런 내 모습에도 황태자는 좋다고 히죽이다가, 손을 뻗었다.
“……고마워, 남아 줘서.”
뺨에 따뜻한 그의 온기가 느껴졌다. 그런데 왜인지, 그의 얼굴은 썩 밝아 보이지 않았다.
나는 덩달아 손을 뻗어 그의 뺨을 어루만졌다.
“……고맙다는 사람의 표정이 왜 그래요.”
“그대가 가지 않아서, 너무 고마워. 눈물이 날 만큼 기쁜데…….”
그는 내 손을 끌어당겨 손등에 ‘쪽’ 입을 맞췄다.
그리고 나를 피해 눈을 내리깔며, 작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내가 그대가 돌아가는 걸 포 기하게 만들고 주저앉힌 게 아닐까, 겁이 나는군.”
“…….”
“나중에 네가 후회하며 돌아가고 싶다고 울면. 그땐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예상치 못한 그의 속내에 눈을 크게 떴다.
단순히 내가 남았음을 좋아할 줄만 알았지, 그런 것을 걱정할 줄은 몰랐다.
이 와중에도 나를 걱정하는 그가 고마우면서도, 전혀 믿음을 주지 못했던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전하.”
나는 그에게 잡힌 손을 부드럽게 빼내고, 다시 그의 뺨에 올렸다.
얼굴을 들고, 눈을 마주치기 위해서였다.
다시 들린 새빨간 동공을 바라보며 나는 한 자, 한 자 명확히 말했다.
“전 포기한 게 아니라, 뭐가 더 나은지 따져 보고 선택한 거예요.”
“……선택?”
“네. 여기 있으면 어떤 게 더 이점이고, 어떤 게 나을지요.”
칼리스토가 잠에 빠져 있는 동안, 나는 감성을 최대한 배제하고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았다.
다른 것을 다 떠나, 솔직히 내 현실은 모든 게 각박했다.
꿈도 공부도 돈이 있어야 마음껏 할 수 있는 일인데.
알바를 세 탕씩이나 뛰어서 위암까지 걸린 내가 또 그 짓을 할 수 있을까.
그렇다고 내가 식물인간이 돼서야 후회하는 인간들과 화해한 후 아무렇지 않게 그들의 돈을 쓰고 싶진 않았다.
‘평생 후회하며 살라지.’
그 망할 인간들에게 마지막으로 거하게 엿도 먹일 겸.
잇속을 따지던 내 갈등은 생각보다 간단히 끝을 맺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씀씀이가 너무 커져서 거기 가선 감당이 안 될 것 같더라고요.”
“씀씀이……?”
“네. 전 전하 말대로 계산적이고 아주 속물적인 여자라서 말이에요.”
짓궂게 대답하자, 그가 기이한 것을 바라보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여전히 석연치 않아 보이는 그에게 선심 쓰듯 덧붙였다.
“그리고 뭐, 돌아가면 전하가 언제 찾아올지 기약 없기도 하고요.”
그제야 그의 얼굴에 안심이 떠올랐다.
“상관없어. 그대가 얼마나 돈을 쓰든, 보석을 밝히든.”
예의 그 익살맞은 표정으로 돌아간 황태자가 장난스럽게 내 말을 받았다.
“아예 이 손에 국고 열쇠를 쥐여 줄까?”
“네? 국고 열쇠요?”
“그래. 레일라를 죽이고, 옥새까지 손에 쥐었으니 이제 그대가 황제지. 그럼 난 그대와 함께 국고를 탕진하는 희대의 악처가 되는 건가?”
“됐거든요. 하여튼, 무슨 농담을 못 해.”
되로 주면 말로 받는 그의 언행에 나는 휙 그의 얼굴에서 손을 떼고 돌아누웠다.
잠시 잠잠하던 뒤가 이내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분주해졌다.
얼마 안 가, 슬며시 허리를 끌어안는 온기가 느껴졌다.
“……사랑해, 페넬로페.”
등 뒤에서 들려오는 안온한 속삭임을 들으며, 나는 눈을 감았다.
마침내 찾아온 휴식이었다.
〈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