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외전 1화
외전
제국은 연일 분주했다.
여전히 곳곳에 숨어 있는 레일라 잔당의 뒤를 쫓고, 숨죽이고 있는 역도의 무리들을 색출하는 동시에 망가진 황궁과 성도를 복구해 나갔다.
게다가 갑작스러운 황제의 죽음으로 인해 모든 전권을 맡게 된 칼리스토는 다친 몸을 채 회복하기도 전에 자리를 털고 일어나야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게임이 종료된 후 곧바로 이어졌던 일러스트 속 성장한 그의 모습은 실제로 볼 수 없었다.
너무 바쁜 나머지 대관식조차 차일 피일 미뤄졌기에.
녹초가 된 와중에도 매일 밤 내 방에 꼬박꼬박 들리는 그가 종종 낯설게 느껴졌다.
“차라리 전장에 있는 게 더 속 편할 거 같군.”
“전하.”
갑작스러운 인기척에 나는 퍼뜩 놀라 읽고 있던 책에서 고개를 들었다.
지친 걸음으로 터벅터벅 걸어온 칼리스토가 거의 드러눕다시피 소파에 앉았다.
나는 썩 좋지 않은 그의 안색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차를 내올까요? 약은요.”
“됐어. 그보다 이리 좀 와 봐.”
노인처럼 앓는 소리를 낸 칼리스토가 새빨간 눈동자를 스르륵 돌려 나를 흘겨보더니, 제 옆자리를 툭툭 쳤다.
시종을 부르러 가려던 나는 멈칫하다가, 이내 순순히 그쪽으로 걸어갔다.
소파에 앉기 무섭게 칼리스토가 내 어깨에 고개를 기댔다.
체취라도 맡듯 쇄골 가까이 얼굴을 묻은 그가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중얼거렸다.
“하…… 이제 좀 살 것 같군.”
죽다 살아난 후로 자주 하던 행동이라 더는 그런 남자가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보단 여전히 까칠한 얼굴이 눈에 띄었다.
“……치료 잘 하고 있죠?”
안쓰러운 마음에 한 손을 들어 그의 뺨을 매만졌다.
황금룡의 이빨은 말 그대로 목숨만 붙여 놓았을 뿐, 칼리스토의 몸을 완벽하게 원상 복귀시켜 놓지는 않았다.
‘최종 퀘스트 보상이 뭐 이따위야, 이 미친 게임아!’
덕분에 나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X같은 게임에 치를 떨 수밖에 없었다.
악독한 레일라의 저주가 담긴 상처는 쉽사리 재생되지 않았다.
먼 타국의 마법사까지 불러들여 상처를 정화했지만, 여전히 그의 옷 아래에 채 낫지 않은 시커먼 상처가 붕대에 칭칭 감겨 있었다.
아직도 의식 없이 두 눈만 감고 있던 그를 떠올리면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 들곤 했다.
나는 벌벌 떨리는 속을 내리누르며 말했다.
“바쁘다고 찾아간 의원 내치지 마세요, 전하. 붕대도 제때 가시고요.”
많이 힘들면 쉬라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차마 할 수 없었다.
황위를 앞두고, 조그마한 책 하나 잡히지 않기 위해 그가 얼마나 애를 쓰고 있는지 잘 알기에.
걱정스러운 내 목소리에 그가 부드럽게 웃으며 내리감고 있던 눈을 떴다.
“……그러고 싶은데, 그대의 아비 같은 악귀들이 날 가만두질 않는군.”
여전한 그의 어투에 나는 반사적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입, 입. 공작에게 악귀라뇨,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요?”
“들으면 뭐 어때?”
갓 황위에 오른 새 황제가 공작을 비롯한 오랜 충신들을 ‘악귀’라 칭한다는 소문이 나돌아 봤자 좋을 것이 없었다.
그러나 칼리스토는 그런 것 따윈 신경 안 쓴다는 듯 신랄하게 지껄이기 시작했다.
“하는 일이라곤 주둥이만 나불거릴 줄 아는 귀족 놈들이 얼마나 불평불 만을 떽떽거리는 줄 아나? 전장이었다면 그 주둥이들을 닥치게 만들 방법이 각양각색일 텐데 말이야.”
“혹시나 실행에 옮기시더라도 제 귀에 안 들리게 하세요.”
“그건 당연하지.”
충분히 실행 가능성 있는 칼리스토에게 염려를 담아 당부하자, 그가 호언장담했다.
나는 황당해서 그를 흘겨보았다.
“당연하긴요? 오늘 아침에도 세드릭이 전하의 검을 숨겨 달라고 얼마나 빌고 갔는데요.”
“뭐? 언제? 씻고 있을 동안이었나?”
정말 모르는 일이었는지 내게 기대고 있던 그가 벌떡 몸을 바로 세웠다.
“세드릭 포터, 그 비열한 족제비 같은 자식! 어쩐지 아무리 찾아도 검이 없더군. 어디다 숨겼지?”
당장 달라는 듯 내게 재촉하는 그의 모습에 절로 기가 막혔다.
“대체 회의장에 검을 왜 차고 가세요?”
“역도의 무리가 황궁 어디에 숨어 있을지 알 게 뭐야.”
칼리스토가 불퉁하게 대꾸했다.
‘참나. 씨를 말릴 작정으로 쫓는 주제에 무슨.’
황비, 그리고 엘렌 후작과 조금이라도 엮여 있는 가문은 구족을 멸할지 모른다는 소문도 과언이 아니었다.
어이가 없어 받아치려던 나는 다시금 입을 다물었다.
살이 내려 날카로운 턱선을 보면, 싫은 소리를 할 마음이 좀처럼 들지 않았다.
‘어휴, 물러 터져서는…….’
어쩌다 이렇게 되었나 한탄하던 나는 짧은 한숨을 내쉬며 읊조렸다.
“……얼굴이 많이 상했어요.”
이러나저러나 아픈 연인이 일에도 치여 초췌한 몰골인 것은 좀 신경 쓰이는…….
아니, 솔직히 많이 짜증 나고 속상한 느낌이 드는 일이었다.
“자꾸 이쪽으로 오지 말고 방에 가서 주무시라니까요.”
“안 돼.”
핀잔에도 칼리스토는 강경하게 고개를 저었다.
“잠든 사이에 그대가 도망가 버리면 어떡해.”
“제가 어딜 가요?”
“어디로든.”
매번 하는 무의미한 설전이었다. 오랜 잠에서 깨어난 그는 기이할 정도로 내 부재에 집착했다.
그 증거로 이본이 죽고 난 후 나는 황태자궁에서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었다.
공작이 회의마다 그를 집요하게 괴롭히는 것도 어찌 보면 나를 집으로 돌려보내 달라는 시위일 수도 있을 것이다.
‘너 때문에 암 걸린 몸뚱이고 뭐고 다 포기했는데 이제 와서 어딜 가, 이 새꺄!’
가끔은 답답한 마음에 버럭 외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는 이유는.
강박적으로 내 존재를 확인하는 칼리스토의 손끝이 여전히 떨리고 있기에.
“갈 거면 전하가 정무 보고 있을 낮 시간에 벌써 갔겠죠. 왜 굳이 힘들게 깜깜한 밤에 도망을 갑니까?”
나는 그 손을 마주 잡으며, 다소 냉정하게 뇌까렸다.
“……그건 그렇군. 제기랄.”
그렇게 나를 쥐 잡듯이 잡으면서도 그런 생각은 미처 못한 건지, 칼리스토가 나지막이 욕설을 내뱉었다.
작게 웃음을 터뜨리자, 그가 다급히 말했다.
“집무실을 아예 여기로 옮길까? 아니, 그냥 다 때려치우고 여행 가는 게 어때. 지난번에 외국을 돌아보고 싶다 하지 않았어? 잠깐 순행차 옆 나라라도…….”
“전하.”
나는 맞잡은 손을 천천히 끌어당겼다.
그리고 여전히 간헐적으로 떨리는 손가락 위에 살포시 입을 가져다 대었다.
“저 아무 데도 안 가요.”
손가락 사이를 파고드는 따뜻한 입 김에 그의 움직임이 우뚝 멈췄다.
“……그리고 어디로 사라지든 쫓아온다면서요? 그냥 해 본 소리였습니까?”
그 상태로 눈을 위로 치켜뜬 채 새침하게 흘겨보았다.
눈조차 깜빡이지 않은 채 나를 가만히 바라보던 칼리스토는, 꽤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야 참은 숨을 터뜨리듯, 목소리를 틔웠다.
“……아니.”
“…….”
“지옥 끝까지 쫓아가야지.”
창틈으로 들어오는 달빛에 반사된 그의 눈이 어둠 속에서 시뻘겋게 번뜩였다. 꼭 사냥감이라도 쫓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럴 거면서 무슨…….’
집요한 시선에 금방 짜게 식은 나는 그만 고갤 들고 잡고 있던 그의 손을 뿌리쳤다.
그러나 그런 내 손을 도리어 꽉 붙든 칼리스토가 다시금 막무가내로 내 어깨에 제 머리를 기댔다.
“무겁다고요!”
하고 불평해도 소용 없었다.
그가 굳은살 박인 커다란 손으로 답지 않게 조심조심 내 손을 어루만지며 물었다.
“오늘은 뭘 했어?”
“음. 그냥…….”
잠시 대답을 머뭇거리던 나는 이윽고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어차피 세드릭을 통해 내 하루 일과를 뻔히 감시하고 있으면서 물어 보는 것이다.
“황궁 마법사들 회의에 참석했어요.”
“……아르키나 제도에서 유물을 옮겨 왔다지.”
역시, 다 알고 있으면서 떠보는 것이었다.
나는 그런 칼리스토의 반응에 딱히 대꾸하지 않았다. 그가 못마땅해하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하는 바가 아니었기에.
오늘 마법사들이 합심해서 가져온 유물은 바로, 부서진 ‘진실의 거울’의 잔해들이었다.
“약혼자가 뼈 빠지게 일하는 동안 누구는 온종일 다른 놈 구명할 생각만 하고 있었군.”
예상대로 삐딱한 음성이 쏘아졌다. 나는 담담히 받아쳤다.
“사람 목숨 구하긴 해야 하잖아요.”
“그러라고 내준 마법사들이야.”
“멀쩡한 진실의 거울을 본 사람이 저밖에 없는 걸 어떡해요? 그리고 베르단디 후작님은 국정에 도움이 될 유능한 인재예요.”
이본이 죽고, 게임이 종료된 세상.
나는 이제 이 이후의 일이 어떻게 흘러갈지 모른다.
뷘터에겐 미안한 말이었으나, 뛰어난 마법 능력을 지닌 그는 앞으로 황제가 된 칼리스토에게 든든한지 원군이 될 것이다.
물론 그가 살아 있다는 전제하에.
“유능한 인재가 다 뒈졌군.”
이런 내 깊은 생각도 모르고, 칼리스토가 초딩처럼 터무니없이 유치한 말을 지껄여 댔다.
“쪼잔하게 굴지 말고 차기 황제로서 넓은 포용력을 좀 지니세요. 후작님 아니었으면 우리 나란히 구워져서 드래곤 밥으로 먹혔을지도 몰랐던 거, 벌써 잊으셨어요?”
“뭐? 쪼잔? 허.”
내 말에 칼리스토가 크게 코웃음을 치더니 이내 와다다 말을 쏟아냈다.
“그래, 그 장미. 그거 대체 언제 주고받은 거지? 그대가 공작저를 가출했을 때, 내가 가장 먼저 찾은 것 아니었나?”
“그, 그건…….”
나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정체를 드러낸 이본을 피해 허겁지겁 공작가를 탈출했을 때, 가장 먼저 뷘터를 찾아간 것을 칼리스토는 아직 모른다.
“수상해.”
어느새 내 어깨에서 고개를 바짝 쳐든 칼리스토가 눈을 게슴츠레 뜨고 내 얼굴을 샅샅이 훑었다.
나는 뜨끔해서 그의 눈을 피했다.
매번 느꼈지만, 놈의 촉은 가히 귀신같았다.
뷘터가 나를 좋아했다는 것을 알면 내가 그를 구하려는 것을 저지하는 것은 물론, 부서진 거울 잔해들마저 가루로 만들 것이다.
“수, 수상하긴요. 모두 말했잖아요, 후작님이 시간을 돌려서 세계가 멸망하지 않은 것이라고요…….”
게임 시스템을 제외하고 칼리스토에게 대략적으로 설명한 것을 들먹였지만, 가늘어진 눈은 돌아올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나는 먼 산을 보며 덧붙였다.
“……보은을 하는 거죠.”
“동굴에서 그 악령 씐 맨발의 미친 놈이 그놈이란 걸 둘이 합심해서 숨긴 것도 그렇고.”
“그땐 다 사정이 있었다니까요.”
“그러고 보니 그대의 성인식 날, 그 괴상한 마법 목걸이도 그 자식이 준 거였잖아. 그놈이 그대에게 왜 자꾸 그딴 조잡스러운 걸 주는…….”
“그만, 그만! 전하, 저 피곤해요. 그만 자야겠어요.”
자꾸만 파고드는 칼리스토의 입을 틀어막기 위해 나는 서둘러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전하께서도 그만 돌아가서 씻고 주무세요. 너무 늦었어요. 내일 아침에도 조회가 있으시잖습니까.”
다행히 그의 침실은 내가 묵고 있는 방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그러나 허둥지둥 내린 축객령에도, 칼리스토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런 그를 뒤로한 채 먼저 자리를 뜨려던 찰나였다.
“페넬로페 에카르트.”
그가 불현듯 잠긴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나는 화들짝 놀라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칼리스토는 여전히 소파에 우두커니 앉아 나를 빤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나 아파.”
“……네? 어디가요? 상처가 또…….”
벌어진 건가? 허둥지둥 그를 살피기 위해 손을 뻗던 찰나.
불쑥 뜨거운 손이 내 손목을 움켜쥐었다. 그는 그대로 그 손을 끌어다 제 뺨에 대었다.
“아파서 손 하나 까딱 못하겠군. 옷 벗을 힘조차 없는데.”
“…….”
“그러니 그대가 오늘도 씻는 걸도 와줘야겠어.”
눈이 마주쳤다.
나는 그에게 손이 잡힌 채 천천히 입을 다물었다.
“입 다물고 빨리 씻고 자라며?”
그가 뻔뻔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거렸다.
촉이 좋고, 눈치도 빠른 남자는 영악했다. 이렇게 약게 굴면 내가 뿌리치지 못할 것을 꿰뚫고 있었기에.
새빨간 눈동자 탓인지, 그 위에 투명하게 비친 내 얼굴이 차차 붉게 물들어 갔다.
나는 이윽고 자그마한 목소리로 답했다.
“……알겠어요.”
악역의 엔딩은 죽음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