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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엔딩은 죽음뿐-233화 (233/243)

<>외전 2화>

결국 칼리스토는 다음 날 아침에도 검을 차지 못하고 궁을 나섰다.

힘겹게 그를 배웅한 후 다시 죽은 듯 잠이 들었던 나는 느지막한 정오가 돼서야 유물 복원 현장으로 슬슬 걸어갔다.

칼리스토의 말처럼 내가 아니더라도 더 유능하고 뛰어난 인력들이 많았지만, 그렇다고 손 놓고 구경만 하기는 좀 그랬다.

공작저로 돌아가지도 못하게 하는 놈 때문에 황궁에서 딱히 할 일이 없기도 했지만…….

‘뷘터가 죽었는지 살았는지는, 내 눈으로 꼭 확인해야 돼.’

그에겐 퍽 냉정한 말이었지만 솔직히 나는 아직도 불안했다.

죽은 줄 알았던 이본이 되살아나서, 시공간에 묶여 있는 뷘터가 또다시 시간을 돌릴까 봐.

그래서 그 끔찍했던 모든 일들이 다시 반복될까 봐.

엔딩 이후 단 한 번도 퀘스트 창이 뜬 적은 없지만 찾지 못한 이클리스의 시체도, 돌아오지 않는 뷘터도.

뭐 하나 명확한 게 없었다.

“……아, 그건 가운데 쪽이에요.”

멍하니 생각을 잇던 나는 엉뚱한 데로 가고 있는 부서진 거울 장식을 발견하고 서둘러 입을 열었다.

“그쪽 말고, 좀 더 왼쪽이요. 접합 면에 이물질 많으니까 좀 더 제거해 주시고요.”

“앗! 예, 옙!”

젊은 마법사가 어리숙한 표정으로 내팽개친 붓을 집어 들었다.

레일라로 인해 탄압을 받아서 그런지, 제국에 의외로 고고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의 수가 무척이나 적었다.

‘아오…… 그냥 제대로 잘돼 가는지 구경이나 하려 왔더니.’

잘못 집었다간 그대로 부스러질지도 모를 만큼 오래된 유물을 마구잡이로 다루는 모습에 멀뚱히 서서 지켜만 볼 수 없었다.

그래서 두 팔 걷어붙이고 몇 번 관여했더니, ‘진실의 거울’ 복원 현장은 점점 내 관할이 되어 가고 있었다.

“그걸 다 기억하세요?”

그때 쾌활한 목소리가 작업 현장에 울려 퍼졌다.

“마리엔느!”

나는 반갑게 젊은 여자를 맞이했다.

마리엔느 테롯시는 왕립 아카데미에 있는 유일무이한 고고학 교수였다.

“공녀님 덕분에 일이 척척 진척되고 있어요. 안 그랬으면 한 달이 지나도 저 장식이 어디에 붙어 있는지 회의나 하고 있었을 거예요.”

동감이었다.

그녀는 다소 수다스럽긴 했지만, 잔해들을 뭉쳐 모아 접합 마법으로 대충 붙이자는 무식한 인간들 사이에서 그나마 말이 통했다.

마법사들은 정말이지 일원론적인 족속들이었다.

뷘터가 갇힌 곳이 어딘지 알 수 없어 찾을 방도가 없다고 모두가 손 놓고 있을 때, 부서진 ‘진실의 거울’을 복원해 보자 제안한 것도 마리엔느였다.

그를 만났을 때 ‘멀쩡한 진실의 거울’을 보았다는 내 증언 때문이었다.

사실 나는 그 제안이 반쯤은 회의적이었지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동의했다.

‘영원히 불에 타 뒈지게 만들 순 없으니까…….’

복원 작업은 큼지막한 퍼즐 맞추기와 비슷했다.

나는 부서지기 전 거울의 모습을 애써 떠올리며 그것을 도왔다.

“3천 년은 더 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상태가 굉장히 좋은 편이에요. 왜 부서진 건지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요.”

벌써 얼추 맞춰진 거울의 틀을 보고 마리엔느가 반색했다.

나는 오랫동안 쭈그리고 있어 찌뿌둥한 몸을 일으키며 대충 답했다.

“바람이 안 드는 실내에 있어서 그런가 봐요.”

“그런 것치곤 부식된 흔적이 거의 없는데요? 역시, 고대의 마법이라도 걸린 건가?”

마리엔느가 거울 틀을 이루는 청동을 매만지며 놀랍다는 듯 말했다.

산산이 부서지긴 했지만, 엄청난 세월을 견뎌 온 것치고 유물은 상태가 매우 좋은 편이었다.

‘내 피 같은 돈으로 염병할 보수를 그렇게 해 댔으니 당연히 좋을 수밖에.’

뒤를 이어 튀어나오는 빈정거림을 애써 참았다.

“이대로라면 며칠 내로 끝낼 수 있겠어요.”

마리엔느가 내 쪽으로 눈을 찡긋하며 말했다.

그녀가 주는 눈치를 알아차린 나는 놀란 음성으로 물었다.

“거울 조각들은 모두 찾았어요?”

“물론이죠.”

깜짝 선물을 주듯 마리엔느가 숨기고 있던 상자 하나를 꺼냈다.

그것을 열자 일부가 거떻게 그을린 허름한 조각 여러 개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추락하는 이본과 함께 조각 몇 개가 탑 아래로 떨어진 탓에 찾는 데 꽤 애를 먹었다.

그 옆에 익숙한 손거울과 길쭉한 봉이 보였다.

첨탑 위에서 이본과 치고받고 싸우는 동안 내가 다시 깨트린 거울 조각들과 부러진 내 거울 봉이었다.

난 그것을 본체만체한 채 재빨리 조각의 개수부터 세었다.

“하…….”

그리고 15개가 맞음을 확인하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내 손에 모조리 들어온 15개의 거울 조각들을 보자니 기분이 좀 이상했다.

‘이 중 하나 숨기느라 그렇게 개고생을 했는데…….’

따지고 보면 뷘터가 그 꼴이 된 것도 다 이 조각 하나 때문이지 않은가.

착잡한 마음을 애써 내리누른 채 나는 재빨리 핀셋으로 그것들 중 하나를 집었다.

꼼꼼한 마리엔느가 이미 이물질들을 제거하고 깨끗하게 세척해 온 덕분에 더 손댈 것이 없었다.

나는 그것을 들고 곧장 거울 틀 앞에 쭈그려 앉았다.

그리고 묵묵히 그 빈자리 위에 조각을 맞췄다.

이본이 들고 있던 것을 보며 수없이 치를 떨어 그런지, 실수 한 번 하지 않고 15개의 조각을 모조리 이어 붙일 수 있었다.

쥐가 파먹은 것처럼 동그랗게 비어 있던 거울의 모서리가 점점 조각들로 채워졌다.

그러나 그것들이 완성되길 그토록 두려워했던 과거와는 달리, 기이한 푸른빛은 새어 나오진 않았다.

“다 됐다…….”

그제야 탁, 하고 긴장이 풀렸다.

나는 참았던 숨을 내쉬며 손바닥에 쑤셔 넣을 듯 붙들고 있던 핀셋을 내려놓았다.

“역시……! 공녀님께선 재능이 있으세요!”

내가 맞춰 놓은 거울의 일부를 보며 마리엔느가 작게 감탄했다.

간지러운 말이었다. 나는 힘없이 웃으며 대꾸했다.

“재능은요. 모양 대충 맞추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인데요.”

“여기 봐요! 다른 사람들이 대충 맞춰 놓은 거랑은 배열이 달라요. 틈 하나 없잖아요? 유물을 대하는 태도부터 다른 거라고요!”

내 말에 마리엔느가 흥분해서 소리쳤다.

“이왕 하는 거, 깔끔한 게 보기도 좋잖아요.”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대수롭지 않은 내 어투에 마리엔느는 단호하게 대꾸했다.

“보통 집중력이 아니면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죠.”

생각지 못한 칭찬 세례에 나는 조금 민망해졌다.

장갑을 벗고 어색하게 손을 닦고 있자 마리엔느가 물었다.

“공녀님, 그런데 이 손거울과 봉은 어떻게 할까요?”

그제야 그녀가 이본의 조각들 외에 내 흑역사까지 챙겨 온 것을 깨달았다.

“그냥…… 근처 아무 데나 놔두세요.”

나는 그것에서 애써 시선을 돌리며 답했다.

거울 봉의 손거울은 엄연히 다른 물건이어서 ‘진실의 거울’을 복원하는 것과는 관계가 없었다.

내 말에 마리엔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그래도 되는 거예요? 하지만 이건 공녀님의 하나뿐인 무기…….”

“아니요! 그거 이제 제 거 아니에요. 작동도 안 한다고요!”

나는 그녀가 애써 묻어 둔 수치스러운 기억을 들출까 두려워, 사색을 하고 소리쳤다.

‘그만해! 간신히 잊었다고……!’

나는 아직도 종종 악몽을 꿨다.

저 망할 봉을 휘두르며 ‘파이어 피숀’ 같은 말도 안 되는 마법 주문을 외치는 내 모습을.

굳건한 내 거부에 마리엔느가 반짝 눈을 빛냈다.

“그럼…… 복원 작업이 끝나면 제가 연구해도 될까요?”

“……그러세요.”

나는 떨떠름하게 답했다. 영원히 불태워 버리고 싶었지만, 유물 처돌이의 마음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었기에.

내 허락에 마리엔느는 콧노래를 부르며 신줏단지 모시듯 부러진 거울 봉이 담긴 상자를 ‘진실의 거울’ 앞에 내려놓았다.

못마땅한 얼굴로 그것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저, 공녀님. 말씀드릴 게 있는데요.”

일을 마친 그녀가 어느덧 내 곁에 바짝 다가서며 넌지시 말을 건넸다.

“뭔데요?”

“우선, 그 전에 하나만 여쭤볼 게 있어요.”

“뭐를…….”

“저번에 관심 있으시다던 아카데미…… 고고학과 맞죠?”

나는 멈칫 놀란 눈으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이곳에도 대학 같은 고등교육 기관이 존재한다는 것을 안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잉카 제국은 군사적으로 문화적으로 강대국이었다.

엄격한 시험을 거쳐 각 나라의 천재들만 입학 가능하다는 왕립 아카데미.

그곳의 교수직까지 오른 마리엔느가 신기해서 지나가듯 했던 말이었다.

‘쯧…….’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과연 천재는 천재였다.

그 말을 아직까지 기억하는 것도 모자라, 한마디도 한 적 없는 관심사까지 꿰뚫어 본 그녀의 통찰력은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솔직하게 말할게요. 전 공녀님이 탐나요. 제 직속 제자로서요.”

“……네?”

이렇게 갑자기요?

당황하는 나를 보던 마리엔느가 불현듯 덥석 내 양손을 붙들었다.

“공녀님, 우리 고고학과…… 사실 좀 힘들, 아니, 아주 거지 같아요.”

“마, 마리엔느.”

“입학시험 턱걸이로 붙은 놈들이 기어들어 와서 핑핑 처놀고만 있고, 성적은 매년 꼴찌의 꼴찌를 기록하고 있지, 연구비도 쥐꼬리만큼 주는 데다가 그놈의 조수는 언제쯤 배치해 주는 건지, 망할 게일 프로토스!”

“…….”

“큼큼…… 게일 프로토스는 아카데미 총장님이세요.”

뜬금없는 거친 욕설에 눈을 휘둥그레 뜬 내게 마리엔느가 헛기침을 하며 덧붙였다.

“그렇지만 공녀님께서 우리 학과로 진학하신다면, 이 모든 처우가 개선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아요.”

“네? 저라고 딱히 그런 힘이 있지는…….”

“공녀님, 저 지금 사표 쓰기 일보 직전이에요. 그러니 사람 한 명, 아니, 멀쩡한 학과 하나 살린다 치고 입학해 주시면 안 될까요? 제가 공녀님의 졸업까지 탄탄대로를 보장하겠습니다. 네? 제발요…….”

마리엔느는 흡사 애원하듯 나를 붙들고 매달렸다.

난 난처한 음성으로 답했다.

“하지만 마리엔느, 입학 시기는 이미 지났는걸요.”

워낙 입학 희망자가 많아 경쟁률이 높은 왕립 아카데미는 3년에 한 번 꼴로 졸업과 입학을 동시에 치른다.

애석하게도, 나는 그 시기에 칼리스토와 신나게 솔레일 바닥을 기고 있었기에 해당 사항이 없었다.

그러자 마리엔느가 희번덕 눈을 빛내며 소리쳤다.

“그래서! 제가 몇백 년 전 사례까지 뒤지고 뒤졌지 뭐예요?”

“……예?”

“학기 중 입학이 아예 불가능한 건 아니에요. 156년 전, 아카데미에 있는 타국의 왕자를 짝사랑한 황녀 하나 때문에 황제의 직인이 있는 황족들은 딱 한 번 중도 입학이 가능한 특례가 있더라고요!”

“전 황족 아닌데요?”

“무슨 소리세요? 곧 남편이 제국의 황제가 되시잖아요?”

“네?”

“예?”

마치 일상을 얘기하듯, 여상하게 흘러나오는 마리엔느의 목소리에 우뚝 사고가 멈췄다.

‘남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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