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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엔딩은 죽음뿐-234화 (234/243)

<>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외전 3화>

해맑은 마리엔느의 얼굴에 못 박힌 두 눈동자가 하릴없이 흔들리는 게 느껴졌다.

‘어떻게 알았지?’

나는 나름 우리 관계를 잘 숨겼다고 생각했다.

비록 칼리스토 그 미친놈이 예전에 제 부하들에게 ‘예비 황태자비’라느니 헛소리를 늘어놓고 다니긴 했지만…….

그 말을 꺼내는 인간이 나타날 때마다 개지랄을 떨어서 그런지, 다들 그딴 말은 입 밖에도 꺼내지 않었다.

이전에 황태자와 그 문제로 수없이 다뤘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정말로 그쪽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왜냐하면 망할 게임 때문에 그럴 정신이 없기도 했거니와, 솔직히 결혼까진 아니지 않은가.

‘사귄다고 인정한 지 이제 며칠 지났는데 무슨 놈의 결혼?!’

예상치 못한 마리엔느의 말에 대답하지 못하고 버벅거리는 사이.

“세상에나! 그럼 전 미래의 황후 전하와 대화하는 중인 거잖아요?”

그녀가 새로이 깨달았다는 듯 ‘짝’ 하고 손뼉을 한 번 치더니, 그대로 허리 숙여 내게 절을 했다.

“잘 부탁드리옵니다, 황후 전하.”

그녀의 뜬금없는 행동에 현장 내 호기심 어린 이목이 하나둘 쏠리기 시작했다.

“그, 그만해요, 다들 오해하잖아요!”

손을 뻗어 그녀를 마구 일으킨 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벌게진 얼굴로 허둥지둥 물었다.

“누, 누가 말했어요? 혹시 세드릭? 아니면 그 망할 놈이 또……!”

“에이, 그걸 꼭 누가 말해야 아나요? 척 보면 척이죠.”

은밀한 미소를 짓는 마리엔느의 얼굴에 나는 2차 충격을 먹었다.

‘정식으로 사귄 지 이제 겨우 며칠짼데…… 그렇게 티가 났다고?’

그럴 리 없었다. 낮 동안 우리의 소통은 대부분 세드릭을 통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자리를 털고 일어난 후의 그는 너무나도 바빠서 사적으론 얼굴 마주할 틈도 별로 없었다.

합심하여 세계를 위협하는 주적을 물리치고, 황태자파에 선 부친의 정치색을 이어 황궁에서 수습을 돕는다.

누가 봐도 공적인 협력 관계이지 않은가!

“걱정 마세요, 공녀님. 저 말곤 아무도 그렇게 생각 안 할 테니까요.”

내 당황스러운 심정을 고스란히 읽은 건지 다행히도 마리엔느가 얼른 덧붙였다.

“아무렴 전쟁터를 휩쓸고, 하루아침에 정적마저 쓸어버린 ‘그’ 황태자 전하시잖아요.”

“네? 그게 무슨…….”

나는 갑작스럽게 변경된 대화의 맥락이 이해가 가지 않아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자 그녀는 우리가 연인 관계임을 들켰다는 말보다 더 어마어마한 소리를 내뱉었다.

“그런 분이 고분고분 대하는 유일한 사람인데 얼마나 대단한 능력의 소유자 같겠어요?”

“……예”

“게다가 공녀님의 마법 공격을 목격했던 사람들이 말하기를, 사실상 공녀님이야말로 제국을 먹어치울 마법 괴물이라는 소문이 파다하던데요? 그래서 황태자 전하께서 경계하기 위해 황궁에 두시는 거라고…….”

“뭐, 뭐라고요?!”

나는 그야말로 대경실색했다.

에카르트의 미친개, 석궁 쏘는 침팬지도 모자라…… 이제는 하다못해 제국을 먹어치울 마법 괴물이라니?

‘미친, 그렇고 그런 사이란 소문보다 그게 더 기분 더러워!’

기가 막히다 못해 코까지 막힐 일이었다.

최대한 우리 관계를 숨기기에 급급한 나는 그딴 말도 안 되는 소문이 도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따지고 보면 숨긴 것도 아니었다.

다섯 남주 중 한 명이 중상을 입고, 나머지 두 명이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는 상황에 우리 사이를 티 내기가 그랬다.

결정적으로 그나마 멀쩡한 공포의 주둥이가 알면 골치 아파질 게 뻔했기에.

‘그런데 지배하는 거면 그냥 지배하는 거지, 먹어치우긴 뭘 먹어 치워? 내가 돼지냐!’

대체 어떤 할 짓 없는 놈들이 그딴 말을 떠들고 다니는 것일까.

날이 갈수록 강력해지는 내 헛소문에 부아가 확 치밀었다.

벌게졌다 퍼래지길 반복하는 내 안색에 마리엔느가 내 눈치를 보았다.

“제, 제가 괜한 말을 했나 봐요, 공녀님.”

“……아니에요. 말해 줘서 고마워요. 안 그랬으면 까맣게 몰랐을 텐데.”

“하하…….”

“혹시, 어떤 새끼가 그딴 소리 지껄였는지 기억나세요?”

이를 꽉 깨물고 서늘하게 웃으며 묻자, 마리엔느가 겁먹은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저, 저도 풍문으로 접한 거라…… 호호호, 물론 전 당연히 안 믿었어요!”

그녀가 황급히 수습하려 들었지만, 나는 이미 마음을 먹었다.

그딴 망발을 지껄인 놈을 잡아 쳐죽이리라고.

그러다 뒤늦게 의문이 들었다. 황태자와 내 사이의 소문이 그렇게 살벌하게 났는데.

‘마리엔느는 대체 어떻게 알게 된 거지?’

의아하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자, 그런 내 시선을 눈치챈 마리엔느가 어딘가를 바라보며 배시시 웃었다.

“소문처럼 황위를 두고 황태자 전하와 대치하는 관계라면, 보좌관님이 매일같이 마르고 닳도록 공녀님 찾아 헤맬 이유가 뭐 있겠어요?”

“공녀님!”

그와 동시에 누군가가 우렁찬 소리로 나를 불렀다.

휙 고개를 돌리자, 막 현장에 들어선 세드릭이 나를 발견하고 허겁지겁 뛰어오는 것이 보였다.

“공녀님, 황태자 전하께서 유물 복원과 관련하여 급히 상의할 일이 있다고 하십니다.”

한달음에 내 앞에 다가온 세드릭이 가쁜 호흡을 몰아쉬며 용건을 털어 놓았다.

누가 봐도 사무적인 일로 온 사람 같았다.

“매우 중대한 사안이니, 가급적이면 빨리 방문하셨으면 좋겠다고 전하셨습니다.”

‘급히 상의할 일’이란 기껏해야 같이 차나 밥을 먹자는 것일 테고.

‘매우 중대한 사안’은 지가 급하니 곧장 튀어오란 소리다.

‘그러고 보니, 곧 점심때네.’

그 생각과 동시에 마리엔느가 감탄하듯 작게 중얼거렸다.

“……세상에,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는 게 정말이었나 봐요.”

그제야 시도 때도 없는 세드릭의 방문이 누군가의 눈엔 다르게 비칠지 모른다는 깨달음이 덜컥 찾아왔다.

“네? 뭐라 하셨습니까, 레이디 테롯…….”

“어, 어서 가요!”

나는 허겁지겁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았다.

폭탄을 입에 품은 두 인간이 붙어 있어 봤자 별로 좋지 않은 일들만 벌어질 것이다.

세드릭의 팔을 마구 잡아끌자 다행히 그는 당황하면서도 순순히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공녀님, 혹시 어디 아프십니까? 얼굴이 너무 붉으신데…….”

“급한 사안이라면서요? 잔소리 말고 얼른 가요!”

“좋은 시간 보내고 오세요, 공녀님!”

영문을 모른 채 내게 끌려오는 세드릭과는 다소 상반된 마리엔느의 배웅을 받으며 나는 성큼성큼 황태자 궁으로 향했다.

황궁 깊숙한 내부에 있는 황태자 궁과 작업 현장까지는 거리가 꽤 있었다.

칼리스토를 만나러 가는 동안 나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마지막 퀘스트가 끝나고, 황궁과 수도 내 나에 대한 인식이 좀 바뀌었다는 건 알았지만 실제로 체감하긴 드물었다.

황태자 궁에서 워낙 두문불출했던 탓이었다.

‘난 조용히 있는 게 이상한 소문들 가라앉히는 데 도움되는 줄 알았지…….’

상식적으로 귀족 영애가 의식 잃은 황태자의 궁에 처박혀 있는데, 무슨 황위를 건 새로운 대치 관계 따위의 소문이 돈단 말인가.

‘공작은 알고 있을까?’

내 입으로 직접 인정한 칼리스토와의 관계를 들은 유일한 인물이었다.

에카르트의 명성에 먹칠 가는 소문이라면 공작이 가만있지는 않았을 텐데…….

‘아니야.’

그러다 불현듯 생각이 달라졌다. 어쩌면 공작은 이딴 괴소문을 반겼을지도 모른다.

황태자를 지지하면서도 썩 마음에 들지 않아 했으니.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황태자의 새로운 정적이라는 소문을 가라앉히려면 연인 관계임을 대놓고 공표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아까의 마리엔느처럼 미래의 황후 어쩌구 소리를 들으며 대우 받기는 싫었다.

그건 뷘터 생사 확인 작업이 마무리되면 손 놓은 공부를 다시 시작하여 조용히 학도의 길을 걸어 보려는 내 계획과는 전혀 다른 방향이었기 때문이다.

‘아니, 그러고 보니 그냥 연애 좀 하는 것뿐인데 마리엔느는 왜 갑자기 결혼으로 논리 점프야?’

차분했던 생각들이 점점 머릿속에서 마구잡이로 뒤섞이던 그때.

“……녀님, 공녀님?”

나를 부르는 소리에 퍼뜩 상념에서 깨어났다.

옆을 돌아보자 세드릭이 의아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네? 저 불렀어요?”

“갑자기 걸음을 멈추셔서 말입니다.”

“아…….”

나는 그제야 길 한복판에 우뚝 멈춰 섰다는 것을 깨닫고 민망해졌다.

다시 걸음을 옮기자 세드릭이 대수롭지 않게 따라 걸으며 입을 열었다.

“공녀님, 가는 길에 뭐 하나만 여쭤봐도 됩니까?”

“뭔데요?”

“다름이 아니라 혹시, 아르키나 제도와 가장 가까운 항구가 있는 트라 탄이란 도시 기억하십니까? 얼마 전 솔레일이란 섬이 수장된 사건이 있었는데…….”

“아.”

물론 똑똑히 기억했다. 그 섬은 내가 수정시켰으니까.

“……거긴 왜요?”

안타깝게도 그곳에 관해선 별로 좋지 않은 기억뿐이었기에 되묻는 목소리가 퍽 시큰둥했다.

언짢은 내 반응에도 세드릭이 멋쩍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겨울이 다가오면서 트라탄을 중심으로 아래 지방에 큰 기근이 들었다고 합니다. 각 지역의 영주들이 자금과 물자 지원을 해 달라고 아우성 중인데요.”

“…….”

“만약 공녀님께 해결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진다면 어떤 해결책을 쓰시겠습니까?”

‘또 시작이네.’

나는 생각했다. 황궁에 머문 이후 세드릭은 종종 이렇게 내게 알쏭달쏭한 질문을 하곤 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저 모시는 주군이 국정을 다스리기에 영 믿음직스럽지 못하니, 여기저기 자문을 구하는 거 아닌가 여길 뿐.

“뭘 어떻게 해요? 국고를 풀겠죠.”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여상히 답했다. 누구나 생각할 법한 일차원적인 방법이었다.

“그게…… 시국이 시국인지라 다른 때보다 국세를 거둬들이기 어렵습니다. 지금 국고를 풀어 버리면, 정작 한겨울에 한파로 고난을 겪는 지역들을 지원하기 힘들어집니다.”

그러나 세드릭이 난처한 얼굴로 오류를 지적했다.

‘그럼 어쩌라는 거지?’

나는 의아해졌다. 국무라곤 담쌓은 내게 방안을 강구해 봤자, 남의 나라 얘기처럼 들리기만 했다.

“……제게 기부를 권고하는 건가요?”

설마 에메랄드와 다이아몬드 광산으로 내가 부자가 된 걸 눈치챈 건가?

눈을 게슴츠레 뜨고 반문하자, 그가 당황하며 손사래를 쳤다.

“아니요. 제 말은…… 그러니까 다른 자금책이 있을까 해서 말입니다.”

“다른 자금책?”

국고 조달에 국세 말고 다른 자금 책이 뭐가 있…….

그렇게까지 생각했을 무렵 번뜩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아, 혹시 이번에 몰수한 황비 가문 재산 말이에요?”

“그라췌!”

그러자 세드릭이 ‘딱!’ 하고 손가락을 튕기며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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