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외전 5화
칼리스토와 티격태격하다 보니 어느덧 식사가 대강 끝이 났다.
디저트로 내온 메론 셔벗까지 야무지게 먹고 있을 때였다.
“전하, 죄송합니다. 급히 드릴 말씀이 있어…….”
“뭐야.”
그의 부관 중 한 명이 만찬장 안에 난입했다.
상관의 성격을 알면서도 저러는 것이면 진짜 급한 일이란 소리다.
“제기랄.”
예상이 맞았는지 보고를 들은 칼리스토가 살벌하게 얼굴을 구기며 욕설을 뇌까렸다.
“……미안한데 공녀, 그만 일어나야겠군. 급히 회의가 잡혔어.”
그가 일어날 채비를 하며 사과했다.
마침 나도 막 그릇을 비운 참이라 들고 있던 티스푼을 고분고분 내려놓았다.
“괜찮아요. 저도 대충 다 먹었어요.”
“왜, 더 먹고 가지. 누가 훔쳐 갈까 봐 그렇게 코 박고 먹던 거 아닌가?”
“그, 그 정돈 아니었거든요?”
오랜만에 먹는 디저트라 반가워서 그랬지, 그의 말처럼 그렇게까지 환장하고 먹지는 않았다.
휙 쏘아보자 칼리스토가 자리에서 완전히 일어서며 유쾌하게 웃었다.
덩달아 일어선 나는 작별 인사 차 회의보다 중요한 일정을 상기시켰다.
“식사 후에 의원이 방문하기로 한 거 잊지 않았죠? 진찰 꼭 받아요.”
“……음.”
역시나 잊고 있었는지 칼리스토가 미묘한 얼굴을 하며 눈을 피했다.
대체 유년 시절에 어떻게 자란 건지, 그는 의원에게 진찰을 받거나 약을 먹는 것을 매우 싫어했다.
‘애도 아니고…….’
그는 아직 엄연한 환자였다. 두 번, 세 번 말하지 않으면 바쁘다는 핑계로 진찰을 피할 게 뻔했다.
“약속하고 가요. 진찰받고 일하기로.”
“공녀, 잠깐 이리 와 봐.”
“싫습니다. 말 돌리지 말고 빨리 약속이나 하고 가세요. 기다리잖아요.”
“그래? 그럼 내가 가지.”
발을 동동 구르며 기다리는 부관을 향해 턱짓했지만, 역시나 요지부동이었다.
꿈쩍도 안 한 채 인상을 쓰고 있는 나 대신 칼리스토가 히죽 웃으며 성큼성큼 거리를 좁혀 왔다.
“여기, 묻었잖아.”
“뭐 하는…….”
단숨에 앞까지 당도한 남자가 손을 뻗었다.
주춤 뒤로 몸을 물리기 전에 따뜻한 온기가 입가에 닿았다.
그가 굳은살이 박인 엄지손가락으로 입술을 부드럽게 지분거렸다.
“애도 아니고 칠칠맞기는.”
깜짝 놀라 굳어 있던 나는, 곧바로 들려오는 웃음기 어린 목소리에 얼굴이 붉어졌다.
그의 말대로 맛있어서 정신없이 먹느라 묻히고 먹는지도 몰랐다.
‘아니, 지는 약 먹기 싫어서 도망다니는 주제에!’
민망함도 잠시, 다른 누구도 아닌 칼리스토에게 그런 취급을 받았다는 사실이 충격으로 다가왔다.
“지금 누가 할 소리를……!”
쪽.
그때였다. 입술에 거칠거칠한 굳은살 대신 몰랑한 감촉이 도장 찍듯 쏜살같이 닿았다 떨어진 것은.
나는 방금 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해 그저 멍하니 입을 벌리고 얼어붙었다.
“달군.”
그런 나를 바라보며 칼리스토가 이를 드러내고 씨익 웃었다.
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휙휙 둘러보았다.
“……미쳤어요?”
다행히 그의 커다란 덩치에 가려 부관과 시종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얼굴에 벌겋게 열이 올랐다. 대낮부터 이게 무슨 망측한 일이란 말인가.
“아니? 약혼녀에게 입 맞출 정도로 지극히 제정신이지.”
“이, 이…….”
부끄러움도 모르는 인간아!
그러나 벌컥 분노를 쏟기도 전에 칼리스토가 제 쪽으로 나를 와락 끌어당겼다.
“억!”
그 바람에 딱딱한 가슴에 이마를 정통으로 부딪혔다.
“이봐요!”
막무가내로 나를 끌어안은 남자의 어깨를 퍽퍽 내리쳐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던 순간이었다.
“후…… 가기 싫군.”
칼리스토가 내 어깨에 이마를 비비며 어리광을 피우듯 중얼거렸다.
“진찰은 저녁으로 미뤄야 할 것 같아. 핑계가 아니라 정말이야.”
진심인지, 꽤 지친 목소리였다.
쥐어뜯기 위해 결이 고운 금발을 한 움큼 움켜잡았던 손가락에 스르륵 힘이 풀렸다.
나는 그의 뒤통수를 헤집은 손을 떼지도, 그렇다고 마주 안지도 않은 어정쩡한 자세로 그의 품에 안긴 채 물었다.
“……그렇게 바빠요?”
“대관식 때문에 골이 부서질 것 같군.”
“대관식이 왜요?”
“입만 산 늙은이들이 사사건건 이건 이래서 안 된다, 저건 저래서 안 된다…….”
목덜미에 얼굴을 묻은 칼리스토가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농담처럼 속삭였다.
“이러다가 내가 황위에 오르는 것조차 반대하겠어.”
지금 제국에 남은 유일한 황위 계승자는 칼리스토뿐이니 그럴 리 없었다.
장난이란 걸 알았지만 그럼에도 불쑥 화가 치밀었다.
“어떤 미친 인간이 그래요?”
제국이 당장 멸망해도 상관없다고 입버릇처럼 말했음에도, 그는 목숨 바쳐 광룡으로부터 황궁을 지켰다.
엘렌 후작 무리마저 깡그리 숙청된 마당에 감히 누가 그딴 망발을……!
“아, 이것 좀 놔 봐요!”
순식간에 심각해진 나는 그의 품에서 벗어나기 위해 다시 버둥거렸다.
그러나 칼리스토 놈은 나지막이 웃음을 터뜨릴 뿐 상체를 꽉 얽어맨 팔을 풀지 않았다.
“그냥 해 본 소리야.”
“그냥 그런 소리를 해요?”
“감히 누가 날 반대하겠어? 세계를 멸망시킬 무시무시한 괴물을 죽이고 거머쥔 황위를 내게 양보한 영웅께서, 이렇게 두 눈 부릅뜨고 날 지지해 주는데 말이야.”
능글맞게 킬킬거린 그가 고개를 들고 다시 내 뺨에 ‘쪽, 쪽’ 하고 입을 맞췄다.
“내가 얼마나 든든한지 아나?”
“진짜!”
나는 필사적으로 놈의 입술 공격을 피하며 머리채를 잡고 있던 손에 힘을 줘서 달라붙어 있는 그를 뜯어냈다.
“장난이라도 그런 소리 하지 마세요. 지금 우리 사이에 무슨 헛소문이 도는지나 아세요?”
“아, 아!”
칼리스토의 근사한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엄살 섞인 비명을 지르며 그가 외쳤다.
“이렇게 박대할 거면, 그냥 국서로 두지 뭐 하러 황제로 만들어?”
“누차 말했지만, 전 황위 같은 거 관심도 없다고 했어요.”
“나도 딱히 관심 없어. 그대와 함께 희대의 악처로 기록돼도 괜찮다고 했지 않나?”
“됐거든요!”
마침내 그의 품에서 빠져나온 나는, 놈이 잡을세라 후다닥 몇 발자국 멀어진 채 소리쳤다.
“제 눈에 흙이 들어가도 전하가 대관식 치르는 꼴은 똑똑히 볼 겁니다.”
단순히 그의 헛소리를 일축하기 위한 말은 아니었다.
나는 이 세계에서 새 시작을 하기에 앞서, 무조건 칼리스토가 황제가 되는 모습을 보리라 다짐했다.
이건 시스템으로부터 마지막 퀘스트를 받았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본은 물론이고 암살자도, 방해하는 세력도 하나 없는 안전한 세상에서.
그가 꿈꾸던 대로 온전하게 황위에 오르는 그를 보고 싶었다.
그때는 일러스트처럼 환히 웃는 그 모습을 봐야 현실 세계로 가도 마음이 놓일 것 같았고, 지금은 그래야 모든 게 끝이 났다는 걸 실감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비록 무결한 황제가 되겠다는 꿈은 이미 물 건너간 듯했지만…….’
본의 아니게 비장한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고 있어서였을까.
칼리스토가 나를 달래듯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무 신경 쓰지 마.”
“…….”
나는 대답하지 않고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칼리스토가 성큼 한 발자국 다가왔다.
다시 끌어안으려나 싶어 피하려 했지만, 다행히 놈은 한쪽 팔을 뻗는 데 그쳤다.
“또, 또. 뚱한 표정 짓지 말고.”
커다란 손이 잔뜩 모여 있는 미간을 꾹꾹 문질렀다.
‘뭐 하는 짓이냐’는 뜻을 담은 까칠한 내 시선에 칼리스토가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그 헛소문들 말이야. 어차피 곧 결혼하면 들어갈 개소리들이니까.”
“뭐야. 알고 있었어요?”
잘도 모르는 척을 하고 있었겠다 싶어 뭐라 한마디 하려던 찰나였다.
문득 이상한 단어가 머리를 스쳐지 나갔다.
“결혼……?”
“그래. 대관식과 결혼식을 동시에 거행하려니 이것저것 부딪히는 게 많더군.”
그가 대수롭지 않게 늙은이들과의 트러블이 일어난 이유를 설명했다.
“아무래도 전례 없던 일이니까 늙은이들이 걱정하는 것도…….”
“잠깐. 누구 결혼식인데요?”
“뭐?”
나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그의 말을 허겁지겁 가로막고 물었다.
칼리스토가 황당하다는 듯 대꾸했다.
“당연히 우리 결혼식이지.”
“네?”
“황제의 대관식에 황제 말고 결혼할 미친 인간들이 어디 있겠어?”
입을 떡 벌린 내 반응에 황태자가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멍하니 눈을 깜빡이다 물었다.
“이거…… 혹시 프러포습니까?”
“그런 거추장스러운 걸 꼭 해야 하나, 우리 사이에?”
“……허.”
헛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프러포즈면 차라리 거절을 하려 했다. 그런데 그런 것도 아니란다.
게다가.
‘그런 거추장스러운 거……?’
세상에 이딴 식으로 결혼을 통보받는 사람이 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어이가 없다 못해 정신이 다 혼미해져서, 나는 한참 버벅거리다가 간신히 대꾸했다.
“누구 마음대로 결혼을 해요?”
“황태자가 황제가 되면 자연히 황태자비도 황후가 되는 거야.”
황태자가 어린아이에게 설명하는 투로 차근차근 지껄였다.
나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제가 왜 황태자비예요?”
“그럼 안 할 건가?”
“네.”
“뭐?”
“전 전하랑 결혼 안 할 건데요?”
내 말에 칼리스토의 얼굴에 걸려 있던 웃음이 사그라졌다.
방금 전에 결혼을 통보받은 나처럼 얼이 나간 꼴을 보자니 속이 좀 시원해졌다.
“무슨…… 네, 네가 나랑 결혼 안 하면 누구랑 해?”
꽤 한참 동안 지진 일 듯 눈동자를 떨던 그가 이내 더듬거리며 말했다.
“말해, 어떤 새끼야.”
“누구랑 하긴 누구랑 해요? 그냥 혼자 사는 거죠. 애석하게도 전 비혼주의잡니다, 전하.”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수롭지 않게 받아쳤다. 그러기 무섭게 그가 곧바로 되물었다.
“그럼 난?”
“그걸 제가 어떻게 알아요? 알아서 잘 사셔야죠.”
“하!”
이번에 헛웃음을 터뜨리는 건 칼리스토의 몫이었다.
마침내 장난기를 모두 거둔 그가 목소리를 내리깔고 읊조렸다.
“페넬로페 에카르트, 진심이야?”
“네.”
칼리스토와 나는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노려보았다.
한 치의 물러섬 없이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거리는 모습이 꼭, 사냥대회에서 재회했을 때로 돌아간 것 같았다.
허공에서 ‘파박’ 하고 새파란 스파크가 튀는 환영이 보이는 듯했다.
“저, 전하. 송구합니다만, 시간이 많이 지체되고 있사옵…….”
그때 그의 부관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우리 사이에 끼어들었다.
휙, 하고 칼리스토의 살벌한 시선이 그쪽으로 돌아가자 그가 ‘히익!’ 하고 기절초풍했다.
“……쯧, 장난은 이쯤 하는 게 좋겠군.”
그제야 아랫사람들 앞에서 못 볼 꼴을 보였다는 사실을 자각한 건지, 칼리스토가 애써 표정 관리를 했다.
“이만 가지. 남은 대화는 밤에 마저 나누도록 해.”
“장난 아닙니다. 그리고 묻지도 않으셨지만, 아무튼 전 말했어요.”
장난이라고 뭉뚱그리며 대충 넘기려는 속셈임을 모를 리 없었다.
나는 황급히 자리를 피한 후 뒤에서 또 어떤 음흉한 작당을 할지 모를 놈에게 쐐기를 박듯 말했다.
“전하, 아니, 칼리스토 레굴루스.”
풀네임을 부른 것이 꽤 충격이었는지 칼리스토가 입을 떡 벌렸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당신이랑 결혼 안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