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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엔딩은 죽음뿐-237화 (237/243)

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외전 6화

* * *

충격을 받은 채 우두커니 굳어 서 있는 황태자를 내버려 둔 채 나는 혼자 거처로 돌아왔다.

적막한 방에 들어오자 다 토해 내지 못한 분노가 우다다 차올랐다.

“뭐? 그딴 거추장스러운 걸 왜 하냐고?”

아무리 생각해도 기분 나빴다.

대관식 날 내 결혼식을 진행한다는 것. 황궁에 몇 주간 있는 동안 나는 듣도 보도 못한 소식이었다.

게다가.

- 네가 나랑 결혼 안 하면 누구랑 해?

꼭 본인이 아니면 나랑 결혼해 줄 사람 따윈 없다는 것처럼 들리지 않는가.

“하! 누가 결혼해 준대? 난 너랑 결혼할 생각 같은 건 조금도 없었어, 미친 황금 대가리 자식!”

나는 마치 눈앞에 칼리스토가 서 있는 것처럼 삿대질하며 소리쳤다.

“무릎 꿇고 제발 결혼해 달라고 빌어도 모자랄 판에! 내가 원하는 건 다 들어 줄 테니까 남아 달랄 땐 언제고, 이 망할 놈아!”

이게 바로 잡은 물고기에겐 밥을 주지 않는다는 것인가?

씩씩거리며 정신없이 방을 돌아다니던 나는 이내 금방 지치고 말았다.

오늘 오전부터 너무 많은 일이 있었다.

침대 위에 힘없이 드러누운 나는 착잡함에 한숨을 내쉬었다.

“하…….”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칼리스토가 눈을 뜬 이후로 이렇게 격렬하게 부딪힌 적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시종들이 보건 말건 있는 대로 내지르고 왔지만, 썩 마음이 편치 않았다.

“결국 마리엔느가 한 말이 사실이었네…….”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기실, 나라고 칼리스토와의 미래를 그리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를 사랑했기에 이곳에 남기를 선택했고, 연애도 결혼도 한다면 당연히 그와 할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이런 식은 아니잖아.’

약혼이면 몰라도, 결혼은 막연히 먼 훗날의 얘기라 생각했다.

이제야 시스템에서 완전히 벗어나 온전한 내 삶을 가지게 되었는데…….

칼리스토에게도 ‘무결한 황제’라는 꿈이 있듯, 내게도 꿈이 있었다.

나는 솔직히 현생에 두고 온 내 성적과 전공이 아까웠다.

무사히 살아서 집으로 돌아가겠다는 목표가 사라진 이상, 여기서나마 원래 내 꿈을 이루고 싶었다.

천만다행히도 이젠 그때처럼 일주일 내내 알바 하고 돌아와 곰팡이 핀 반지하 방에서 밤새 시험공부를 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러나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들을 보내고 있는 황태자를 배려한답시고, 정작 공부를 시작하고 싶다는 말조차 꺼내지 못했다.

‘난 아직도 이 세계가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른다고. 누가 귀족인지도 잘 모르는 마당에 무슨 결혼에, 황후야?’

억울하고 짜증이 났다.

그러나 동시에 새파랗게 질린 채 얼어붙었던 칼리스토의 마지막 얼굴이 떠올랐다.

‘……좀 심했나?’

아직 몸도 성치 않은 사람이었다.

게다가 부관도 앞에 서 있었는데, 좀 더 참을 걸 그랬나 싶은 후회가 뒤늦게 몰려왔다.

‘아니, 그렇다고 프러포즈도 안 하는 놈한테 냉큼 알겠다고 하는 것도 이상하잖아!’

양립되는 감정들에 머리를 쥐어 싸매고 고민하던 나는 이내 생각하기를 포기했다.

“아, 몰라! 내가 왜 그 인간 걱정을 하고 있어야 해?”

어차피 지금 하는 고민 걱정은 모두 쓸데없는 감정 소모였다.

“그러게 그 미친놈은 왜 상의도 안 하고 멋대로 그런 걸 계획해서는…….”

불만스럽게 중얼거리던 나는 차분히 결론을 내렸다.

이따 저녁에 칼리스토가 돌아오면 이성적으로 대화를 다시 나눠 봐야겠다고.

정신 나간 것처럼 구는 놈의 장단에 맞춰 같이 감정적으로 굴었다간 냉전만 지속될 뿐이었다.

‘화내지 말고, 냉정하게. 내 입장과 계획을 얘기하고 잘 타이르면 돼.’

- 내가 다 이루게 해 줄게. 마법이든, 고고학이든. 그대 하고 싶은 것 전부.

- 그러니까…… 돌아갈 생각 말고 여기 있으면 안 되나?

제 입으로 뱉은 말이 있으니, 나는 그가 충분히 그것을 지키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늘 일이 있어 늦어지실 것 같다고 전하셨습니다.”

저녁 식사를 앞두고 내 방을 찾아온 것은 칼리스토가 아닌, 세드릭이었다.

나는 가만히 그를 바라보다 물었다.

“삐져서 그런 건 아니죠?”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세드릭이 흠칫 내 시선을 회피하며 마구 고개를 저었다.

“바쁘신 건 사실입니다. 회의가 길어져서 저녁 식사도 거르신걸요. 그나마 공녀님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진찰만 간신히 받으셨습니다.”

“흥.”

나는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돌렸다.

‘유치한 놈.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난 딱히 아쉬울 거 없었다.

붓터 베르단디 생사 확인하기 프로젝트만 끝나면 황궁에 남아 있을 이유도 없으니까.

뭣하면 공작에게 당당히 지원을 요구할 계획까지 세우던 무렵이었다.

“공녀님, 그…… 이런 말씀 드리긴 좀 그렇지만…… 전하께서 충격을 많이 받으셨나 봅니다.”

세드릭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나는 짐짓 모르는 척 되물었다.

“무슨 충격이요?”

“정찬 자리에서…… 거절당하신 것 말입니다.”

“하, 그게 무슨 거절이에요?”

나는 꼴에 충격을 받았단 말에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거절은 무언가를 요구하거나 청했을 때 쓰이는 말이죠. 전 그런 말은 들은 적도 없는데요.”

“하하…… 전하께서 좀 눈치가 없으시긴 하죠.”

눈치가 없는 게 아니라 뒈졌다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그러나 그 대신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세드릭을 추궁했다.

“일부러 그랬던 거죠?”

“예? 무슨…….”

“저한테 종종 정세나 외교 문제 물어보던 거. 황후가 될 만한지 시험하려고 그랬던 거 아니에요?”

“예? 아, 아닙니다!”

거의 반 확신을 담아 묻자, 세드릭이 그야말로 펄쩍 뛰며 손사래를 쳤다.

“제, 제가 감히 누구를 시험한다고……! 그런 소리 마십쇼, 공녀님! 저 오래 살고 싶습니다!”

“그럼 왜 그랬는데요?”

“그, 그게…….”

우물쭈물하던 세드릭이 이윽고 눈을 질끈 감고 진실을 토로했다.

“황태자 전하께서, 그간 일부 안건들의 해결 방안을 공녀님의 고견인 것으로 못 박아 두셨습니다.”

“뭐라고요!”

나도 모르게 체통도 잊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간 세드릭의 유도로 정해 둔 답을 맞춘 것과 별생각 없이 내뱉은 말들이 실제 내 이름 아래 집행되었단 소리다.

‘어쩐지! 미친 듯이 받아 적는다 했다!’

나는 거의 세드릭의 멱살을 잡아 쥐고 싶은 심정으로 소리쳤다.

“아니, 미친…… 그게 말이 돼요? 그간 정치의 ‘정’ 자도 모르는 공작가의 미친개가 해결한 거라 그러면 다들 퍽이나 믿겠냐고요!”

“하지만…… 미리미리 그런 작업을 해 둬야 별다른 반대 없이 공녀님과 국혼을 올리실 수 있으니까요.”

내 입으로 내 악명까지 들먹거렸지만, 세드릭은 그저 멋쩍게 웃으며 황태자의 작당을 털어놓았다.

그도 모자라 속 터지는 소리까지 덧붙였다.

“그…… 공녀님도 아시다시피, 공녀님의 지난 별칭들이 좀 무시무시하시지 않습니까. 하하하…….”

머리가 아팠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지금쯤 노발대발하고 있을 한 사람을 떠올렸다.

“아버진 뭐래요?”

“예? 아버지라면…….”

“에카르트 공작님이요, 제 아버지! 그간 아무 말도 안 하셨어요?”

당장 달려왔어야 할 공작이 어쩐지 조용하기만 했다. 그게 오히려 더 불안했다.

“아, 에카르트 공작님께서는…….”

내가 아직 그쪽에 적을 두고 있다는 걸 잊고 있었던 건지 잠시 생각하던 세드릭이 이내 술술 공작의 반응을 설명했다.

“전하께서 무슨 꿍꿍이를 품은 건지 모르겠다며 꺼림칙해하시는 듯했지만, 그래도 공녀님의 위상이 나날이 높아지니 만족해하시는 눈치였습니다.”

그 말에 안도하는 것도 잠시. 나는 곧바로 다음 폭탄을 받아들일 준비를 했다.

“아버지도…… 대관식 진행에 관해서, 아세요?”

“아, 예…… 오늘 오전부로…….”

세드릭이 면구하다는 얼굴로 답했다.

‘그래서였구나.’

깨달음이 찾아왔다. 식사가 끝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급히 찾아온 부관과.

- 대관식 때문에 골이 부서질 것 같군.

- 입만 산 늙은이들이 사사건건 이건 이래서 안 된다, 저건 저래서 안 된다…….

오만상을 찌푸리고 불평하던 황태자.

그제야 아귀가 딱딱 맞아떨어졌다.

“……아버지가 절 급히 찾으셨겠네요.”

혼잣말하듯 중얼거리자 세드릭이 결연한 얼굴로 답했다.

“황태자 전하께서 미리 궁 내부에 외부인 출입을 금해 놓으셨습니다.”

“그건 다행이네…….”

기가 막힌 와중에도 일단 긴급 상황은 피했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하…….”

환장스럽게 돌아가는 상황에 나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세드릭이 흘끔흘끔 내 눈치를 봤다.

“저…… 공녀님.”

“나만 아무것도 몰랐네요.”

“예……?”

“우리 사이에 헛소문이 도는 것도, 나 몰래 내 결혼식이 준비되고 있던 것도.”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허탈한 웃음을 연신 터뜨리자, 안절부절못하던 세드릭이 대뜸 우는 소리를 했다.

“공녀님께서 조금 봐주십시오.”

“뭐요?”

‘그게 지금 눈 뜨고 코 베이기 직전인 나한테 할 소리냐?’

눈을 부릅뜬 채 바라보자, 그가 흠칫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이내 결심한 듯 진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전하께서 많이 불안해하시는 것 같습니다.”

“뭘요?”

“공녀님이…… 원하면 언제든지 미련 없이 이곳을 떠나실지도 모른다는 것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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