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외전 7화
“무슨…….”
그야말로 어처구니없는 소리였다.
겨우 그런 이유로 내 의사는 배제하고 당사자도 모르는 비밀 결혼식을 강행했다고?
“하, 그럼 돌아갈 기회도 걷어차고 이 망할 곳에 제가 왜 남았는데요?”
잠재워 두었던 화가 불쑥 치솟았다.
난 진심으로 할 만큼 했다.
암으로 죽어 가는 내 원래 몸도 포기하고 칼리스토 놈을 살렸고, 눈 뜰 때까지 전전긍긍하며 갖은 병수발을 들었다.
멀쩡히 걸어 다닐 수 있게 된 후에도 가지 말라 해서 군말 없이 황궁에 남았는데, 이 이상 뭘 더 해야 한단 말인가.
“이 배은망덕한 자식! 내 몸, 내 집, 내 대학 다 포기하고 살려 놨더니 뭐가 어쩌고 저째……!”
세드릭이 앞에 있다는 것도 잊고 이를 빠득빠득 갈며 욕설을 내뱉던 그 순간이었다.
“온전히 전하만을 위해 남았다고 하실 수 있습니까?”
세드릭이 전과 달리 사무적인 어조로 물었다. 나는 번뜩 고개를 들어 그를 마주 보았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공녀님께서는 황궁을, 아니, 어쩌면 수도를 떠날 생각을 하고 계시지요.”
“…….”
“그래서 말없이 아카데미 입학도 알아보셨을 테고요.”
“그건…….”
말문이 막혔다. 나는 그간 그런 내색을 칼리스토 앞에서 조금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떻게…….”
“전하께서 눈치채실 것을 공녀님이 모르셨으리라 생각지는 않습니다.”
아니, 정말 몰랐다.
심심풀이로 알아본 것들을 꿰뚫어 볼 정도로 칼리스토가 주도면밀하게 날 감시하고 있을 줄은.
“공녀님의 일이라면 전투 중에도 뛰쳐나가시는 분이신걸요.”
흠칫하는 내 모습에 세드릭이 씁쓸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아직…… 확정 지은 건 아니에요.”
나는 변명처럼 중얼거렸다.
“그냥…… 막연히 하고 싶은 걸 생각해 뒀을 뿐이라고요.”
나름 항변했지만, 계략을 들킨 자의 음성은 이미 패색이 짙었다.
시무룩한 내 대꾸에 세드릭이 빙긋 웃었다.
“공녀님의 계획을 탓하는 건 아닙니다. 오히려 전, 전하께서 정신을 좀 차리실 수만 있다면 공녀님이 무엇을 하든 지지합니다.”
“…….”
“하지만 지위도, 명예도, 금전도. 그 어느 것 하나 미련 두지 않는 공녀님을…….”
“…….”
“전하께서 무슨 수로 잡으실 수 있겠습니까?”
세드릭의 대변에 칼리스토가 이해가 가면서도 동시에 정말로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딴 식으로 결혼을 통보하는 인간이 어디 있어요?”
떠날까 봐 불안하다고 다 결혼하면 이 세상은 온통 커플 천지일 것이다.
‘아, 맞다. 이 게임 연애하는 게임은 맞지.’
빈정거림과 동시에 내 말의 모순을 깨닫는 더러운 경험을 겪고 있을 때, 세드릭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동감합니다.”
“전 그런 식으론 결혼 안 해요.”
“물론 전하께서 짧고 아둔한 생각과 우매하고 미욱하게 행동한 점을 바탕으로 공녀님께 거절당하신 건 저도 무척 유감입니다.”
“……차라리 대놓고 욕을 하세요.”
욕 하나 없이 돌려 까는 모습에 나는 혀를 내둘렀다.
그러자 세드릭이 다시 우는 소리를 내며 매달렸다.
“그래도 제발 예쁘게 봐주십시오, 공녀님. 공녀님이 아니면 누가 그……를 데리고 살겠습니까?”
아무도 없는 빈방임에도 세드릭이 사방을 훑어보며 내 귓가에 ‘인격파탄자’를 빠르게 속삭였다.
참 재밌게도 산다 싶어서, 나는 결국 웃으며 답했다.
“……하는 거 봐서요.”
* * *
세드릭이 돌아가고, 밤이 깊어졌다. 칼리스토는 여전히 코빼기도 비출 생각을 안 했다.
그를 기다리며 책을 읽었지만, 도통 집중이 되지 않았다.
탁-.
깔끔하게 표지를 덮은 나는 숄을 들고 방을 나섰다.
잠도 오지 않았기에 가볍게 밤 산책을 할 요량이었다.
궁 밖을 나오자 꽤 싸늘해진 바람이 전신을 휩쓸었다.
들고 나온 숄을 여미며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공작저도 만만치 않았지만, 황궁은 정말 어마어마한 부지였다.
자칫 잘못 돌아다니면 길을 잃어버릴 가능성이 농후했기에 아는 길만 따라 걷다 보니, 어느덧 유물 복원 작업을 하는 곳까지 도달했다.
“……언제 여기까지 온 거지?”
깜짝 놀라 주위를 둘러보니 어느새 길을 밝히던 전등이 사라지고, 불 꺼진 컴컴한 건물 하나만이 우두커니 솟아 있었다.
자주 드나들어 익숙한 곳임에도 밤에 보니 을씨년스럽기 그지없었다.
괜히 오싹해진 나는 돌아가기 위해 서둘러 몸을 돌렸다.
그때였다.
“어……?”
불현듯 컴컴했던 건물의 창문에서 희미한 빛이 흘러나왔다.
‘이 시간까지 작업을 하는 사람이 있는 건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단호하게 고개를 들었다.
황궁에는 고대 유물에 그렇게까지 관심이 있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한 사람만 빼고.
“그럼…… 마리엔느인가?”
그녀라면 충분히 남아 있을 가능성이 컸다.
‘진실의 거울’이란 존재를 알고 가장 열광하던 사람이었으니.
나는 잠시 돌아갈까 고민하다가, 이내 입구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왕 온 거 인사나 할까 해서였다. 겸사겸사 점심 이후의 작업 진행도 확인도 할 겸.
끼이익-.
안에 사람이 있긴 한 건지 역시나 커다란 문이 잠겨 있지 않았다.
“……마리엔느?”
나는 열린 문틈으로 살짝 들어서며 그녀를 불렀다.
그런데 돌아오는 답이 없었다. 샅샅이 훑어봤지만, 건물 안은 인기척 하나 없이 텅 비어 있었다.
‘그럼 이 빛은 누가 밝힌 거야?’
어디선가 흘러나오는 빛 덕분에 사위를 구분하는 데 문제가 없었다.
자칫하면 바로 튈 수 있게 나는 문밖에 몸을 반쯤 걸친 채 광원을 찾았다.
그리고 얼마 안 가 쉽게 그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저게 왜…….”
일순 머리가 멍해졌다.
빛의 출처는 다름 아닌, ‘진실의 거울’이었다.
부스러진 거울 조각들을 하나하나 끼워 맞췄을 뿐으로, 완전한 복원은 아직 먼 얘기였다.
그러나 겨우 틀을 갖춘 채 이곳저곳 듬성듬성 끼워 맞춰진 조그만 거울 면적에서, 일제히 흰 빛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 게 아닌가.
‘저게…… 어떻게 가능하지? 게임이 종료된 거 아니었나? 고대 마법사들이 분명…….’
빌어먹을 ‘고마우이!’가 귓가에 맴돌았다.
복원도 안 했는데 어떻게 ‘진실의 거울’이 작동하는 건지, 머릿속이 온통 뒤죽박죽이었다.
나는 짧은 시간 고뇌했다.
지금 확인할지, 아니면 그냥 이대로 돌아간 후 내일 마법사들을 대동하고 확인할지.
‘그런데 밤사이에 작동이 다시 멈추면?’
그 생각이 미치자 나는 곧장 행동을 옮겼다.
하나 다행인 점은, 고대 마법사들이 내게 해를 끼칠 일은 없다는 점이었다.
‘염병할 퀘스트를 줬으면 줬지…….’
나는 문 안으로 완전히 몸을 들이민 후 유물이 있는 곳까지 지체 없이 걸음을 옮겼다.
가까이 다가가자 틀에 붙어 있는 조막만 한 거울 면에서 일제히 쏟아지는 여러 갈래의 빛이 더욱 선명해졌다.
‘진실의 거울’을 몇 발짝 앞두고 멈춰선 채 나는 신중히 그것을 살폈다.
그때였다.
탁, 타닥, 탁탁-.
어디선가 둔탁한 소음이 들렸다.
흠칫 놀라던 나는 곧바로 그 소리의 정체를 찾았다.
“저건…….”
오전에 마리엔느가 거울 근처에 내려놓았던, 거울 봉을 담은 상자였다.
나는 사정없이 얼굴을 구겼다.
부러진 봉이 상자 속에서 왜 저렇게 소리를 내겠는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재수 없다고 확인도 안 하고 돌아가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다.
게다가, 언제까지 게임 시스템이 또 튀어나올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떨며 살 순 없었다.
‘그래. 차라리 새 퀘스트라면, 결판을 내보자고!’
나는 망설임 없이 쭈그려 앉아 손을 뻗었다.
잠금을 풀고 상자의 뚜껑을 열자 그 안에서도 흰 빛이 쏟아져 나왔다.
부러진 봉의 상단, 손거울이 빛을 뿜으며 덜덜 진동하고 있었다.
“넌 왜 부러져서도 이렇게 지랄 발광을 하냐, 응?”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일까. 나는 반쯤 체념한 채 손을 뻗어 손거울 밑에 달린 부러진 봉을 쥐었다.
웅, 웅-.
마치 공명이라도 하듯 손안에서 거울 봉이 진동했다.
일어나자 손거울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과 진동이 커졌다.
그것이 ‘진실의 거울’과 가까워졌기 때문이라는 건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거울 봉을 손에 쥐고 ‘진실의 거울’ 앞에 선 채, 나는 마지막으로 잠시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칼리스토가 아직 돌아오진 않았겠지?’
부디 그러길 바랐다. 이왕이면 아예 오늘 밤새 일을 했으면.
돌아왔을 때 내가 방에 없는 걸 보고 얼마나 난리를 칠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우웅, 웅, 우웅, 웅-.
그 순간, 미적거리는 나를 재촉이라도 하듯 거울 봉이 미친 듯이 몸을 떨어 댔다.
“아, 알았어! 한다고!”
부디 새벽이 오기 전에 빨리 끝나길 간절히 바라며 나는 반토막 난 거울 봉을 ‘진실의 거울’에 가까이 가져다 댔다.
그 순간, 어디선가 ‘화악-!’ 하고 강렬한 빛이 터져 나오더니 눈앞이 하얗게 물들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검은 공간 안에 서 있었다.
그리고 내 앞에 쭈그려 앉은 채 나를 빤히 올려다보고 있는 누군가를 발견했다.
“너, 너는…….”
사랑스러운 분홍빛 머리칼, 바다처럼 새파란 눈과 마주치자 반사적으로 머리끝이 쭈뼛 섰다.
나는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이본.”